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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공계는 뜨고 인문계는 하락할까
<박영숙의 미래뉴스>후기정보화사회는 사회문제 해결 위한 공학 부상
미국 초중등교 과학기술 집중…인문사회과학은 온라인 통한 평생교육
박영숙 유엔미래포럼대표 (2011.01.20 09:1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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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2009년 1월 20일 경기도 과천 국립과천과학관을 찾은 국회 이공계 모임 소속 의원들이 지구의 과거와 현재의 상태를 표시하는 장비 앞에서 2004년도 인도네시아 지진 당시 전 세계에 퍼져나간 지진해일의 당시의 모습을 살펴보고 있다. ⓒ연합뉴스
미래사회에는 이공계가 부상하고 인문계는 소멸하지는 않지만 학교 교과과정으로 배우기보다는 평생교육원 등에서 온라인으로 수강하게 된다. 대학교육이 대부분 이공계 혹은 의료보건, 생활과학, 기후변화, 사회복지 등 현실에서 사용되는 자질과 기술에 치중하게 된다고 하먼 박사는 ‘팬 시나리오’에서 대학교육의 미래예측을 하고 있다. 미국의 초중고등학교는 과학기술 공학 수학에 집중한다. 그 이유는 과학기술변화가 사회변화를 이끌고 있기 때문에 이제는 한두명의 과학자가 아니라 국민 전부가 한 가지 전문분야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농경시대 7000년동안 공학교육은 존재하지 않았다. 산업시대 200년간 공학교육은 각 국가의 부를 창조하는 산업 일꾼을 키우는데 목적을 두었고 제조업의 밑바탕이 되었다. 산업화시대가 끝나고 정보화시대 50년간 공학교육이 홀대를 받는 분위기이지만, 5~10년 후에 다가오는 후기 정보화시대는 의식기술, 뇌공학, 인지공학의 시대가 오며 여기에 나노, 바이오, IT, 코그노(인지)가 합쳐 모든 것이 융합하게 되는데, 융합의 기술이 공학교육에서 시작된다. 특히 후기정보화시대는 기후산업의 시대라고도 하는데, 기후산업 즉 공학이야말로 인간의 복지와 자연환경 보전을 지켜줄 수 있는 전문가를 키우는 교육이 된다. 즉, 또 다시 후기정보화시대는 융합하는 공학이 부상하게 된다.

신경제사회는 삶의 질 향상이 최대의 목표가 되고, 이 삶을 바꾸는 기술은 공학교육기술에서 나오며 메가트렌드는 결국 문화도 바꾸게 된다. 첨단기술은 공학 없이 연결될 수 없고, 그래서 공학도는 인공위성의 시각 즉 조감도를 보는 시야(holistic view)를 갖추지 않으면 안 된다. 기술, 기능 그 너머를 보고, 지속가능한 사회, 보안, 사회 인프라구축, 지역사회공동체 결성 등 결국 공학도는 사회문제해결사 (social solutionist) 즉 ‘미래의 해결사 (Tomorrow´s solutionist)’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2010년 11월 21일 IEEE(국제전기전자기술자협회)회의 참석자들이 공동으로 지적한 사항이다.

IEEE 2011년 회장이며 드렉슬대학 컴퓨터공학부 학장인 모세 캄(Moshe Kam) 박사는 "이제 공학교육이야말로 통섭(interdisciplinary), 프로페셔널리즘, 지속가능한 사회구성, 리더십, 원활한 의사소통, 팀워크, 기업가 정신을 갖춘 사람으로 키워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공학교육의 목표는 현실사회의 문제해결과 산업개발경험을 교실과 연구소로 가지고 와 후학을 가르쳐야 한다고 IEEE회의 참석자들은 입을 모은다. 그들은 학생들이 창의적이고 협동하며 멀티플레이어가 되고, 지구촌 각종 전문가집단과 함께 머리를 맞대고 공동연구를 지향하며 결국 ‘인간의 복지와 환경지킴이'(improve human welfare and safeguard the environment)가 되도록 교육시켜야한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앞으로는 대학생과 고등학생이 함께 지역사회 발전과 인류공헌 목적의 공학 관련 프로젝트를 통한 새로운 제품과 서비스를 개발하도록 해야 하며, 온라인 교육과정, 스마트폰 교육과정으로의 전환을 주장하였다.

미래에는 공학도들이 ‘미래의 해결사’가 되는 것이 목적이며, 공학도들은 창조적 엔지니어링으로 인류 혜택, 삶의 질 향상, 지구촌의 발전과 보존에 역점을 둬야한다. 의사들이 10년 이상 인턴의 낮은 보수로 고행하지만 스스로 의사라는 직업을 멋진 일자리라고 자랑하듯이, 공학도들도 공학을 화려하고 멋있게 외부에 알리는 홍보전략 또한 필요하다. 많은 젊은이들이 공학도, 과학자가 되도록 홍보나 이미지로 흡인하는 노력이 공학계 내에서 진행되는 것도 또한 중요한 임무이다.

공학도가 취득해야하는 기술

미래 공학도는 분석적 사고(critical thinking), 시스템 사고(systemic thinking), 통섭의 프레임 속에서 공동작업, 협업하는 능력, 자연환경 보존, 지속가능한 사회란 패러다임에 걸맞은 가치관을 갖춰야 한다. 특히 공학도의 최대 과제는 물 부족, 환경오염, 신재생에너지개 발, 과학기술발전 등 지구촌 15대과제를 해결하는 유엔미래포럼의 미션처럼, 지구 공동체과제를 다루는 마인드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이러한 인프라 개혁 및 발전을 통해 미래의 공학도는 민주주의 발전, 국제범죄 해결, 국제질병 예방, 여성 아동 빈곤문제 해결, 장기적인 정책개발, 의사결정 역량강화, 지구촌 문제 해결사의 역할까지 즉 공학도이면서 인문학도의 자질까지 겸비하는 것이 미래의 공학도의 비전이다.

공학교육은 이제 한 회사, 한 국가를 위한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지역사회 지구촌 공동체의 행복, 다국적 다민족 지구촌 인류 공익을 위한 제품과 서비스 개발에 목표를 두어야 한다.

미래사회는 인문계의 소멸 혹은 진화를 예측한다. 빌 할랄 조지워싱턴대 공학교수는 "인문학 즉 철학 문학 등은 30~40대에 온라인에서 공부하 게 된다"며 "그 이유는 수명연장으로 2030년이 되면 평균수명이 130세가 되거나 2035년이 되면 영원한 수명연장도 가능해질 수 있다"고 테크 케스트라는 미래기술예측 프로그램을 통해 밝히고 있다. 과학기술, 공학, 수학을 어릴 때 가르치고 철학, 사회학, 인문계통의 학문은 온라인으로 스스로 배울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는 주장이다. 철학은 사실상 사회경험을 한 후에 이해가 가며 사회학이야말로 지역사회 활동을 경험한 후에 배우는 것이 이해력을 높인다. 이러한 인문학은 평생교육으로 전환이 된다는 전망이다.

기술변화가 너무나 빨리 다가와서 공학은 매일 그 내용이나 기술이 바뀐다. 매주 새로운 정보를 업데이트하고 지속적인 탐구, 지식에 대한 욕구, 즉 동기유발을 시켜주는 공학교육의 전략이 필요하다고 제롬 글렌 유엔미래포럼회장은 주장한다. 그는 아이들이 유년기에 수학이나 피아노등을 배워서 두뇌의 신경네트워크를 연결시켜 사회성을 키우게 되는데, 유년기에 수학과학을 중점적으로 가르쳐서, 공학도 과학자들을 많이 배출하는 국가가 결국 기술왕국에서 부국으로 전환된다는 주장을 한다.

공학교육은 맞춤교육, 특수 자질 갖추는 교육

2004년 바르셀로나 선언문(The Barcelona Declaration)에서 반 데르 비어 박사는 공학이 지속가능한 발전에 왜 중요한가라는 질문에 ‘세상은 이제 아주 다른 공학도를 원하는데, 그는 바로 의사결정능력의 역량 강화가 되어 있으며, 장기적 시스템적 접근을 시도하고, 도덕과 윤리를 공덕으로 무장이 된 평등주의 사회통합을 이끌어나가는 지도자, 조감도의 시각으로 내려다보는 즉 큰 그림을 보는 융합, 통합을 목적으로 하는 사회 통찰력을 갖춘 전문가를 원한다"라고 말했다. 공학도는 한마디로 지속가능한 사회를 꿈꾸는 엔지니어가 되어야한다는 것.

미국 공학기술평가위원회(ABET·Accreditation Board for Engineering and Technology USA)는 공학도의 자격증에 공학도의 품격을 △정치, 경제, 사회, 환경, 도덕, 의료보건, 안보, 지속가능한 사회를 만드는 인류의 욕구와 희망을 성취시켜주는 시스템, 기술을 디자인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자 △전문가로서 사회 공동체에 대한 도덕적 책임감을 이해 하는자 △글로벌 경제 환경과 사회적 문제의 해결사로서의 공학도가 필요한 다양하고 폭 넓은 시각의 교육을 받은 자로 규정지었다.

또 바르셀로나 선언(2004 EESD)에서는 공학도의 자질을 △공학이 사회와 환경을 지역사회와 지구촌을 어떻게 연결, 통합시키는지에 대한 이해력을 갖춘 자로서 지구촌의 새로운 도전, 위협과 미래예측을 통한 메가트렌드를 읽어 새로운 문제를 미리 미리 해결 할 수 있는 미래예측기술을 익힌 자
△다양한 문화, 정치, 사회의 본질을 이해하고, 차이와 다름의 중요성을 이해하고, 이를 융합 화해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자 △통섭, 다문화, 멀티플레이어로서 현재의 기술을 응용하여 지속가능한 삶을 영위하는 방법, 자원 활용성및 효율성 강화, 환경오염 탄소저감, 쓰레기 관리능력을 갖춘 자로 규정했다.

이처럼 이제 공학도는 디자인하고 기계를 조작하는 사람이 아닌, 지구촌 문제해결, 탄소저감, 사회갈등 봉합, 의사소통 전문가인 멀티플레이어가 되어야 한다.

공학도가 공부해야할 과목들

그러므로 공학교육에 이 다양한 커리큘럼이 들어가야 하며, 공학만이 아닌 사회성, 도덕성, 창의성이 있는 만능일꾼을 목표로 두고 교육을 시켜야 할 것이다.

