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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특별 기고] 소설가 김훈

[중앙일보] 입력 2015.01.01 00:09 / 수정 2015.01.01 00:12

세월호 내버리고 가면 우리는 또 같은 자리서 빠져 죽어 …
사실의 힘에 의해 슬픔과 분노, 희망의 동력으로 바뀌기를


지난해 12월 30일 평소 자전거를 타곤 하는 경기도 파주 공릉천을 찾은 소설가 김훈.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나는 본래 어둡고 오활하여, 폐구(閉口)로 겨우 일신을 지탱하고 있다. 더구나 궁벽한 갯가에 엎드린 지 오래니 세상사를 입 벌려 말할 만한 식견이 있을 리 없고, 이러한 말조차 아니함만 못하다는 것을 모르지 않는다.

 그러하되, 잔잔한 바다에서 큰 배가 갑자기 가라앉아 무죄한 사람들이 떼죽음을 당한 사태가 대체 어찌 된 영문인지 알지 못하고, 아직도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의 몸을 차고 어두운 물 밑에 버려둔 채 새해를 맞으려니 슬프고 기막혀서 겨우 몇 줄 적는다.

 단원고 2학년 여학생 김유민양은 배가 가라앉은 지 8일 후에 사체로 인양되었다. 라디오 뉴스에서 들었다. 유민이 아버지 김영오씨는 팽목항 시신 검안소에서 딸의 죽음을 확인하고 살았을 적의 몸을 인수했다. 유민이 소지품에서 학생증과 명찰, 그리고 물에 젖은 1만원짜리 지폐 6장이 나왔다. 김영오씨는 젖어서 돌아온 6만원을 쥐고 펑펑 울었다. (유민 아빠 김영오 지음 『못난 아빠』 중에서) 이 6만원은 김영오씨가 수학여행 가는 딸에게 준 용돈이다. 유민이네 집안 사정을 보건대, 6만원은 유민이가 받은 용돈 중에서 가장 많은 돈이었을 것이다. 이 6만원은 물에 젖어서 돌아왔다.

 아 6만원, 이 세상에 이 6만원처럼 슬프고 참혹한 돈이 또 있겠는가. 이 6만원을 지갑에 넣고 수학여행 가는 유민이는 어떤 설계를 했던 것일까. 열일곱 살 난 여학생은 무엇을 사고 싶었을까. 얼마나 간절한 꿈들이 유민이의 6만원 속에 담겨 있던 것인가. 유민이가 가지고 싶었던 것들. 아버지, 엄마, 동생에게 사다 주려 했던 선물은 무엇이었을까.

 6만원은 유민이의 꿈을 위한 구매력에 쓰이지 못하고 바닷물에 젖어서 아버지에게 되돌아왔다.

 300명이 넘게 죽었고, 아직도 돌아오지 않는 사람들의 몸이 물 밑에 잠겨 있지만 나는 이 많은 죽음과 미귀(未歸)를 집단으로 한꺼번에 슬퍼할 수는 없고 각각의 죽음을 개별적으로 애도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유민이의 6만원, 물에 젖은 1만원짜리 6장의 귀환을 통절히 슬퍼한다.

 아 6만원. 유민이의 마음속에서 6만원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셀 수 없이 많았고, 유민이가 갖고 싶었던 것은 사소할수록 간절했을 것이다. 이것을 살까, 저것을 살까 망설일 때 그 후보 리스트에 오른 물건까지를 합산한다면 이 6만원이 갖는 구매력의 예상치, 실현되지 못한 구매력은 몇 배로 늘어난다. 유민이의 선택에서 최종적으로 탈락되었다고 해서 그 탈락된 꿈이 무효인 것은 아니다. 배는 수학 여행지에 닿지 못했다. 죽은 많은 아이들의 용돈도 다들 물에 젖어서 돌아왔을 것이므로 그 많은 꿈들은 슬픔과 분노로 바뀌어 바다를 덮는다. 유민이의 지갑에서 돌아온 6만원으로 살아 있는 사람들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국가재난 컨트롤타워에 성금으로 보내야 하는가를 생각하다가 생각을 그만두었다. 내가 젊은 날 육군에서 힘들 때 엄마한테서 편지가 왔는데, 어렵고 힘들 때는 너보다 더 어려운 이 어미를 생각해라, 라고 적혀 있었다. 고지의 겨울은 맹수에게 물어뜯기는 듯이 추웠다. 엄마의 편지를 받던 날 밤에 나는 보초를 서면서 고난을 따스함으로 바꾸어놓는 엄마의 온도와 엄마의 눈물의 힘을 생각했고 자라나는 고비에서 치솟는 반항기로 엄마를 속 썩인 패악을 뉘우치면서 가슴이 아팠다. 유민이의 6만원에도 내 엄마의 편지처럼, 크고 깊은 슬픔의 힘이 저장되어 있어 세상의 불의와 세상의 더러움을 밀쳐낼 수 있으며, 말을 알아듣고 사물을 볼 수 있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의 마음을 정화시켜줄 테지만 그렇게 말해 봐도 산 자들의 말일 뿐, 젖어서 돌아온 6만원을 위로할 수는 없다. 배 안을 수색하는 잠수사들의 말에 따르면, 아이들이 담요를 둘둘 말아서 배 안의 창문 틈마다 모두 막아놓았다고 한다. 아이들은 그렇게 버둥거리다가 최후를 맞았다. 골든타임도 에어포켓도 컨트롤타워도 다가오는 인기척도, 아무것도 없었다.