다양한 툴 이용 가능자로, 우선 언어가 능통해야하고, 사회적인 문제 심벌 현상을 읽어야하며 정보나 지식을 즉각 흡수 이해해야만 한다. 기기, 기계를 잘 다룰 수 있어야 하는 것은 물론이다. 즉 어학과목, IT, 과학은 필수이며, 다문화 이해도 중요하며, 지구촌 각종 인종과의 대화, 친화력이 중요하므로 다문화관련 과정이수도 중요하다.

타인과 의사소통이 중요하므로 의사소통기술, 협동 협업 팀워크는 기본이며, 협업능력, 팀으로 협력을 이끌어내는 지도력, 갈등해소와 대안을 제시하는 능력을 갖추고, 의사소통을 통한 발 빠른 행동개시, 추진력 상황 판단력이 있어야 한다. 생애주기 계획을 짜고 실천하는 능력, 개인의 행복 추구력, 타인의 권리존중, 흥미와 스스로 동기유발이 되도록 마인드를 갖추는 능력, 인류의 욕구를 이해하는 능력을 갖춰야 공학도로서의 자질을 다 갖춘 것이다.

글/박영숙 유엔미래포럼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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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스타일 2010.12월호
http://www.style.co.kr/culture/culture_view.asp?menu_id=01110100&c_idx=0100000000004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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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울지마 톤즈’가 주는 감동의 힘
130년 전 다미안 성인의 헌신 떠올라
종교·종교인 역할 진지하게 새겨보자


 



노재현논설위원·문화전문기자

가끔 일상에 찌든 나의 비루함이 들통나면서 심한 부끄러움에 휩싸이는 순간이 있다. 동시에, 눈에 두텁게 낀 백태가 한꺼번에 벗겨지는 느낌이 찾아든다. 조금 전까지 머릿속에 엉켜 있던 세속 잡사(雜事), 자잘한 번민들이 기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깨달음은 보너스다. 어제 다큐멘터리 영화 ‘울지마 톤즈’를 볼 때가 그랬다. 내전과 가난, 병마에 시달리는 수단 남부 톤즈 마을에서 8년간 봉사하다 올해 초 암으로 선종하신 고 이태석(1962~2010) 신부가 주인공이다.

 영화가 끝나고도 적지 않은 관객들은 선뜻 자리를 뜨지 못했다. 모두 눈시울이 붉어져 있었다. 나도 영화 보는 내내 손수건 신세를 졌다. 누군가 인터넷에 올린 ‘눈물로 눈물을 치유하는 영화’라는 감상평이 적절하지 싶다. 고인에게는 미안하지만 살아남아 영화를 보는 이들은 정화(淨化)되는 느낌을 선사받는다. 이태석 신부의 어떤 면이 그런 힘을 발휘했을까.

 그는 부산의 ‘세발자전거를 타고 놀기도 힘든’ 비탈진 산동네에서 자랐다. 10남매 중 9번째. 동네 성당이 유일한 놀이터였다. 아홉 살 때 부친은 작고했고, 모친이 자갈치 시장에서 삯바느질 해가며 자식들을 키웠다. 그는 초등학교 시절 성당에서 다미안 신부(1840~1889)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를 보고 같은 삶을 살겠다고 다짐했다고 한다. 벨기에 출신인 다미안은 하와이 몰로카이 섬에서 한센병 환자들을 위해 헌신한 가톨릭 신부다. 그 자신도 한센병에 걸려 49세로 선종했고, 지난해에 성인 반열에 올랐다.

 아들 태석이 공부를 잘해 인제의대에 진학했을 때 모친은 “대통령 된 것보다 더 기뻤다.” 그러나 의대 졸업 후 그는 사제의 길을 걷기로 결심하고 광주가톨릭대에 진학한다. 이미 형(신부)과 누나(수녀)를 하느님에게 바친 모친이 눈물로 말렸지만, 이태석 역시 눈물을 흘리며 어머니를 설득했다. 그리고 2001년 사제 서품을 받고서 아프리카 수단으로 떠난다. 남부 수단 톤즈 마을의 유일한 의사. 하루 300여 명의 환자가 몰렸고, 100㎞ 떨어진 곳에서 며칠씩 걸어 찾아오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는 이슬람권 환자들도 반겼다. “가난과 절망을 극복하기 위해 죽음의 늪에서 뛰쳐나온 아이들을 보니 가톨릭이니 개신교니 이슬람교니 하며 사람을 종교로 구분 짓는 것이 그들에겐 배부른 소리요 조금은 미안한 소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이태석 『친구가 되어 주실래요』)

  이 신부는 손수 벽돌을 찍어 병원 건물을 세웠다. 학교를 지어 초·중·고교 과정을 개설했다. 그가 조직한 35인조 브라스밴드는 수단의 명물이 되었다. 톤즈 근처의 한센인 집단 거주지는 이 신부가 애착을 갖고 자주 들르던 곳이었다. 거리낌 없이 한센인들과 어울리는 영화 속 이 신부는 130년 전 하와이에서 한센병 환자들과 동고동락하던 다미안 신부의 모습과 정확히 일치한다.

  재작년 11월 휴가차 입국한 그는 지인의 권유로 난생처음 건강검진을 받고 대장암 말기 판정을 받았다. 손을 쓸 수 없는 상태였다. 그러나 암 선고 1주일 후 밝은 표정으로 수단 어린이들을 위한 모금 음악회에 나와 통기타 치며 노래 부른다. ‘너의 마음 나를 주고 나의 그것 너 받으리. 우리의 세상을 둘이서 만들자…’. “우물을 파다 왔는데”라며 톤즈 마을만 생각하던 그는 끝내 아프리카행 비행기를 다시 타지 못하고 올해 1월 14일 오전 5시35분 하느님 곁으로 떠났다. 다미안 신부보다 한 해 이른 48세였다.

  민망하고 부끄러운 고백. 사실 나도 어린 시절 성당에서 다미안 신부 일대기 영화를 본 적이 있다. 옛날 같은 영화를 보았어도 범속(凡俗)한 지금의 나와 이태석 신부는 하늘과 땅 차이 이상이다. 올해는 일부 성직자나 신자들이 일반인들에게 거꾸로 ‘걱정’을 끼치는 일이 적지 않았다. 그래도 이태석 같은 분이 있기에 비종교인들이 종교에 대한 기대를 접지 않는다. 오늘은 마침 크리스마스 이브다.

노재현 논설위원·문화전문기자

[참고자료]
중앙일보 2010.12.24일자
http://article.joinsmsn.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4835246&ctg=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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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삶은 처음이나 중간이나 마지막이나
예외 없이 고통과 슬픔을 수반하겠지만
그래도 견딜 수 있는 것은 사랑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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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홍논설위원

# 나는 다섯 살 터울의 막내누나를 좋아한다. 엉뚱한 말 같지만 가끔 언젠가 훗날 막내누나가 세상을 뜨면 정말 슬플 거란 생각을 한다. 그 막내누나가 얼마 전 교회의 권사로 임직했다. 돌아가신 어머니와 아버지가 다니시던 바로 그 교회에서! 그런데 권사 임직 예배가 있던 날 막내누나가 입고 나온 한복은 어딘지 모르게 낯이 익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 한복은 십 년 전 돌아가신 어머니가 권사 은퇴를 하던 날 입으시고 훗날 막내누나가 권사가 되면 꼭 입으라고 신신당부하며 남겨놓은 한복이었다. 막내누나는 키가 1m70㎝이고 돌아가신 어머니는 1m60㎝가 채 안 되셨는데 일부러 막내누나 치수에 맞춰 한복을 지은 후 당신께서는 대충 접어 입으셨다고 한다. 그 얘기를 누나한테 들으면서 나는 애써 눈물을 참았지만 속으론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비록 다른 분들이 입은 한복보다 때깔은 덜 났을지 모르지만 막내누나가 입은 한복은 그 누구의 것보다 아름다웠다. 거긴 어머니의 속 깊은 사랑이 녹아 있었기 때문이다.

 # “레아를 위하여!” 영화 ‘더 콘서트’에서 30년 동안 악기를 손 놓았던 이들이 다시 모여 기적처럼 신들린 연주를 하게 만든 마법 같은 주문이다. 영화 속에서 볼쇼이 교향악단의 지휘자 안드레이는 유대인 단원들을 퇴출시키라는 당 상부의 명령에 불복한 죄로 연주회마저 강제로 중단당한 채 지휘자의 자리에서 졸지에 극장 청소부로 전락했다. 하지만 그는 우연히 볼쇼이 극장장의 방을 청소하다 파리에서 날아온 초청 공문을 보고 30년 전 함께 쫓겨난 단원들을 모아 파리 공연을 가기로 마음먹는다. 생활고에 시달려 악기까지 팔아먹은 단원들을 수소문해 우여곡절 끝에 그들은 파리로 향했다. 하지만 파리에 도착하자 그들은 모두 제각각의 이유로 뿔뿔이 흩어져 콘서트가 무산될 위기에 처했다. 그러나 결국 그들은 “레아를 위하여!”라는 한마디에 콘서트홀로 다시 모여들었다. 그리고 시베리아로 유형 가서 죽은 레아와 그의 연인 이삭을 떠올리며 제대로 된 리허설 한번 해보지 못한 오케스트라가 생애 최고의 연주를 해냈다. 그 마법의 비밀은 다름 아닌 사랑이었다.

 # 지난 수요일 오후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는 정명훈의 지휘 아래 서울시향과 국립합창단 등이 베토벤 교향곡 9번 일명 ‘합창’을 연주했다. 베토벤은 교향곡에 사람의 목소리를 넣어 더욱 장엄한 대서사시 같은 교향곡을 만든 최초의 사람이다. 그는 이 교향곡 악보에 육필로 실러의 ‘환희의 송가’를 떠올리며 “만민들이여, 서로 껴안으라!(Seid umschlungen, Millionen!)”고 써놓았다. 그렇다. 위대한 베토벤을 더욱 위대하게 만든 그의 마지막 교향곡이 당대는 물론 후세의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오직 하나, “서로 껴안으라”는 사랑의 메시지다. 인류를 살리고 지구를 살리며 너와 나를 살리는 유일한 자원은 다름 아닌 사랑이다. 그것은 푸면 풀수록 더 많아지고, 나누면 나눌수록 더 커지는 신비한 자원이다. 모든 지식, 사상, 종교, 철학 위에, 그리고 그 어떤 금력과 권력과 권세보다 더 높고 크고 깊은 것이 사랑이다.

  # “사랑하고 사랑받는 건 살아있음의 증거다.” 최근 개봉한 영화 ‘톨스토이의 마지막 인생’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대사의 한 구절이다. 이 영화의 원제는 ‘종착역’(The Last Station)!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의 파란만장한 82년의 생애는 러시아 남부의 아스타포보 역에서 종지부를 찍는다. 지금은 톨스토이역으로 이름이 바뀐 바로 그곳이 그의 삶의 종착역이다. 그렇다면 나와 우리의 종착역은 어디가 될까? 물론 지금으로선 알 수 없다. 다만 그 삶의 종착역에 다다랐을 때 그래도 끝내 웃을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모든 삶은 처음이나 중간이나 마지막이나 예외 없이 고통과 아픔을 수반한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 더욱 사랑해야 한다. 더 많이 더 아름답게 더 치열하게…. 오직 사랑만이 우리를 견디게 할 것이기에!

정진홍 논설위원 [자료출처] 중앙일보 2010.12.25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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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쟁이는 쿠페를 좋아해
[중앙일보] 입력 2010년 12월 18일

현대 자동차 쿠페 ‘투스카니’?

우리 나라엔 1700만 대가 넘는 자동차가 등록돼 있다. 그 많은 차 중에 멋지게 운전을 하는 사람은 과연 몇 명이나 될까. 비싼 차를 소유했거나, 기사가 달린 큰 차의 뒷좌석에 앉아 타고 다닌다거나, 스포츠카의 지붕을 내리고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질주한다면 남들이 멋지다고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울지 모르겠다. 하지만 사실 그것은 차주가 멋있어서가 아니라 명품 차가 폼을 내는 것이고 또 돈이 연출한 멋일 뿐이다.



 어느 주말 서울 삼청동길에서 마주 오던 롤스로이스 팬텀 한 대를 비켜 가는데 그 차를 운전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볼 수 있었다. 정장을 한 기사일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롤스로이스의 핸들을 잡은 사람은 의외로 젊은 여성이었다. 쿠페라면 몰라도 문짝이 넷이나 달린 팬텀 세단을 그것도 어리게 보이는 여자가 몰고 가는 것이 왠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런 큰 차라면 기사가 당연히 운전할 것 같은데 또 그래야 롤스로이스의 격에 맞을 것 같은데 그렇지 않았다.

  쿠페란 문짝이 둘 달린 화려한 차를 일컫는데 원래는 마차(馬車)에 사용되던 용어다. 19세기 프랑스에선 바퀴 4개 달린 4인승 마차에 벤치 의자가 서로 마주 보게 설치돼 있었다. 그러다 어느 시기에 그중 하나를 잘라내어 2인승으로 만들었다. 쿠페(Coupe)는 프랑스어로 자른다는 말인데, 의자 하나를 잘라 2인승을 만들었다고 해서 쿠페라고 이름 붙여졌던 것이다. 훗날 자동차가 등장하면서 차 문이 둘 달린 차를 2인용 마차처럼 쿠페라고 부르게 됐다. 스포츠카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멋을 내고 싶은 사람을 위해 만들어진 차가 쿠페다. 그래서 쿠페에 장착된 엔진은 세단보다 성능이 더 좋고 차의 내부도 고급스럽고 사치스럽기까지 하다.

 세단(Sedan)이라는 단어는 원래 이탈리아어로 두 사람이 드는 손가마에 설치된 의자를 뜻했는데, 지금은 지붕이 있고 문이 넷인 평범한 모델의 승용차를 뜻한다. 어쨌거나 쿠페의 문은 두 짝밖에 없지만 차 값은 문 넷 달린 세단보다 비싸다. 벤츠는 SLK, 롤스로이스는 팬텀2, 벤틀리는 콘티넨털2, BMW는 BMW 650 등의 쿠페 모델을 판매하고 있다. 다시 말해 진정한 멋쟁이들은 투 도어 쿠페(Two Door Coupe)를 좋아한다. 그래서 어느 나라에 멋쟁이가 많은가를 가늠해 보려면 그 나라에 쿠페가 몇 대나 되는지를 알아보면 쉽게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이참에 국내에는 쿠페가 몇 대나 굴러다니는지 알아봤다. 1996년 현대자동차는 티뷰론이라는 이름으로 쿠페를 내놓았다가 2001년 리모델링해서 투스카니를 출시했다. 2008년 제네시스 쿠페가 선보일 때까지 투스카니는 리모델링 없이 7년 동안 한 가지 모델로 꾸준히 판매돼 왔는데, 그동안 판매된 쿠페의 수가 2만2000대밖에 안 된다. 국내에선 쿠페가 잘 팔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엔 멋쟁이가 그리 많지 않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과연 맞는 말일까.

 현대자 동차의 쿠페 티뷰론이 1996년 출시됐을 때 필자는 남성을 위한 라이프스타일 월간지 ‘에스콰이어’를 발행하고 있었다. 국내 최초로 남성 라이프스타일 잡지를 창간했는데 시사지에 익숙한 독자에겐 라이프스타일 잡지가 낯설었다. 창간호엔 그래도 캔맥주 4개를 부록으로 붙여 8만 부 전량을 매진시켰지만 그 후엔 1만 부도 채 팔리지 않았다. 당시에는 남성을 위한 화장품, 패션 제품도 별로 없어 광고 매출도 매우 낮았다. 그런 남성지가 2002년에 들어오면서 잡지 판매 부수가 증가하기 시작했다. 남성용 패션 제품, 화장품의 등장으로 광고 매출도 늘어나기 시작했다.

 쿠페 자동차도 남성 잡지와 마찬가지로 주변 문화가 성숙해야 구입하는 사람이 늘어난다고 본다. 아직까지 국내에서 자동차는 부를 과시하는 수단으로 여기는 사람이 많다. 배기량 몇 ㏄짜리 승용차를 소유하고 있으며, 외국산이냐 국내산이냐에 따라 차주의 인격과 대우가 달라지는 게 우리나라의 현실이다. 호텔이나 고급 레스토랑에서 대리주차를 할 때 차종에 따라 차별을 받는 듯한 느낌을 받는 것도 그렇거니와 차주 자신도 경차일 경우 계면쩍어하기도 한다.

 옛 도심의 좁은 도로가 많은 유럽이나 일본에서는 경차에서부터 쿠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차종이 도로를 가득 메우고 있다. 남의 눈을 의식하지 않고 자신의 형편과 사정에 맞게 또는 취향과 멋에 따라 차를 선택할 수 있는 그 나라의 풍토가 부러울 따름이다. 우리나라 자동차 문화가 선진화될 때까지는 비싼 차 또는 덩치 큰 고급차를 타는 것으로 멋을 부릴 수밖에 없는 걸까.

김영철 가야미디어 회장 (에스콰이어·바자·모터트렌드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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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하면 인간을 이해할 수 있을까? 옛날 페르시아의 한 왕자는 자기가 장차 나라를 잘 다스리자면 인간을 잘 알아야 한다 생각하고 전국의 학자들을 불러 인간 이해의 방법을 마련해오라고 당부한다. 20년이 지나 학자들은 낙타 스무 마리에 책 2000권을 싣고 나타난다. “너무 많다. 줄여오라.” 또 10년이 지난다. 그 사이 왕자는 왕이 되어 있고 학자들은 낙타 세 마리에 책 500권을 실어 왕에게 대령한다. “이것도 너무 많다. 더 줄여라.” 다시 몇 년이 흐른 뒤 이번에는 나귀 한 마리에 책 100권 등짐을 지운 학자들이 나타난다. 왕은 이미 늙고 병들어 임종의 침상에 누워 있다. 왕은 탄식하며 말한다. “인간을 아는 일이 그렇게도 어려운가? 죽는 순간까지도 나는 인간을 알 수 없단 말이냐?” 그러자 학자 하나가 왕에게 귓속말로 일러준다. “폐하, 사실은 단 한 줄이면 됩니다. 인간은 태어나서 살다가 죽습니다. 그게 인간입니다.”

인간의 한 생애가 ‘태어난다, 산다, 죽는다’는 단 세 개의 동사로 요약될 수 있다는 것은 그리 기분 나쁜 일은 아니다. 인간은 누구나 죽음 앞에 평등하듯 그 세 개의 동사 앞에서 평등하다. 인간만이 아니다. 태어난다, 산다, 죽는다는 것은 모든 생명 가진 것들에 공통으로 적용되는 생물학적 전기(傳記)다. 그 전기는 생명체 공통의 것이라는 점에서 평범하고 평등하며 위대하다. 인간이 그 전기로부터 제외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인간의 코빼기에서 자만심을 뽑아내고 그를 낮은 곳으로 임하게 하는 효력을 갖고 있다.

그 러나 인간과 그의 삶에 대한 사유행위로서의 인문학은 “태어나서 살다가 죽는다”의 생물학적 전기를 거부하는 데서 출발한다. 인간이 잘 나서가 아니라 인간이 자기 존재와 삶의 방식에 대해 지고 있는 ‘책임’을 생각하고 따지는 것이 인문학의 중요한 한 과제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누구나 태어나 살다가 죽는다. 하지만 여기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살다가’라는 부분이다.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 인간의 전기는 천차만별로 달라진다. 어떤 사람은 인간으로 태어나 개처럼 죽고, 어떤 사람은 개처럼 태어나 인간처럼 죽는다. 삶의 방식이 각기 달랐기 때문이다. 철학자 볼테르는 생전에 자기 묘비명을 써놓고 죽은 사람이다. “친구를 사랑하 고 적을 미워하며 죽노라”는 것이 그의 자작 묘비명이다. 이 비명은 그가 어떻게 살고 왜 살았는가를 요약한다. 그것은 생물학적 보편 전기와는 다르다. 사마천은 자신이 왜 ‘사기’를 쓰게 되었는가를 밝힌 글 ‘임안에게 보내는 편지(報任安書)’에서 “사람은 누구나 한 번 죽지만 어떤 죽음은 태산보다 무겁고 어떤 죽음은 새털보다 가볍다”는 구절을 남긴다. 죽음의 차이에 관한 언명치고 동서고금에 이보다 더 빛난 표현이 없을지 모른다. 죽음의 차이는 사실은 삶의 차이, 어떻게 살았는가의 차이에 좌우된다.