한국화가 유근택의 ‘어떤 실내’. 어지러운 방 한가운데 노란색 사다리들이 떠 있다. 행복한 세상으로 가는 구원의 통로로 읽힌다. 2012, 한지에 수묵 색채, 146X127㎝.

 글을 쓰면서 읽은 책을 들이대는 것은 게으르고 졸렬한 수작일 테지만 나는 바다에 빠져 죽을 뻔한 경험이 없기 때문에 별수 없이 책을 들먹인다.

 조선 성종 때 관인 최부(崔溥·1454 ~1504)는 제주도에 공무 출장 갔다가 부친상을 당해 배를 타고 육지로 돌아오는 길에 풍랑을 만났다. 그는 15일 동안 바다에서 갈팡질팡하다가 중국 해안에 표착했고 북경을 거쳐 6개월 만에 귀국했다. 그는 바다와 대륙에서의 일들을 기록으로 남겼다. 사나운 바다에서 죽음이 다가오는 순간은 이렇다.

 “한 채의 이불을 찢어 여러 번 둘러 동여매고 횡목(橫木)에 그것을 묶어서 죽은 후에도 시신이 배와 함께 오래도록 서로 멀어지지 않도록 하고자 했다.”(『표해록』 최부 지음, 서인범·주성지 옮김, 한길사, 2004, 62쪽)

 최부는 이불을 찢어서 배 기둥에 몸을 묶었고 유민이네 학교 아이들은 담요를 말아서 창문 틈을 막았다. 그 마지막 정황에서 인간의 모습은 비슷하지만 세월호는 풍랑에 깨진 것이 아니라 스스로 침몰했다. 차오르는 물속에서 아이들은 스스로 담요를 말아서 창문 틈을 막았는데, 아직 살아 있는 몸의 동작이 생명을 향해 그렇게 작동되어지는 과정의 무서움을 최부의 글을 통해 겨우 짐작한다지만, 거듭 말하거니와 세월호는 풍랑에 깨지지 않고 스스로 침몰했다. 큰 배가 스스로 뒤집혀서 가라앉게 되는 배후에는 대체 얼만큼 악과 비리가 축적되어 있는 것인지, 그리고 담요를 말아서 창문 틈을 막다가 죽은 아이들과 정치적·행정적 시스템과의 그 참혹한 단절은 어찌 된 영문인지를 나는 알 수가 없다. 최부가 표류했던 조선 성종 시대의 동지나 바다는 물결이 사나웠고 세월호가 항해하던 박근혜 대통령 시절의 진도 연안 여객선 수로는 물결이 높지 않았는데, 그 인기척 없는 적막강산의 풍경은 흥망과 건국, 전쟁과 재건을 거쳐온 600년의 세월이 지난 후에도 어찌 그리 똑같은지, 내가 얼마 전에 진도 팽목항에 가서 눈물도 말라버린 유가족들과 함께 바다를 바라보니 부르는 소리는 수평선 너머로 퍼져 가는데 배 빠진 자리는 흔적이 없고, 바다에는 아무 일도 없었다. 

 國破浪花飛 (국파랑화비)

 海暮號哭散 (해모호곡산)

 나라는 깨지고 물보라 날리니

 바다는 저물고 곡소리 퍼진다.

 <두보(杜甫)를 흉내 내 지음>

 장한철(張漢喆·1744 ~?)은 조선 영조 연간의 제주도 선비다. 26세 때 서울 가서 과거를 보려고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다가 풍랑을 만났다. 그는 오키나와까지 떠밀려갔다가 중국 상선을 얻어 타고 2개월 만에 돌아왔다. 29명 중에서 22명이 물에 빠져 죽었고, 살아서 돌아온 자들도 곧 병들어 죽었다. 부서진 배가 파도에 치솟고 잠기면서 장한철에게 죽음이 다가오는데, 임박한 죽음 앞에서도 인간은 삶을 기약한다. 그때 장한철의 각오는 다음과 같다.

 "만일 내가 살아서 돌아간다면 응당 글 읽는 일을 던져버리고 집 밖의 일도 벗어버리고 몇 고랑 안 되는 밭을 몸소 갈면서 쌍오당(둘째 아버지의 아호)의 여생을 효성스럽게 받들련다.” (『표해록』 장한철 지음, 김지홍 옮김, 지식을 만드는 지식, 2009, 68쪽)

 임박한 죽음 앞에서 장한철은 삶의 쇄신을 각오하는데, 쇄신의 골자는 책을 버리고 밭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그는 언어와 관념의 세계를 버리고 몸과 대지가 부딪치고 엉키는 직접성의 세계에 삶을 재건할 것을 기약한다.