넓 게 규정했을 때 인문학은 인간에 관한 사유, 표현, 실천의 총합이다. 이 의미의 인문학은 강단 인문학 혹은 학문으로서의 인문학과는 좀 구별될 필요가 있다. 학문으로서의 인문학은 서구 근대의 산물인 반면, 인간에 관한 사유, 표현, 실천으로서의 인문학은 동서양에 걸쳐 오랜 역사를 갖고 있다. 우리가 보통 인문학이라 부르는 것은 문학, 철학, 역사, 예술사, 서지학 같은 근대 이후의 학문 분과들을 지칭하기도 하지만 사실은 인간이 인간을 이해하고 인간을 생각하고 인간의 길을 모색해온 동서고금의 오랜 사유전통을 더 많이 의미한다. 이런 인문학은 전문 연구자만의 것이 아니고 전공자만이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 인문학은 만인의 것이다. 강단 인문학의 경우처럼 학문으로서의 인문학을 연구하는 것과 인문적 가치를 실천하는 것으로서의 인문학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인문학을 학문으로 공부하는 사람에게는 자기 전공 분야의 인문학 갈래를 연구하는 것이 주 과제다. 그는 ‘인간의 책임’을 생각하는 것이 인문학의 기본정신이라는 관점을 꼭 가져야 할 필요가 없다. 그런 정신없이도 강단 인문학은 가능하기 때문이다.
내 가 이 칼럼에서 진행해보고 싶은 것은 강단 인문학적 작업이 아니다. 나의 관심은 인간에 관한 사유와 실천으로서의 인문학이 중시해야 할 네 가지 책임의 문제에 관한 것이다. 인간에 대한 인간의 책임, 사회에 대한 인간의 책임, 역사에 대한 인간의 책임, 문명에 대한 인간의 책임이 그것이다. 다시 강조하지만 내가 말하는 인문학은 전문 연구자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또 내가 말하는 인문학은 교양주의자들이 생각하듯 예술과 문화 등등에 대한 무슨 고급 교양이니 소양이니 하는 것들을 스펙 쌓듯 쌓아나가는 것을 능사로 삼지 않는다. 인문학에 관한 이런 종류의 ‘교양론’은 이미 오랜 타락의 전력을 갖고 있다.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인문학은 단순 장식물도 액세서리도 아니다. 또 일부 실용주의자들이 착각하듯 무용한 백수의 사업인 것도 아니다. 이 종류의 실용주의 역시 사유의 정지를 특징으로 하는 이 시대의 정신적 마비와 타락을 반영한다.

이 칼럼은 위에 말한 네 가지 책임의 문제를 달팽이 북한산 오르듯 능력의 한도 안에서 가능한 한 천천히 생각해보자는 구도를 갖고 있다. 우선 ‘인간에 대한 인간의 책임’이라는 부분에서는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것이 핵심 질문으로 등장한다. 이 질문이 다음 칼럼의 주제다.

도정일은
문학평론가. 경희대 영어학부 명예교수.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설립위원장. 책읽는사회문화재단 이사장. 저서 ‘시인은 숲으로 가지 못한다’ ‘대담’ ‘시장전체주의와 문명의 야만’ 등.

[참고자료]
쿠키뉴스. 국민일보 2010.12.
http://news.kukinews.com/article/view.asp?page=1&gCode=kmi&arcid=0004441388&cp=n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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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을 사랑하시는 하나님 아버지 감사드립니다.

오늘날 세계 속의 대한민국은 저절로 이루어진 게 아니라 자신의 소중한 생명까지도 조국을 위해 아낌없이 내던졌던 수많은 이들의 피가 있었기에 가능했음을 고백합니다.

하지만 오늘 대한민국은 현실이지만 인정하고 싶지 않은 깊은 슬픔에 잠겨 있습니다.

강한 자부심으로 해병대를 선택했던 사랑하는 고 서정우 하사, 문광욱 일병을 가슴에 묻어야 하는 슬픔과 비통함 가운데 있습니다.

마지막 휴가 가는 배가 앞에 있음에도, 사랑하는 부모님을 보고 싶은 간절함에도 비겁하게 피하지 아니하고, 적의 포탄까지도 두려워하지 않는 해병대의 용기를 보여준 서 하사와 해병대에 입대한 지 세 달밖에 되지 않았지만 ‘한반도의 평화는 내가 지킨다’며 해병의 자부심으로 근무하던 문 일병은 선배들의 뒤를 이은 자랑스러운 해병대원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해병대에 근무하는 아들을 생각하며 자랑스러워했던 부모형제들은 세상에 둘도 없는 아들을 떠나보내야 하는 견디기 어려운 슬픔 가운데 있습니다. 사랑하는 유족들에게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원한 천국에서 다시 만날 소망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또한 서 하사, 문 일병은 죽음으로 우리 곁을 떠나간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아들로 다시 부활하여 우리 국민들의 마음속에 영원히 살아 있음을 알게 하여 주옵소서.

역사의 주관자가 되시는 아버지 하나님.

우리 모두에게 결코 오늘을 잊지 않게 하옵소서. 눈가에 흐르는 잠깐의 눈물이 아니라 우리 가슴속 깊이 이 슬픔을 새기게 하시고, 다시는 조국 대한민국에 이러한 희생이 반복되도록 하지 않겠다는 결단이 우리 가운데 있게 하여 주옵소서. 조국을 위해 한 알의 밀알이 된 고인들의 희생은 결코 헛되지 않을 것을 믿습니다.

사랑하는 전우를 지키지 못한 미안함에 고개 숙인 대한민국 해병대와 국군장병들에게 다시 한번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용기를 주옵소서.

지금도 조국을 수호하기 위해 바다에서, 하늘에서, 땅에서, 외딴 섬에서, 전후방 각지에서 위험과 외로움과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묵묵히 맡겨진 임무를 수행하는 국군장병들과 6·25전쟁의 잿더미 속에서도 한강의 기적을 이룬 대한민국을 더욱 더 강하게 하실 줄 믿사오며 우리의 구원자 되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해병대사령부 군종실장 중령(진) 황성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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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린의 '엄마의 집'

이주향 수원대 교수

40대 엄마에게 남자 친구가 있다면 스무 살을 갓 넘긴 딸은 어떻게 반응할까요? 아빠와 살 때는 온기없는 인형처럼 무감각하게 살았던 엄마가 남자 친구를 만나 다정하고 상냥해졌다면 젊은 딸은 엄마의 사랑을 승인할까요, 질투할까요? '엄마의 집'의 딸은 이렇게 반응하고 있습니다. "아저씨는 엄마와 나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내 외로움을 무럭무럭 자라게 하는 장본인이다. 하지만 엄마에게 아저씨가 없다면 가엾다."

결혼을 사랑의 무덤이라 하는 까닭은 결혼 후에는 배우자 이외의 사람을 공식적으로는 사랑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평생 사랑할 사람과 결혼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또 어쩔까요? 결혼할 당시 우리는 그 사람이 평생 사랑할 사람인지, 아닌지 알기 힘든데요. 더구나 젊은 날 사랑과 결혼의 운명은 대부분 착각과 도취가 빚어낸 환상 아니던가요. 엄마가 딸에게 이런 얘기를 해주네요. "실제로 사람이 만나는 건, 드라마와 달라. 말할 수 있는 게 아냐. 질서 있는 인과관계도 없고. 착각과 도취, 혹은 무지한 고집과 자기합리화와 이상한 자포자기 같은 것이 운명을 만들기도 하지."

살면서 우리는 그 착각과 고집과 자포자기의 대가를 톡톡히 지불합니다. '엄마의 집'에서 엄마는 이혼을 했고 아빠는 볼품없이 늙어갔으며, 부모의 운명 속에서 시달리며 성장한 딸은 꿈꾸는 법을 잊어버리고 애늙은이가 됐습니다. 모두가 상처인 거지요.

사실 가까운 관계란 상처가 없는 관계가 아니라 상처를 주고받는 관계입니다. 엄마가 딸에게 말합니다. "남자와 여자가 사랑을 하면 상처가 많이 생긴단다. 다른 여자에게 시선을 주어도 마음이 아프고 헤어질 때 한 번 더 돌아보지 않고 총총 가버려도 상처를 받지. 나이가 들어가는 것도 상처가 되고 언젠가는 우리가 죽을 거라는 사실도 상처가 돼."

중요한 것은 그 상처가 우리를 돕는다는 거지요. 상처를 주고받는 순간에는 기진맥진, 상처로 무너지는 듯 보이지만 결국 상처로 인해 사람들은 진짜 어른이 되어갑니다.

엄마 아닌 여자를 몰래 사랑한 아빠! 그 아빠를 미워한 딸은 이렇게 어른이 됐습니다. "내 미움의 근원은 아빠를 아빠라는 개념의 감옥에 가두고 그 역할을 요구했기 때문에 생긴 것이었다. 내가 아빠를 개념의 감옥에 가두는 폭력을 자행했다니 놀라웠다." 어른이 된다는 건 불안과 두려움으로 진실을 옹색하게 각색하지 않는 것이고, 가혹한 진실마저 묵묵히 받아들이는 겁니다.

엄마는 이혼 후에 아빠를 한 사람으로 온전히 이해하게 되었고, 또 다른 사랑을 하면서 사랑이 사람을 외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으로 살 수 없어 스스로 외로움으로 고립된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혼자 있는 사람이 외롭다는 건, 사람들이 하는 가장 큰 오해야. 사람은 자신의 모습으로 존재할 수 없어 외로운 거야. 사람은 진짜 어른이 되면 타인에게서 사랑을 바라지 않게 된단다. 묵묵히 삶에 복무하는 거지."

[참고자료]
이주향의 책읽기
http://book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2/01/2008020101504.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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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에 지쳐 ‘꿈’을 이용하지 않나요?
[매거진 esc] 이기호의 독고다이 상담실
Q 서른 앞두고 밴드드러머의 미련이 꿈틀거려요
» 일에 지쳐 ‘꿈’을 이용하지 않나요?
연예인 매니저를 하는 이십대 후반의 남자입니다. 이 일을 한 지 벌써 4년째인데 쉬는 날도 없이 계속 일만 한 것 같습니다. 처음엔 재미삼아, 그 뒤엔 적응돼서, 지금은 다른 일을 할 수 있을까 싶은 생각에 힘들어도 이 일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원래 꿈은 밴드 드러머입니다. 군대 가기 전까지는 친구들과 밴드를 만들어서 거리공연을 해보기도 했습니다. 꿈을 포기하고 매니저 일을 시작한 건 제대 뒤입니다. 돈을 벌어야 했거든요. 그런데 이제 어느 정도 안정이 됐다 싶어서인지 밴드에 대한 미련이 꿈틀거립니다. 이제 곧 서른인데 매니저를 언제까지 계속할 수 있을까 회의도 들고요. 더 늦기 전에 하고 싶은 일을 해봐야 하는 건 아닌가 고민이 됩니다. 밴드로 먹고살기 힘든 건 알지만 미루다 보면 영영 멀어지는 꿈이 될 거잖아요. 하지만 좋아서 한 뒤엔 어쩔 건데 하는 불안함은 어쩔 수 없습니다. 서랍 속에 넣어둔 사표를 제출하고 자신있게 새 세상으로 향한 문을 열고 나오면 되는데 그게 안 됩니다. 그 문을 열기가 쉽지 않아요. 도화선에 누가 불을 붙이지 않으면 터지지 않아서일까요. 아니면 장기적인 비전을 못 찾았으나 안정적인 일과 고정수입을 포기하지 못해서일까요. 마음은 이미 콩밭에 있는데 밭매러 나가지지가 않으니 이를 어찌해야 할까요.
A 자, 잘 들어봐라. 알고 지내는 후배 중 인디 쪽에선 나름 알아주는 밴드의 베이시스트로 활동하고 있는 친구가 한 명 있다. 벌써 10년 가까이 홍대 쪽을 기반으로 활동하고 있는 밴드인데, 음반도 석 장이나 냈고, 얼마 전엔 일본의 알아주는 레이블사와 계약도 했다고 들었다. 그 소식을 듣자마자 내가 제일 먼저 한 말은 ‘와, 그럼 이제 너 롯데마트에서 박스 나르기 안 해도 되는 거냐?’였다. 이게 무슨 말인지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아도 잘 알아들을 터. 그럼 곧장 다음 사례 하나 더. 역시 알고 지내는 작가 중 낮에는 학교 선생님으로 일하고, 밤에는 소설을 쓰는, 말하자면 ‘투잡’을 기본원칙으로 꽤 오랫동안 생활해온 선배가 한 분 계신데, 그래서였는지 몰라도 이 양반은 술만 마시면 ‘내가 전업으로 소설만 쓰면 이것들을 다…’ 운운하는 버릇이 있었다. 나도 꽤 여러 번 들은 소리이니 선배의 와이프야 말하면 무엇하랴. 해서, 선배의 와이프가 도화선이 되어, 얼마 지나지 않아 진짜 학교에 사직서를 내고 전업 선언을 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이게 웬걸? 선배는 전업 생활 2년 동안 소설은 한 편도 못 쓰고, 사보나 관공서 홍보물에 콩트와 수필만 잔뜩 쓰다가 다시 학교로, 기간제 교사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리고 그다음부터 다시 소설을 쓰게 되었다는 말씀. 이 또한 이런저런 해석을 갖다 붙이지 않아도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잘 알아들었을 터.
핵심은 ‘직업’이란 말과, ‘꿈’이라는 단어의 사전적 의미를 혼동하지 말라는 것. 그 안에 들어 있는 ‘생계’라는 의미와, ‘바람’이라는 어휘를 각각 다르게 바라봐야 한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어쩌면 당신은 지금 하고 있는 일에 지쳐서, 그 일에 진력나서, 어쩌면 그 알리바이로서 ‘꿈’을 이용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도화선을 찾는 것도 그렇고, 이렇게 상담 메일을 보낸 것도 그렇다. 객관적으로 판단해보면, ‘매니저’와 ‘밴드 드러머’는 같은 반열에서 선택을 고심할 비교 대상이 결코 못 된다.(알리바이를 찾는 사람들 의 공통적인 특성 중 하나가 ‘객관성의 결여’이다.) ‘A’를 대체할 ‘B’가 아니라는 소리이다. 그리고 세상에는, 당신이 4년 가까이 매니저 생활을 할 동안, 컵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면서 죽어라고 드럼만 두들긴 친구들이 너무 많다. 그 친구들은 대개 무엇과 무엇을 비교하거나, 선택 같은 것을 하지 않은 친구들이다. 그런 경우에만 겨우 ‘꿈’과 ‘직업’이 하나되곤 한다. 이건 뭐 선택 자체가, 비교 자체가 봉쇄된 케이스들이니까.
그러니 정 지금 하고 있는 일이 힘들고 괴로우면 다른 직업을 알아봐라. ‘꿈’을 위해서 사표 낸다고 하면, 당장은 폼 나겠지만, 그 뒤에 남는 건 ‘꿈’에 대한 원망뿐이다. 그 원망을 또 어찌 감당하려고 이러시는가?
사실, 미리 예고는 안 했지만, 오늘이 내가 이 코너를 쓰는 마지막 날이다. 벌써 몇 달 전부터 그런 생각을 하고 <한겨레>에 여러 번 전화를 하기도 했는데, 그때마다 번번이 아리따운 담당 기자의 목소리에 홀라당 넘어가 여기까지 오고 말았다. 처음엔 소설 쓰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어 시작한 게 사실이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고민의 무게에 내가 짓눌려 소설은커녕 문장 자체를 쓰지 못하는 날들이 많아졌다. 고민을 듣는 것만 했으면 좋으련만, 그것을 다시 재단하고 분석하고 심지어 훈계 비슷한 것도 해야 했으니, 그것이 나에겐 어려운 일이었다. 소설가는 누군가를 훈계하려 들 때, 그때가 제일 위험한 순간이다. 그것 하나를 잘 배우고 물러난다.
아울러 이 코너의 이름에 ‘독고다이’라는 일본식 어휘가 들어가서 불편한 분들이 여럿 계셨을 거라 믿는다. 변명 같지만, 그건 내 식대로 풀자면 ‘독(獨) 고(go) 다이(Die)’, ‘홀로 가다가 죽자’라는 뜻이었다. 그게 내가 이 코너로 메일을 보내준 많은 분들에게 정말 하고 싶었던 말이기도 하다.
이기호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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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일교회 전병욱 목사 '하나님이 원하시는 교회'

2010/05/13 (목) 06:12 ㆍ추천: 0  ㆍ조회: 2633      

삼일교회 전병욱 목사(48세)가 5월 10일(월)부터 3일간 뉴욕한빛교회(윤종훈 목사)에서 "젊은 세대를 깨우는"이라는 주제로 말씀집회를 열고 있다. 전 목사는 마지막날(12일)인 '하나님이 원하시는 교회'라는 제목의 말씀을 전했다. 다음은 설교내용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교회'는 성령이 임재한 꿈이 있는 교회, 기도의 바람이 부는 교회, 말씀의 불이 붙는 교회, 벽을 허무는 소통이 있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성령이 임재한 꿈이 있는 교회

연 세대 경영학과를 다녔다. 경영학과 520명 가운데 15명 정도가 여학생이었고 우리반에도 여자가 1명 있었다. 하지만 내차례는 아니었다. 졸업때까지 말을 나눈적이 없다. 주변을 살펴봐라 알고 있는 여자가 많아야 20명 안팍이다. 뭐 바람둥이라 해도 고작해야 50명 남짓일 것이다.

결혼이 특별한 만남으로 이루어지는 것 같지만, 다 내 주변의 인물들과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주변의 인물들을 하찮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아무리 보기 싫은 아줌마가 있다고 해도 그분 아들이 매력남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지는 것이다. 우리는 자기 눈앞에 보이는 사람들의 중요함을 알아야 한다. 만남을 중요하게 여겨야 하는 것이다. 이를 교회에 적용시켜도 마찬가지이다.

'이상적인 교회'라는 것이 존재할까? 가능하지 않다. 현실에 속해 있는 교회를 찾아야 한다. 현실 속에서 꿈을 꾸는 것은 성령이 역사하는 특징이 있다. 그러다 보면 유연성이 생긴다. 이상적인 것만을 고집하는 사람들을 보면 답답하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만만치 않은 현실과 부딪치기를 권한다. 그래야 이상적인 것을 벗어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유연성이 있다는 말은 현실을 귀하게 여길줄 안다는 말이다. 유연성과 가장 비슷한 말은 교양이라고 할 수 있다. 교양이란 내가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뜻으로 나는 풀이를 한다. 나와 다른 세계가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는 것이다.

목사님들은 교양이 없다. 목사들은 모여서 늘 목회 이야기만 한다. 교양이 없다는 것이다. 교양이 있다면 자전거 이야기도 하고 등산 이야기도 해야 하는 것이다.

대 전에 집회가 있었다. 일찍 내려오라고 해서 온천이 있는 유성에 갔다. 월요일 오전에 한가하게 목욕탕에 와 있는 남자들의 실체가 무엇일까. 거의 다 목사님 아니면 스님이다. 내가 '목사님'하고 부르니까 반이 돌아 보더라. 그런데 목욕하면서도 목사들은 목회이야기를 했다. 머리가 아프다. 교양이 없다. 목사님들이 현실을 모른다는 것이다. 드라마 이야기도 하고 다른 이야기도 해야지 않겠는가.

어느날 우리 교회에 교회에 안티 성향을 지닌 청년들이 몇몇 왔다. 억지로 끌려온 듯한 그날 난 설교를 시작할 때부터 얼마전 유명했던 드라마 '추노'를 이야기하면서 설교가 추노로 끝이 났다. 그런데 그 안티 청년이 추노 매니아였다는 것이다.

자기 생각과 너무 맞는 이야기를 했다는 것이다. 그 청년은 5주째 교회에 나왔다. 그후로는 볼수 없었지만 그게 어디냐. 다 내가 교양이 있기 때문이다. 팔장을 끼며 무슨 이야기를 하나 들어나 보자던 그 청년을 난 무장해제를 시킨 것이다.

몇 년전에는 티셔츠를 입고 설교를 하기도 했다 .유행하는 브랜드의 청바지를 입고 설교를 하기도 한다. 유행의 흐름을 잘 알아야 한다. 스키니 진도 입어 보았다. 그런데 스키니진은 좀 무리가 되었다. 올라가지도 않고 영 불편했다. 하지만 이제는 이런 방법은 쓰지 않는다. 6-7년전에는 저런 목사님도 있구나 하고 경의로워 했는데...