 세월호가 기울고 뒤집히고 가라앉을 때 배에 갇힌 사람들은 마지막 순간까지 그러한 방식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것이 생명의 고유한 원리라고 나는 생각한다. 아 물이 차오르는구나, 이제 죽어야겠다, 라면서 죽은 사람이 있을 것인가. 세월호에서 죽은 그 많은 사람들도 장한철처럼 죽음 앞에서 삶의 쇄신을 기약했을 것인데, 그들의 마음속에서 울음으로 끓어오르던 새로운 삶에 대한 각오와 동경, 지나간 삶에 대한 회한과 뉘우침, 이루어야 할 소망과 사랑과 평화와 친절, 만남과 그리움, 손 붙잡기, 끌어안기 쓰다듬기…. 이런 것들을 생각하면서 팽목항에서 나는 기막혔고 분했다.

 장한철의 그 일생일대의 각오는 오래가지 못했다. 살아서 돌아온 그는 다시 글의 세계로 돌아갔다. 풍랑 치는 바다에서의 생각과 흔들리지 않는 땅 위에서의 생각은 전혀 다른 모양이다. 장한철은 살아온 지 두어 달 만에 다시 서울로 올라가서 과거에 응시했고, 떨어졌다. 낙방한 그가 다시 배를 타고 제주 바다를 건너 고향으로 돌아갈 때 책과 밭에 대해서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기록에 없다.

 장한철은 살아서 돌아왔으므로 그의 마지막 각오와 소망을 번복할 수 있었겠지만, 세월호에 갇혀 죽은 사람들은 돌아와서 번복할 수 없을 것이므로 그들의 마지막 소망은 영원히 유효하다. 그 유효한 소망들이 바다와 육지 위에서 발 디딜 곳을 찾지 못하고 떠돌고 있다. 떠돌고 있지만, 소망들은 유효하다.

 세월호는 화물을 너무 많이 실었고, 선체를 불법으로 증축했고, 배의 균형을 유지시켜주는 평형수를 빼냈고, 갑판 위의 화물을 단단히 묶어놓지 않았기 때문에 배가 흔들릴 때 복원력을 상실하고 한쪽으로 쏠려서 침몰한 것이라고 검찰은 수사결과를 밝혔다. 검찰은 이 부분을 아주 자세히 설명했다.

 검찰의 말은, 한마디로, 세월호는 물리법칙을 위반했기 때문에 침몰했다는 것인데, 지구 중력의 자장 안에서 물리법칙을 위반하고서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은 없다. 세월호는 가라앉을 만해서 가라앉았다는 것이다.

 나는 오래전에 졸작소설 『칼의 노래』를 쓰느라고 선박과 항해에 대한 책을 몇 권 읽었다. 내가 읽은 책들은 들이댈 만한 것도 아니고 내가 쓰려는 소설과 직접 관련이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바다의 질감과 선박의 작동원리를 전혀 모르고서는 글을 쓸 용기를 낼 수 없었다. 백면서생이 배의 작동원리를 말하는 것은 꼴 같지 않지만 무릅쓰고 가려 한다.

 20세기의 대형 선박은 모두 쇠로 만든다. 쇠가 어떻게 물에 뜨는가. 쇠건 바위건 나무토막이건 같은 용적의 물보다 가벼우면 뜨고, 무거우면 가라앉는다. 이 세상의 모든 배를 지칭하는 영어 보통명사는 베슬(vessel)인데 그릇이라는 뜻이다. 그 자체에 용적을 포함하고 있는 운송수단이라는 말이다. 수만t의 쇳덩어리는 베슬을 이룸으로써 가라앉으려는 중력과 띄우려는 부력이 길항(拮抗)하면서 물에 뜬다. 이것은 소금쟁이가 물에 빠지지 않는 이치와는 전혀 다르다. 이 길항의 원리는 울산 반구대 암각화에 나오는 신석기 사내들의 고래잡이용 보트(내가 좋아하는 그림!)나 생환율이 50%에 불과했던 16세기 포르투갈·스페인·네덜란드의 범선이나 명량해전, 노량해전, 한산해전, 옥포해전에서 이긴 이순신 함대의 판옥전선이나 두 동강 난 천안함이나 방위 예산 떼어먹은 통영함이나 멀쩡히 가다가 가라앉은 세월호나 다 똑같이 적용되는 것이다. 예외는 없고 예외는 곧 죽음이다. 무게중심과 부력중심이 서로를 피하고 또 달래가면서 기우는 배를 제자리로 돌려놓는데 이 양극단의 모순이 한순간의 물리현상 속에서 통합됨으로써 배는 롤링하면서 전진한다. 그러나 배가 옆으로 기울 때 이 경사각도가 모순을 통합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가면 복원력은 순간에 소멸하고 배는 뒤집혀서 침몰한다. 배는 유(柔)로서 강(剛)을 다스리며, 유와 강의 종합으로써 롤링하고 피칭하는데, 배가 롤링과 피칭 없이 뻣뻣하게 파도를 대하면 배는 바로 깨지거나 침몰한다.

 이순신 함대의 배도 그렇지만 전통적인 한선(韓船)은 연안 항해용이기 때문에 바닥이 평평해서 큰 파도를 만났을 때는 복원력이 약하다. 그래서 한선은 무거운 화물을 배 밑바닥에 싣고, 화물이 모자랄 때는 바위를 실어 무게중심을 낮춘다. 목포해양박물관에 전시된 신안 보물선도 모든 화물을 배 밑창에 싣고 있다. 이것은 아무런 비밀도 아니고 전문지식도 아니다. 고대 이집트의 갈대배에서부터 적용되던 원리다.

 세월호는 이 모든 원리와 인류의 축적된 경험을 거꾸로 했다. 그러니 어찌 살기를 바라겠는가. 갑판에 과적을 함으로써 무게중심을 위로 끌어올렸고, 배 밑창의 평형수를 빼버려서 배의 중심을 허깨비로 만들었다. 이것이 침몰의 원인인가. 이것은 원인이라기보다는 침몰 그 자체다. 이것이 침몰의 원인이라고 말하는 것은 배가 뒤집혀지니까 가라앉았다는 말과 같다. 이것은 동어반복이다.

 세월호 침몰의 중요한 원인의 하나는 화물을 단단히 묶지 않았다는 것이다. 검찰이 그렇게 말했다. 기울어진 세월호의 사진을 보면 갑판 위에는 컨테이너고 승용차고 아무것도 없이 빗자루로 쓸어낸 것처럼 깔끔하다. 배가 기울 때, 화물들이 한쪽으로 쏠려 물속으로 휩쓸려 내려간 것이다. 화물을 단단히 묶지 않았다는 수사결과는 맞는 말이다.

 화물을 단단히 묶는 것을 고박(固縛)이라고 하고, 원양선원들의 전문 용어로는 래싱(lashing)이라고 하는데, 다 같은 말이다. 이것도 별것이 아니다. 지게꾼이 옹기를 묶을 때, 1.5t 픽업트럭 기사가 적재함의 짐을 묶을 때, 퀵서비스 오토바이 기사가 뒷자리의 박스를 묶을 때 그리고 앞에서 썼듯이 조선 성종 때 바다에서 죽음을 맞는 최부가 이불을 찢어서 몸을 선체에 묶을 때, 이 모든 동작이 래싱이다. 래싱은 흔들리면서 길을 가는 모든 자들의 기본동작이다. 별것이 아니지만, 이탈자는 살길이 없다.

 그래서 원양을 항해하는 선박의 갑판원들은 쉴 새 없이 갑판을 순찰하면서 컨테이너를 묶는 쇠줄(래싱바)을 스패너로 조인다. 이것이 갑판원의 기본 업무다. 컨테이너는 선체와 밀착되어 롤링과 피칭을 함께 해야 하며, 컨테이너가 정위치를 이탈해 한쪽으로 쏠리면 그 기세로 배 전체를 끌고 쓰러져서 살길은 없어진다. 운동은 복원되지 않는다. 세월호는 등짐 지는 지게문만큼도 래싱을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세월호가 래싱을 엉터리로 해서 침몰했다는 말도 또 다른 동어반복이다. 비를 맞으니까 옷이 젖었고, 밥을 굶었더니 배가 고프다는 말과 같은 말이다. 세월호는 왜 기울었고 왜 뒤집혔는가.

 2014년 4월 16일의 참사 이후로 사태를 바라보는 이 사회의 시각은 발작적인 분열을 일으키며 파탄되었다. 슬픔과 분노를 온전히 간직해서 미래를 지향하는 동력으로 가동시켜야 한다는 시각과 그 슬픔과 분노를 매우 퇴행적인 소모적인 것으로 여겨 혐오하는 시각이 교차했다. 거칠게 말하자면 4월, 5월까지는 전자의 시각이 우세했으나 6월 4일 지방선거에서 여당이 적지 않은 재미를 보고, 이어 7월 30일 재·보선에서 여당이 압승하자, 후자의 시각이 주류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슬픔과 분노에 오랫동안 매달려 있는 것은 경제 살리기에 해롭다는 것이 그 혐오감의 주된 논리였다. 세월호에서 놓친 골든타임이 경제회복의 골든타임으로 살아났고 거기에 이념의 날라리들이 들러붙기 시작했다. 사실 4·16참사 이후에 경기는 장기 침체에 빠졌고, 정부의 부양책은 힘을 쓰지 못했다. 모두들 슬프고 분하면 경기는 침체되는 것이니까. 슬픔과 분노가 경기침체의 원인이라는 말도 결국은 동어반복이다. 어찌 헌 옷을 벗듯이, 헌신짝을 벗어버리듯이 마음의 일을 벗어 던질 수 있을 것인가. 돈 많고 권세 높은 자들이 큰 죄를 저질러도 경제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해 형량을 줄여서 선고하고, 형기 중에도 특별사면, 일반사면, 집행정지, 가석방, 병보석으로 풀어주는 무법천지를 나는 자유당 때부터 보아왔고 자유당은 지금도 특별사면 중이다. 죄형법정주의는 무너졌고 경제는 합리적이고 규범적인 토대를 상실했다. 재벌의 불법을 용인해야 경제가 살아나고, 정당한 슬픔과 분노를 벗어 던져야만 먹고살기 좋은 세상이 된다는 말은 시장의 논리도 아니고 분배의 정의도 아니다. 그것은 정치적인 속임수일 뿐이다. 법치주의가 살아 있어도 법이 밥을 먹여줄 리는 없고, 밥은 각자 알아서 벌어먹어야 하는 것인데, 법치주의를 포기해야만 밥을 벌어먹기가 수월해진다면 이 가엾은 중생들의 밥은 얼마나 굴욕적인 것인가.