여기 젊은이들은 내가 하는 이야기를 듣고 웃는데, 어른들은 교양이 없어서 웃지 않는다. 내가 48세에 스키니 진을 입는 이유가 무엇일까 난 소통을 원하기 때문이다. 제일 답답한 것이 자기만의 세계에 갖혀 사는 사람들이다. 예수님도 하셨던 일이 벽을 허무는 일이셨다. 나와 다른것을 인정하는 것이 성령이 역사하시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기개라고 할 수 있다. 십일조 내고 나머지 십분의 일 정도는 문화적인 활동에 투자해야 한다. 불법다운이나 받고 그렇게 사는 것을 난 천박하다고 말한다. 내가 잘알고 있는 시인이자 도예가이신 분이 있었다. 그분의 아들이 관절 수술을 받아 겉으로는 멀쩡한데 장애인 판결을 받았다. 그래서 군대도 면제가 되었다.

어 느날 그 아들이 장애인의 특혜를 이용해서 자동차를 싸게 구입해야겠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 시인은 버럭 화를 내고 젊어서부터 장애인의 혜택을 입으려 함을 꾸짖었다. 정말 존경할만한 분이시다. 청년은 기개를 가져야 한다. 정신이 살아 있어야 하고 공명 정대하게 살아야 한다.

CD는 원판올 사고 세금은 제대로 내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기개라고 나는 말한다. 뉴욕에 와서 100불이나 들여 마마미아 라는 뮤지컬을 보았다. 100불 줬는데도 구석에 쳐박힌 자리였다. 우리나라도 이렇게 많은 돈을 내고 기꺼이 뮤지컬을 보게 되면 어떻게 뮤지컬이 발전을 하지 않겠는가.

얼마전 우리 교회에서 음반 제작을 했다. 유명한 가수 조성모의 노래를 만들어준 작곡가에게 의뢰를 했고, 최근에 이상한 모습이 화제가 되었던 이효리의 최근 앨범의 디렉터가 참여를 했다. 제작비만 1억이 넘게 들었다. 투자를 하지 않고 좋은 작품을 만들 수가 없다. 우리 교회는 좋은 시설의 스튜디오가 2개나 된다. 감가상각비를 따지면 2만장 이상이 팔려야 하지만 당연히 잘 팔릴 것으로 본다.

기개가 없다면 문화가 형성되지 않는다. 현실의 삶속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내가 다른 사람과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면 교양있는 성도가 되는 것이다. 그 현실 속에서 형성되는 꿈은 성령이 역사를 하신다.

기도의 바람이 부는 교회

그 냥 기도가 아니라 바람을 일으키는 기도이다. 기도하면 바람이 일어남을 믿는 것이다. 물론 훈련도 중요하다. 하지만 백날 제자훈련이니 두날개니 해봤자 한계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예수님도 제자 훈련을 3년이나 시켰지만 그들이 전적으로 변화가 된 때는 오순절 기도 후 였다. 종교 훈련의 초라함이 여기에 있다. 바람이 불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 삼일교회를 알고 계신 것과 같이 숙명여대를 빌려 쓰고 있었다. 99년부터 작년 2009년 이맘때 까지 숙대에서 참 좋은 관계를 가지며 지냈는데 작년 2월에 한장의 팩스를 받았다. 3월내로 이사를 가라는 통지 였다. 바뀌신 총장님의 기독교 흔적 없애기의 안티 기독교 사업의 첫 과업이었던 것이다.

당황스런 일이었다. 겨우 사정을 해서 한달 더 말미를 얻기는 했지만 새로 이사한 장소의 협소함으로 우리 교회는 3천명의 성도를 잃게 되었다. 주차장의 중요성, 장소의 한계를 실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교 회가 줄어든다는 위기위식이 만연할 즈음 작년 12월 부터 특별 새벽 에너지 기도를 시작했다. 첫날 부터 6천명이 모였고 마지막날에도 5천 사오백 정도가 참석을 했다. 기도하는 중에 성령의 임재를 느꼈다. 난 병 고치는 은사는 없다. 그래서 그 흔한 무좀 하나도 고친적이 없지만 불임의 가정에 아기가 태어나게 되는 은사가 있는 것 같다.

그때 집회로 7년이상 불임으로 고민하는 10가정이 아이를 갖게 되는 기적을 체험했다. 뭐 혹자는 새벽기도를 하다 보니까 라이프 싸이클이 바뀌어서 그리 되었지 않을까 하는 해석을 하기도 하지만 이것은 기적이라고 생각한다.

새벽 기도회 후에 청년들의 자발적인 전도로 교인이 3달만에 7천이 늘었다. 그래서 지금은 2만에서 2만 1천명의 성도가 모인다. 성령의 역사이자 바람의 일으키는 기도의 능력인 것이다.

삼 일교회의 초창기에는 80명 정도의 성도가 있었다. 그중 22명이 대 가족이었으니 목사인 나는 그리 할일이 없었다. 그래서 기도를 했다. 생각 같아서는 강단을 모두 눈물로 적시고 싶었지만 그렇게 하진 못했고 방석이라도 눈물이 젖도록 기도했다.

하 루 6시간 내내 기도하려 했지만 잠을 자기도 하고 다른생각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강단을 떠나지는 않았다. 그 기도를 통해 깨닫게 되었다. 기도는 사람을 변화시키며 어느 순간 넘치는 바람이 불어 거룩한 믿음의 역사가 일어남을 알았다.

말씀의 불이 붙는 교회

강 단에 불이 있어야 하고 성도의 가슴에도 불이 있어야 한다. 책도 불이 있는 책과 없는 책이 있다. 지금까지 48권의 책을 썼지만 불이 붙은 책은 두세권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타자를 잘친다. 그 옛날 4벌씩 부터 시작을 해서 2벌씩 등 지금도 타자를 잘치는 편이다. 불이 붙은 책은 하룻밤만에 다 써버린 책도 있도 있다.

유태인은 12살 이전까지 성경의 해석을 가르치지 않고 오직 암기만 하게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모세 이야기를 500번씩 읽다보면 그렇게 다니엘을 500번씩 외우다보면 내가 모세인지, 다니엘이 난지 구분이 안간다는 것이다. 그래서 모세처럼 홍해가 내앞에 서 있다해도, 다니엘 처럼 사자굴에 내가 들어와 있어도 전혀 굴복하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설교도 그렇다. 요약만 해주면 각자가 자기만의 언어로 해석하고 찾아볼 수 있게 해야하는 것이다. 그렇게 불만 붙여주면 되는 것이다. 문제는 내가 남들에게 붙여줄 불이 있는지의 여부이다. 전달이 잘되지 않는다는 것은 내가 불이 없다는 뜻이다.

난 자전거에 미쳤다 하루 4시간씩 자전거를 탄다. 등산에도 미쳤다. 내 별명이 남산의 다람쥐이다. 내 주변 모든 사람들을 다 자건거를 탄다. 내가 자전거를 전도하는 하는 것이다. 오정해 목사, 옥한음 목사,김삼환 목사도 다 나때문에 자전거를 샀다. 지금까지 타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자전거에 미쳐 있으까 불이 붙어서 저절로 만나는 사람마다 자전거를 전수하는 것이다.

20년전쯤 일이다. 버스에서 어떤 사람이 무좀의 민간요법을 장황하게 설명했다. 나는 약을 파는 줄 알았다. 그는 길게 설명을 하고 부디 무좀에서 해방되어 행복하게 사시라고 하면서 내렸다. 약을 팔려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체험을 한 그 민간 요법을 누구에게라도 말하지 않고는 베길 수가 없었던 것이다.

가슴에 불이 붙은 청년들은 전도를 하지 않을 수가 없어 한주일에 천여명의 전도를 했어야 했던 것이다.

벽이 무너지는 소통이 있는 교회

부자와 가난한 자의 벽이 무너지려면 자기가 오픈을 해야 한다. 그러데 그 오픈한 마음을 정죄한다면 교회라고 할 수 없다. 자기의 연약함을 드러내 놓을 수 있는 교회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교 회를 20년이나 다녔는데 변화가 없다면 이것이야말로 기적이다. 20년 동안 어쩌다 실수해서 한번이라도 은혜를 받을 수도 있건만 단 한번의 은혜도 없었다면 기적이 아니고 어찌 설명이 가능하겠는가. 성령이 역사를 하면 서로 오픈하게 되고 자기의 있는 그대로를 받아주는 교회가 된다.

음식을 예로 들겠다. 30대의 남자들에게 제일 관심이 많은 것은 여자라고 한다. 40대 남자들에게는 먹는 것, 50대에겐 감투가 가장 많은 관심의 대상이라는 말을 들었다.

나 도 이 나이가 되니까 역시 먹는 것에 관심이 많다. 100곳의 맛집을 정해 놓고 지금까지 20여군데를 다녔다. 나름대로 맛집에 정통하다고 볼수 있는데 내가 내린 결론 음식 잘하는 집의 특징은 재료맛이 그대로 드러난다는 것과 일단 밥이 맛이 있더라는 것이다. 원질의 맛을 살리는 것이 맛집의 공통점이었다.

우리 성도분 중에 갈비집을 하시는 분이 있다. 나는 도대체 생갈비는 200g에 2만원인데 왜 양념 갈비는 300g에 2만 5천원인지 너무나 궁금해서 물어 보았다. 양념값이 있으니 더 비싸야 맞는데 왜 가격이 싼지 너무 궁금해서 목회를 못하겠다고 하니까 그분이 답변하시길 생갈비는 양념이 없는 고기맛 뿐이니가 좋은 갈비를 써야 하고 양념 갈비는 살짝 맛이 간 고기라도 양념으로 인해 충분히 커버가 되니까 질 줗은 고기가 아니여서 값이 차이가 난다는 것이다

그 설교 이후로 우리 교인들은 생갈비 외엔 먹지 않게 되었다. 내가 생갈비인 채로 교회에 나온다면 치유가 될텐데, 집구석에서는 남편과 자식때문에 속이 썩어도 립스틱 짙게 바르고 말만하면 은혜지요를 연발하면서 양념갈비로 교회에 나온다면 하나님의 텃치가 어렵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렇게 쑈같은 예배를 드리니까 피곤해 지는 것이다. 예배가 쑈인데 어찌 오후 공연까지 할 수 있겠는가 말이다. 우리 교회는 저녁예배에 더 많은 성도가 모인다. 다 생갈비라서 그렇다.