 나는 수감 중인 대기업 총수에 대한 가석방 결정이 법무장관의 ‘고유권한’이라는 언설에 반대한다. 장관이 자의적으로 행사할 수 있다는 의미의 고유권한이란 존재할 수 없다. 이사금(尼師今)이 아니고 마립간(麻立干)이 아닐진대, 어찌 직무에 따른 권한이 그 직위에 ‘고유’하게 귀속될 수가 있겠는가. 장관은 다만 그 가석방이 법치주의의 원칙과 절차에 비추어 정당한 것인가 아닌가를 공적으로 판단할 의무가 있을 뿐이다.

 저 사람을 풀어주면 이 나라가 얼마큼 더 잘 먹고 잘 살게 될 것인가는 법무장관이 판단할 일이 아니다. 그것은 장관의 판단의 준거가 될 수 없다. 자유당 때부터 지금까지 전개된 무법천지의 관례도 장관이 참조할 전례가 되지 못한다. 저 사람을 지금 풀어주면 이 나라는 무엇을 잃어버리고, 무엇이 무너져 내리며, 후세의 더 큰 무너짐을 어찌 감당할 것이며, 어떠한 앞날이 닥쳐올 것인가를 판단하는 것이 장관의 일이기를 나는 바란다.

 지금, 그날 벌어 그날 먹거나 한 달 벌어서 한 달을 먹거나, 사람들은 먹고살기의 지옥을 헤매고 있다. 이 겨울에 살기 위한 아무런 방편도 마련할 수 없는 많은 사람들을 나는 알고 있다. 이 중생고(衆生苦)가 수감 중인 대기업 총수의 석방 주장을 정당화하고 세월호의 슬픔과 분노에 대해 침묵을 요구하는 근거가 된다는 것은 기막힌 일이지만, 기막히게도 그렇게 되어가고 있다. 그렇게 해서 4·16의 슬픔과 분노는 전혀 정치적인 것이 아니었지만 결국은 정치의 악다구니 속으로 편입되었고, 내 편과 내 편이 아닌 편으로 갈라져서 치고받게 되었는데, 세종로에서 단식을 이어가던 유가족들 옆에서 먹성 좋아 보이는 청년들이 통닭과 짜장면을 먹어대고, 또 국회의원 명함을 내미는 웬 여성의원이 대리운전기사를 폭행하는 짓에 연루됨으로써 이 악다구니와 악다구니에 편승하는 또 다른 악다구니들이 온 나라에 넘쳤다. 슬픔과 분노의 온전한 모습은 파괴되었고 유민이의 젖은 6만원의 의미는 실종되었다. 그 슬픔과 분노는 특별히 재수가 없어서 끔찍한 재앙을 당한 소수자의 불운으로 자리 매겨졌다. 그 소수의 고통을 사회적으로 표출하는 것은 다수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것이고 다수가 먹고사는 일이 해로운 결과가 된다고 힘센 목청을 가진 언설의 기관들이 힘을 합쳐서 소리 질렀다. 소리 질러서 낙인찍었고, 구석으로 몰아붙였다. 그렇게 해서 4·16의 슬픔과 분노는 특별히 재수 없어서 재난을 당한 소수자의 것, 우는 자들만의 것, 루저들만의 것으로 밀려났다.

세월호가 침몰한 사건과 그 모든 배후의 문제를 다 합쳐서 세월호 제1사태라고 한다면, 제1사태 직후부터 이 나라의 통치구조 전체가 보여준 붕괴와 파행은 세월호 제2사태다. 이것은 또 다른 난파선이다. 제1사태와 제2사태는 양태는 다르지만 뿌리가 같아서 어느 것이 원인이고 어느 것이 결과인지 구분할 수 없는데, 과거의 제2사태가 오늘의 제1사태로 터져 나오고, 오늘의 제2사태가 미래의 제1사태를 예비하고 있다. 세월호 이준석 선장과 선원들은 제1사태 때 승객과 배를 버리고 먼저 탈출했다. 이준석 선장은 36년 형을 받았다. 세월호 제2사태에서도 많은 책임 있는 자들이 난파선을 버리고 탈출했거나, 탈출을 시도했고 이준석을 욕함으로써 자신들의 탈출의 오욕을 희석시키고 있다. 이 난파선은 아직도 표류 중이다. 세월호특별법을 만드는 과정에서도 고통과 슬픔을 향해 얼만큼 가까이 다가가야 하는지, 어느 정도에서 발을 빼야 하는지를 놓고 다투다가 여야 합의는 거듭 난파되었고 야당의 리더십은 침몰했다. 대통령은 사건 당일 인명구조에 최선을 다하라고, 일곱 시간 동안 일곱 번이나 각급 지휘관에게 명령을 내렸다고 비서실장이 밝혔다. 그런데 현장의 구조 인력은 기우는 배에 접근하지 않았고, 해경 책임자는 구조 인력 투입을 지연시키고 있었다. 대통령의 명령은 대체 무엇인가. 명령이란, 복종되고 실현되기를 강요하는 의사 표시다. 대통령의 직무는 언어의 형식으로 명령을 내리는 것이 아니고, 그 명령이 요구하고 있는 내용을 현실로 바꾸어놓는 것이다. 명령은 직무의 발동이고 실현은 직무의 완수다. 이것이 대통령과 9급의 차이일 것이다. 명령을 일곱 번 내렸다고 해서 대통령의 책임을 다한 것이 아니다. 명령은 허공으로 흩어졌는지, 대통령의 명령이 구중궁궐에 갇힌 대왕대비의 신음처럼 대궐 담 밖을 넘지 못한 꼴이니, 그 나머지 일들은 기력이 없어서 더 말하지 못한다.

 연초에는 세월호특별법에 따른 위원회가 결성되어 진상조사, 재난 예방과 대처, 희생자 위로 등의 사업을 시작하게 된다. 세월호 사태는 제3의 국면으로 접어드는 셈이다. 위원회는 법이 정한 바에 따라 한시적인 기구가 되었지만, 이 같은 일에는 시한이 없어도 좋을 것이다. 우리는 세월호를 도려내고서는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갈 수 없다. 세월호를 내버리고 가면 우리는 또 같은 자리에서 물에 빠져 죽는다. 우리는 새로 생기는 위원회를 앞세워서, 세월호를 끝까지 끌고 가야 한다. 위원회가 동어반복으로 사태를 설명하지 말고 그 배후의 일상화된 모든 악과 비리, 무능과 무지,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의 공생관계를 밝히는 거대한 사실적 벽화를 그려주기 바란다. 그리고 유민이의 젖은 6만원의 꿈에 보답해주기 바란다. 나는 사실 안에 정의가 내포되어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이 사실의 힘에 의해 슬픔과 분노가 미래를 향한 희망의 동력으로 바뀌기를 바란다. 바르고 착한 마음을 가진 많은 유능한 인사들이 이 위원회에 참여해주기를 나는 바란다. 삶을 쇄신하는 일은 여전히 가능하다고 우리는 말해야 한다. 

◆ 외부 필자 기고는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

김훈은… 소설가이자 자전거 레이서. 1948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고려대 영문과 중퇴. 한국일보·시사저널·한겨레신문 등에서 30년 넘게 기자 생활을 했다. 불혹을 한참 지나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힘 있는 문체, 역사적 인물들의 흔들리는 내면에 대한 묘사로 특히 중장년 독자들에게 사랑받고 있다. 2001년 작 『칼의 노래』는 100만 부 이상, 2007년 작 『남한산성』은 60만 부 넘게 팔렸다. 장편 『현의 노래』 『공무도하』, 소설집 『강산무진』, 산문집 『선택과 옹호』 『풍경과 상처』 『자전거 여행 1·2』 등이 있다. 동인문학상·이상문학상·황순원문학상·대산문학상 등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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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선희의 시시각각] 알리바바를 보는 허탈함에 대하여

[중앙일보] 입력 2014.09.24 01:01 / 수정 2014.09.24 01:01


양선희
논설위원


  중국발 알리바바가 지구촌을 흔들었다. 지난주 알리바바의 미국 증시 상장을 전후로 월스트리트저널·블룸버그 등 글로벌 미디어들이 내내 쏟아낸 보도는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였다. 중국 정보기술(IT) 기업의 미국 증시 상장은 새로운 일도 아니다. 이미 28개나 있다. 그런데 이런 법석은 처음이다. 그러더니 19일 상장하자마자 가격이 치솟아 단박에 시가총액만 2000억 달러가 넘어섰다. 시총 규모로 세계 IT 기업 4위. 애플·구글·마이크로소프트(MS) 다음이다. 삼성전자 시총 규모는 1700억 달러 선이다.