나는 간장 게장을 먹지 않는다. 그런데 전주에 집회가 있어 갔던 길에 간장게장이라고 먹어보라는 권유를 받았다. 자꾸 사양하면 섭섭해 할까봐 순종하는 마음으로 먹어 봤는데 세상에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었다.

평 상시 밥을 많이 먹지 않는데 두그릇을 비웠다. 정말 밥도둑이라는 말이 맞았다. 짠 간장맛인줄 알았던 간장게장이 전혀 짜지 않고 진짜 게맛이 살아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나의 맛을 드러내 놓고 하나님의 임재를 원하는 교회가 되어야 할것이다.

ⓒ 아멘넷 뉴스(USAamen.net)
http://www.usaamen.net/news/board.php?board=news&category=2&command=body&no=5466&PHPSESSID=8e17a29f0d1458a41d14d855963750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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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연

ysl* 컨텐츠/그한마디 / 2010. 10. 31. 02:14

...인연이란 그런 것이여. 억지로는 안 되어.

아무리 애가 타도 앞당겨 끄집어 올 수 없고

아무리 서둘러서 다른데 가려해도 달아날 수 없고잉.

지금 너한테로도 누가 먼 길 오고 있을 것이다.

와선 다리 아프다고 주저 앉겄지. 물 한 모금 달라고.

– 최명희 [혼불] 중




우연히 눈에 띈 최명희 작가의 글 한 줄이다.

먼길 달려와서 다리 아프다고 주저 앉은 사람에게 물 한 모금을 선뜻 줄 수 있는 사람.
그에게는 그것이 소중한 인연이었으리라.

그러나 물 한 모금 마시고는 또 다른 인연을 향해 떠나간다면,
그이는 진정한 인연은 아니었을 것이다.
진정한 인연은
지금 어딘가에서 먼 길을 달려오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다.
만나게 될 사람은 언젠가 어디에선가 꼭 만난다.
오늘 밤은 최명희 작가의 글을 음미하면서 이승철의 음악이나 들어야 겠다.

이승철 - 그런 사람 또 없습니다
http://wizysl.tistory.com/2960




[참고자료]
하늘이 꽃피는 마을 - 내가 꽃피는 블로그
http://blog.cgntv.net/blog/blog_main.asp?no=764788&id=ay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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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대통령이 이번 8․15광복절 경축사에서 ‘공정사회’라는 정치적 어젠다를 내놓은 이래 공정사회는 공동체의 지배적 화두가 되었다. 단순한 정치적 구호를 넘어 시대적 요청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추세다. 왜 공정사회가 정치권은 물론 국민들사이에 초미의 관심사가 되고 있는 것일까. 총리·장관 후보자 낙마와 외교부의 특채파동이 겹치면서 지도층의 부정과 불공정을 가늠하는 엄한 잣대로 대두된 것이 직접적 이유다. 하지만 이것은 상황논리에 불과할 뿐, 근본적인 이유라고는 할 수 없다. 이미 ‘신국론’을 쓴 아우구스티누스도 말하지 않았던가. “정의가 없다면 국가도 강도집단과 다를 바 없다(remota justitia, quid sunt regna nisi magna latrocinia?)”고. 이처럼 자명할 정도로 중요한 공정의 가치가 새삼 커다란 사회적 반향을 불러일으킨 것은 그만큼 우리 사회가 공정하지 못했다는 반증이다.

과거의 화두가 “우리도 한번 잘 살아보세”였다면, 지금의 화두는 누가 뭐래도 “우리도 한번 공평하게 살아보세”다.
당연히 공정은 공동체라는 배가 항해하면서 방향을 잡는데 기준으로 삼아야할 ‘북극성’과 같은 가치다. 하지만, 그 ‘공정’을 실천하는데 각별히 유의해야할 사항이 있다. 그것은 칼이나 불이 인간생활에 아무리 유익하다고 해도 그들을 사용하는데 분별력과 신중함이 요구되는 이치와 같다.

첫째, 공정성은 한 공동체의 지속가능성을 위해 구성원 모두가 공유해야할 규범이지만, 권력층과 지도층이 제일 먼저 준수해야할 행동규범이다. 불공정은 권력과 재력을 가진 사람이 부조리한 방식으로 이익을 추구할 때 생긴다. 이것은 이미 플라톤의 ‘국가’에서 트라시마쿠스가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라고 했을 때 반어법으로 설파한 내용이다. 바로 이점이 공정이 일차적으로는 국민에게 요구할 행동규범이 아니라 권력층과 지도층이 우선적으로 지켜야할 도덕률이 되는 이유다. 권력층부터 솔선수범하지 않으면 공정사회는 무의미해지기에 권력주도세력의 ‘자기 채찍질’은 반드시 선행되어야한다.

둘째, 공정사회는 약자와 빈자를 배려하는 사회다. 고단한 삶을 살아가는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는 공정사회의 도덕적 매력은 자명하다. 서민들이 내쉬는 한숨소리에는 사람들의 공감을 이끌어내는 ‘도덕적 호소력’이 배어있지 않은가. 하지만 공정사회 추진에는 대전제가 있다. 잘사는 사람과 대립각을 세우는 식으로 접근해서는 안된다는 점이다. 물론 잘사는 사람과 못사는 사람을 ‘상생’이 아닌 ‘상극’의 존재로 접근한 경우도 없는 것은 아니다. 일찍이 임꺽정이나 일지매는 부자들 로부터 재물을 빼앗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줌으로써 박수를 받았고 ‘의적(義賊)’으로 불리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의적 이야기는 다수인들의 삶 자체가 절대빈곤으로 점철되었던 ‘헝그리 시절’의 신화일 뿐, 공정사회의 지향점이 될 수는 없다.
공정사회가 성공하려면 잘사는 사람과 못사는 사람을 20 대 80이나 2 대 98, 1 대 99의 ‘적대적 범주’로 나눌 것이 아니라 꽃과 나비처럼 ‘공생관계’라는 데서 출발해야한다. ‘부자아빠’가 있기 때문에 ‘가난한 아빠’가 생긴다는 ‘제로섬(zero-sum)’ 논리보다는 ‘부자아빠’가 있기 때문에 ‘가난한 아빠’가 노력할만한 이유와 동기가 생긴다는 ‘포지티브섬(positive sum)’ 논리가 공정사회의 기조가 되어야 한다는 의미다.  ‘기득권자’와 ‘비기득권자’로 나누면서 분열을 부추기며 ‘있는 자’와 ‘없는 자’의 대결구도를 이용한 ‘포퓰리즘’을 구사하기보다는 통합을 지향하는 구도로 나아가는 것이 공정사회의 철학이기 때문이다.

셋째, 공정사회는 경쟁을 공정하게 만드는 사회지 경쟁을 폐지하거나 다른 것 - 예를 들면 추첨제 - 으로 대체하는 사회는 아니다. 경쟁은 양질의 공정사회를 만드는데 필요하다. 하이에크(F. A. Hayek)는 경쟁이 없으면 개인은 자신이 가진 능력을 최대한 개발하거나 발휘하려고 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개인이 자신이 가진 잠재력을 최대한 발휘하지 않으면, 공동체는 그 질이 하락할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공정사회는 경쟁의 철학을 폐기하기보다 활성화시켜야 한다.
모든 차들이 일차선 도로로만 주행해야 한다면, 특별한 운전기술을 갈고 닦을 필요가 없다. 보통 속도로 가는 주행선도 있고 빠른 속도도 가능한 추월선이 있어야 열심히 운전을 배우는 사람이 생긴다. 더 빨리 가고, 더 기분 좋게 달리기 위해서 말이다. 주행선과 추월선이 공존하는 사회를 만들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모든 차가 일차선으로만 달려야 한다면, 운전자들은 평등하다는 느낌을 받기보다 짜증을 낼 가능성이 크다. 특히 능숙하고 실력있는 운전자들의 불만이 커질 것이다. 빨리 달리고 싶은 욕구와 빼어난 운전솜씨를 발휘할 방법이 전무하여 앞차와 부딪히는 사고도 빈번하게 발생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추월선을 마련하면 능력있는 운전자는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다. 천천히 달리는 차와 더 빨리 달리는 차가 충돌없이 평화롭게 공존하며 상생하는 길이 열리는 것이다.

넷째, 공정사회는 개인의 몫과 개인의 권리를 보장하는 사회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나’는 ‘나’의 권리를 가지고 있고 ‘너’는 ‘너’의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식으로 모든 인간관계를 가늠하려고 하는 사회는 아니다. 공정사회는 권리만을 중시하는 권리만능주의 사회와는 다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내 몫’이 훼손당했다며 권리를 요구하는 소리만 넘쳐나고, 법과 질서를 지키며 공동선을 위해 기여하는 등, 의무나 책임을 이행하는 문제가 사소한 범주로 밀려난다면, 공정은 제자리를 찾을 수 없다. 공정사회를 위해서는 ‘권리’에 대한 집착을 줄이고 ‘의무’와 ‘노블레스 오블리주’와 같은 ‘초과의무(supererogation)’에 대한 관심을 가져야한다. 바이블에 나오는 ‘착한 사마리아인’처럼 어려움을 당한 이웃을 돕는 것이 초과의무다. 그러므로 헌혈이나 고아입양은 의무는 아니지만 공정사회에 넘쳐흘러야 할 선행이다.
그동안 우리 사회의 권리주창자들은 ‘각자의 몫’을 설명하는데 노력해 왔지만,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공동의 몫’에 대한 설명에는 상대적으로 인색했다. 그 결과 ‘자신의 몫’만 챙기는 ‘깍쟁이’가 많아졌다.
그러나 공정사회가 사회적 관계로부터 차단된 개인을 전제로 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과 개인, 개인과 사회 간에 구현되어야할 ‘관계 지향적인 개념’임에 주목한다면, 권리만능주의는 사회적 관계로부터 자연적으로 발생되는 ‘공동의 몫’이 결여된 불충분한 비전이다.
바로 이것이 권리가 중요하지만 공정사회의 핵심적 화두가 될 수 없는 이유다. ‘각자의 몫’ 에는 개인이 향유할 수 있는 권리와 자기 이익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 구성원으로서 함께 나누어야할 ‘공동의 몫’도 있다는 사실에 유의할 때, 개인의 권리․이익과 더불어 그 역할을 수행할 책임과 의무 역시 포함될 때 공정사회가 된다.