  알리바바가 뭐길래? 롤모델은 미국 ‘아마존’이라는데 거래방식은 ‘이베이’를 베낀 중국형 전자상거래업체다. 미국 이베이가 일찌감치 중국 소비자(C2C)시장에서 손 털고 나가게 한, 중국 전자상거래시장의 80%를 점유한 기업. 성공한 대부분의 중국 기업이 그렇듯 이미 세계시장에서 검증된 성공모델을 하이브리드하게 베껴 드넓은 중국시장을 석권했다. 하지만 미국 등 해외시장 진출이나 성공가능성은 낮게 평가되는 중국 내수용 기업이다. 그래서 그들을 혁신기업이라 부르진 않는다.

 한데 월스트리트저널은 “이제 중국이 혁신할 수 없다는 근거 없는 믿음을 버릴 때”라며 관점을 바꿨다. 그들은 중국 기업의 성공을 ‘상업화를 통한 혁신’이라고 했다. 서구 기업이 추구하는 ‘빅뱅’과 같은 혁신이 아니라 남의 기술을 재빨리 모방해 점진적 발명을 더해 중국시장에서 팔리도록 하는 실용적 혁신을 했다는 것이다. 짝퉁이라도 중국시장에서 잘 팔리니 혁신이라는 말이다. 이처럼 13억 중국시장의 힘은 미국 언론으로 하여금 혁신의 개념까지 바꾸도록 했다. 한국 기업엔 소소한 디자인을 도용했다며 달려들던 애플도 ‘짝퉁 아이폰’임을 대놓고 자랑하는 샤오미엔 입을 꾹 다문다. 이 역시 거대한 중국시장의 힘이라고밖에 설명할 수 없다.

 바로 이 지점에서 허탈함이 밀려든다. 그동안 우리는 ‘글로벌 리딩 기업은 기술 혁신의 산물’이라고 신앙처럼 믿었다. 애플·구글·MS가 그랬으므로. 한데 알리바바는 잘 베껴서 4위 자리에 섰다. 우린 ‘짝퉁 아이폰’ 샤오미가 중국시장에서 삼성을 밀어내고 1위를 차지하는 광경도 봤다. 짝퉁도 주인공이 됐다.

 이렇게 불공평해 보이는 현상은 좌절과 상실감을 준다. 그래서였던 것 같다. 세계가 알리바바로 들썩이는데 국내에선 냉담했다. 상장 이전에 가장 많이 다뤄진 뉴스가 알리바바에 투자했던 소프트뱅크 손정의 회장이 일본 내 1위 부자가 됐다는 정도였다. 국내 전문가들 평가도 후하진 않다. 알리바바의 지속성장과 국제경쟁력 확보 가능성에 의문부호를 단다. 척박한 땅에 태어나 국제경쟁력에 목숨을 걸고 혁신만이 살길임을 외치는 우리에게 알리바바는 ‘조상 잘 만나 드넓은 땅을 물려받은 덕에 땅 짚고 헤엄치는’ 것처럼 보여 아니꼽다.

 한데 어쨌든 세계 정보통신기술(ICT) 서비스 시장이 미국·중국의 양강체제가 된 게 현실이다. 중국 기업들은 주요 기술을 사들인다. 창의적 한국 벤처들은 그들의 포식 대상이다. 알리바바가 성장 한계에 부닥쳐도 거대한 중국시장이 멈추진 않는다. 새로운 중국 스타는 계속 나올 거다. 중국시장 성공 자체가 혁신이라는 건 바로 이런 뜻이다.

 ‘재주는 곰이 넘고 돈은 왕서방이 번다’는 옛말은 여전히 유효하다. ‘알리바바 현상’은 우리에게 이제 ‘ICT 강국’이라는 자만심을 내려놓으라는 신호를 보낸다. 서글프지만 생각과 태도를 바꿔야 하는 건 중국이나 세계시장이 아니라 우리다. 분명한 건 한국 IT산업은, 우리 산업 전반이 그렇듯 중국발 위기 앞에 섰다. 눈 감고 속 좁게 군다고 현실이 바뀌진 않는다. 그렇다고 비관적인 ‘중국 하청기지’ 운운은 이르다. 우리는 늘 위기에 강했으므로. 거대시장 자체가 혁신으로 인정받는, 새로운 ‘샌드위치’ 국면에 우린 빨리 옛 성공의 기억을 잊고 새 게임의 방식을 찾아야 한다. 또다시 ‘가지 않은 길’을 찾아나설 때가 됐다.