다섯째, 공정사회가 재화의 공정한 분배를 보장하는 사회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재화의 분배에만 ‘집중’하는 사회는 아니다. 공동체의 구성원들을 경제적 인간, 즉 물질적 욕구의 대상으로만 치부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물질적 만족은 중요하다. 그러나 인간이 빵만으로 살 수 없듯이 공동체도 빵만으로 살아갈 수는 없다. 공정사회가 분배문제에만 매몰돼서는 안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도덕적이고 정신적인 문제를 외면하면 공동체는 비열함과 저급함만을 노정할 뿐이다.
공정사회가 물질적 복지에 치중하는 나머지 공동체의 영혼처 럼 다루어야할 지성과 품위, 덕목을 소홀히 한다면, 더 이상 공정사회가 아니다. 구성원들사이에 공유해야할 예의와 배려, 지혜는 물론, 국가공동체에 대한 헌신이나 열정도 풍부해야한다. 게다가 대한민국의 시민으로 살아간다는 사실이 왜 자랑스러운지를 말해주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공정사회는 “국가가 내게 무엇을 해줄 것인가” 하는 문제뿐만 아니라, “내가 국가를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도 물어야한다. 그렇지 않으면 공정사회는 기여와 헌신 보다는 각종 요구로 가득한 사회가 될 것이다.
일찍이 키케로는 공정성과 관련, “명예롭게 살고 남을 해하지 않으며 각자에게 그의 것을 주는(honeste vivere, non laedere alterum, suum cuique tribuere) 사회”라고 규정한 바 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공정성은 자신의 뼈를 깎고 자신의 살을 도려내는 ‘자기반성적 개념’이 되어야지, “조자룡 헌칼 휘두르듯” 타인을 비판하기 위한 ‘도덕적 무기’가 되어서는 안된다. 남의 눈의 ‘티끌’을 보기보다 자신의 눈의 ‘들보’를 보겠다는 정신, 바로 이것이 공정사회의 ‘알파’요, ‘오메가’다.

글/박효종 서울대 윤리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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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대한언론인회 <대한언론 10월호>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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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학들의 인재개발 10大 제언

입력: 2010-10-29 17:06 / 수정: 2010-10-29 17:07


'글로벌 인재포럼 2010'에 참가한 각 분야 전문가들은 "인재의 성격이 과거와 달라진 만큼 교육과 관리 방법도 바뀌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이들은 "향후 글로벌 기업들의 경쟁력은 새로 확보한 인재들이 얼마만큼의 성과를 내느냐에 따라 결정될 것"이라며 "인재 등용과 관리 시스템을 '제로 베이스'에서 재검토할 것을 주문했다. 나라 전체의 중 · 고등교육 시스템을 개선하기 위한 조언들도 다수 제시했다. "교사의 선정 기준을 바꾸고 최첨단 정보기술(IT) 기기를 수업에 적극적으로 활용하라"는 지적이다. 인재포럼에서 나온 제언을 정리했다.

(1) 업적은 즉시 보상하라

주 디 리 휴잇어소시엇츠 다문화컨설팅 리더는 최근 사회생활을 시작한 밀레니엄 세대의 특징을 '스피드'로 요약했다. 업무와 관련한 피드백과 우수한 업적에 대한 보상이 빠르게 이뤄지지 않으면 답답함을 느낀다는 설명이다. 그는 "실시간으로 일의 결과를 확인하는 인터넷 세대를 수용하기 위해서는 조직 운영의 속도를 한층 높여야 한다"며 "의사결정과 보상이 천천히 이뤄지는 기업은 인력 이탈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진단했다. 니콜라스 소바주 NH-CA자산운용 사장은 "신세대들은 금전적 보상 이상으로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가치있는 일인지 여부를 따진다"며 "젊은 직원들에게 사회공헌 활동의 기회를 줘야 한다"고 조언했다.



(2) 학교 교육도 아웃소싱하라

토니 리틀 영국 이튼칼리지 교장은 "창의적인 미래 인재 양성을 위해서는 학교 외부에 있는 각종 산업자원을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각기 다른 재능과 잠재력을 가진 다양한 학생들의 교육 수요를 충족하기 위해서는 외부 전문가 및 시설을 학교 교육에 이용해야 한다는 조언이다. 예를 들어 자동차공학과 학생들은 기업의 자동차연구소와,항공학과 학생들은 항공산업계와 연계한 교육을 받을 수 있다. 그는 "다양한 방면에 재능을 가진 각계 인사들이 학생들의 롤모델이 돼야 한다"며 "각 분야에서 활동하는 전문가 및 관련 자원들을 교육에 적극 활용해야 더욱 효과적인 인재 양성이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3) 웹 3.0 시대 맞는 인재 육성하라

바 버라 그라보스키 미국 펜실베이니아주립대 교육학과 교수는 "아이패드와 아이폰,갤럭시S 등 ICT(Information & Communication Technology · 정보통신기술) 발전은 고등교육에 혁신적인 변화를 불러오고 있다"며 "고등교육은 신기술을 이용해 정보를 구축하고 생산할 수 있는 인재를 키우는 데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웹 2.0과 앞으로 다가올 웹 3.0은 학교와 국가라는 전통적인 학습의 경계를 초월하게 한다"며 "교육자는 단순한 지식 전달자에 그치지 않고 새로운 환경 변화를 누구보다 잘 이해해 학생들이 스스로 지식을 생산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4) 기존 인력 재교육하라

앤 디 윌슨 영국 웨스트민스터 킹스웨이칼리지 총장은 "녹색산업이 새로운 주류 산업으로 부상하면서 기업들이 이 부문 전문가를 찾아 나서고 있는데 이는 현명한 일이 아니다"며 "엔지니어링 분야의 일부 기술 인력을 제외하면 기존 지식의 활용과 약간의 재교육을 통해 대응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오히려 중요한 것은 경영진의 리더십과 원활한 커뮤니케이션"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웨스트민스터 킹스웨이칼리지는 2012년 런던올림픽에 대비해 호텔의 물소비 패턴,음식쓰레기 관리,식품포장 등 숙박과 관광 분야에 특화한 연구와 교육을 하고 있다"며 "일반적이고 포괄적인 기술 교육만으로 훌륭한 녹색인력을 길러내고 있다"고 소개했다.

(5) 커뮤니케이터를 길러라

피 터 럭스턴 호주 퀸즐랜드주 학습청 원장은 미래 교육이 요구하는 핵심 가치로 의사소통 능력을 꼽았다. 그는 "IT 기술의 급속한 발달로 교육의 전통적인 지식 습득 기능이 약해지고 있다"며 "앞으로는 정보를 잘 전달하는 교사보다 의사소통을 잘하고 동기 부여에 능한 교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호주 퀸즐랜드주는 2005년부터 학생들에게 다양한 정보와 옵션을 제공하는 방향으로 교육 시스템을 바꾸고 있다"며 "교사는 학생들의 의사결정을 돕는 조언자 역할을 한다"고 설명했다. 럭스턴 원장은 "기업에도 이 같은 원칙이 똑같이 적용된다"며 "커뮤니케이터형 인재의 중요성이 갈수록 높아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6) 다문화 인력 로드맵 만들어라

다 문화 · 고령화 사회에 맞는 교육 및 인력관리 로드맵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나왔다. 레바 조시 토론토대 교수는 "인종과 연령대 등이 다른 사람들이 함께 교육을 받고 일하다 보면 필연적으로 갈등이 생긴다"며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을 아우를 수 있는 제도적 장치 마련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그는 "사회가 제대로 통합되지 않으면 노동 생산성이 둔화할 수 있다"며 "적어도 교육의 기회만큼은 공평하게 제공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크리스틴 클라크 국제노동기구(ILO) 이사는 "남자와 여자,장애인과 비장애인 집단 간 갈등에 대한 문제에 대해서도 연구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7) 미래 전략,직원에게 물어라

마이클 잭슨 셰이핑투모로 회장은 "직원들에게 미래는 어떻게 달라질 것인가,그럼 우리는 뭘 해야 하는가 두 가지만 물어도 놀라운 발견을 할 수 있고 비즈니스를 향상시킬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회사의 미래와 발전 방향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는 것은 컨설팅펌이 아닌 직원들"이라며 "이들의 아이디어를 적극적으로 수렴해 미래 전략을 세워야 한다"고 말했다. 잭슨 회장은 1994년 한 우체국 직원이 "앞으로 편지는 인터넷을 통해 부쳐질 것"이라며 인터넷의 발달을 예측했지만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았다는 것을 사례로 제시했다.

(8) 대학 졸업장에 연연하지 마라

케네스 그레이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교육학과 교수는 "지속적인 경제성장을 위해서는 젊은이들에게 무조건 대학을 가라고 강요해서는 안 된다"며 "고등교육에 돈을 쏟아붓는 대신 대학 수준의 직업교육에 투자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이어 "미국은 실업률이 높지만 숙련된 기술자가 없어 고민하고 있다"며 "이 같은 불균형 현상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대학 졸업장 만능주의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설명했다. 휴 로더 영국 배스대 교수도 "일반 대학 졸업자는 사양 업종을 살리는 데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9) 스타 CEO 영입에 돈 쓰지 마라

제프 리 페퍼 미국 스탠퍼드대 경영대학원 석좌교수는 "서로를 '동료'라 부르는 평등주의 시대에 살고 있다고 하지만 기업에서의 직위에 따른 임금 격차는 더욱 벌어지고 있다"며 "경영자와 사원이 실제로 어떤 일을 하고 얼마를 받는지 면밀히 따지고 임금 차이를 줄여 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외부에서 몸값 비싼 최고경영자(CEO)를 영입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며 "이들이 더 나은 성과를 낸다는 어떤 증거도 찾을 수 없다"고 강조했다.

(10) 한국서 공부한 외국인 잡아라

라인홀트 바이스 독일 연방 직업교육연구원 부원장은 "독일에서 과학기술을 공부한 외국인 대부분이 학위 취득 후 자국으로 돌아간다"며 "규제를 완화해 보다 많은 외국인 학위 취득자가 독일 내에서 직업을 가질 수 있게 해야 국가 경제에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그는 "이 원칙은 한국에도 똑같이 적용된다"며 "한국 기업들이 한국에서 교육받은 지한파 외국인들을 적극 채용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송형석 기자 click@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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