양선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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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을 열며] 미치도록 본질

[중앙일보] 입력 2014.08.15 00:31 / 수정 2014.08.15 00:34
김영훈
경제부문 차장
무릇 세상에 이유 없이 내다 파는 건 없다. 그런데 그제 ‘왜 팔까’ 싶은 물건이 시장에 나왔다. 포스코특수강이다. 특수강 계열사가 있는 세아그룹이 사 갈 분위기다. 포스코특수강은 포스코가 가지고 있어도 무방한 회사다. 많지 않아도 이윤은 남기는 업체이기 때문이다. 불황에도 1분기 48억원의 영업이익을 냈다. 포스코 전체의 영업력을 감안하면 밑질 장사를 할 일도 없는 업체다. 그런데 내놨다. 이유가 궁금했다. 역시 뭔가 있었다. 다만 일반적인 셈법과 좀 달랐다. 두 가지다. 우선 포스코는 주머니를 두둑하게 채워 둘 필요가 있다. 돈이 없어서가 아니다. 1분기 말 포스코의 현금 및 현금성 자산은 4조원이 넘는다. 하지만 공급 과잉에 따른 철강업 불황은 돈을 더 쌓으라 재촉한다. 배당을 줄이면 주식을 팔아 버리겠다는 외국 투자자의 으름장이자, 신용등급이란 이름의 압박이다. 이번 매각이 크진 않지만 어쨌든 곳간을 더 채워서 나쁠 건 없다.

 주목할 것은 두 번째다. 포스코가 특수강을 계속 거느리고 있으면 다른 특수강 업체가 어려워진다. 중국발 공급 과잉은 한두 업체가 이겨 낼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선다. 포스코의 우산 아래에 있는 포스코특수강은 그래도 3~4%는 남길 수 있다. 포스코특수강이 그만큼 먹으면, 다른 업체는 잘해야 본전이거나 적자다. 그래서 결정했다고 한다. ‘철강 맏형의 책임’도 고려했다고 한다. 세아베스틸이 포스코특수강을 합병해 덩치가 커지면 그만큼 대외경쟁력도 높아진다. 그렇다고 남 좋은 일 시키려고 밑지고 판다는 얘기는 아니다. 포스코에도 득이 되는데, 동시에 나머지 특수강 업체에도 이익이 되는 거래란 얘기다.

 이 거래가 잘되길 바란다. 취지대로라면 포스코가 최근에 한 가장 큰 사회 기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개별 회사의 이해와 전체 업종의 이해를 충족할 수 있는 상생이다. 장학금 주고, 소외 계층 돕는 것도 필요하다. 하지만 이런 기부가 1차 방정식이라면, 특수강 매각은 사회 기여의 3차 방정식쯤 된다. 기업 경영이라는 본질을 통한 기여의 영향은 오래가고 넓게 퍼지기 때문이다.

 포스코특수강 매각을 예사롭지 않게 보게 된 건 최근 수백억원에 팔린 벤처기업 파이브락스 때문이다. 이 성공을 두고 ‘먹튀’라는 비아냥이 나온다. 사회적 기여도 좀 하라는 애먼 소리도 있다. 하지만 이 회사는 이미 최고의 사회적 기여를 했다. 위험을 감수하는 도전을 통해 성공할 수 있다는 입증 말이다. 자본주의여서 돈으로 증명서가 발급됐을 뿐이다. 게다가 창업자 노정석씨는 2008년에도 회사를 해외에 매각한 적이 있다. 한 번은 우연으로 치부할 수 있지만, 두 번은 다른 업체에 꿈을 주기에 충분하다. 애꿎게 변죽을 울려 본질까지 흔들지 않았으면 한다. 동시에 매주 봉사활동을 한다고 기업의 본질적 책임에 대한 면죄부가 주어지지도 않는다. 미치도록 본질에 충실할 것, 그것이면 족하다.

김영훈 경제부문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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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우석 칼럼] C+보다 F학점이 나은 이유

[중앙일보] 입력 2011.02.26 00:22 / 수정 2011.02.26 00:58

조우석
문화평론가

미 국 언론계에서 서평 기자로 유명한 이가 마이클 더다(63)이다. 1978년 이후 워싱턴포스트에서 서평을 써왔고, 그걸로 퓰리처상까지 받았다. 그런 그는 책과의 만남을 주제로 한 자전기록 『오픈 북』(을유문화사)을 썼다. 폭넓은 인문 교양이란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책인데, 잠시 경청해볼 게 거기에 나오는 대학시절 학점 이야기다. 스펙 쌓기 일환으로 고학점에 목매는 우리 현실을 점검해볼 수도 있다. 특히 새 학기 맞는 대학생들과 함께 음미해보고 싶다.

 그는 명문 오벌린대에 입학했다. 1학년 때 불문학 강의를 듣는데 담당교수는 숙제 많이 내주기로 악명높은 비니오 로시였다. 그는 매주 리포트 제출을 요구했다. 보들레르 등의 시작품에 대한 분석이었다. 어느 날 그가 뜬금없이 학생들에게 물어봤다. “어떤 학점이 가장 나쁜지 알아?” 한 학생이 “F학점”이라고 대답했다. “학생을 오만하게 만드는 A학점이야말로 정말 나쁜 학점”이라는 주장도 나왔다. 고개를 젓던 교수의 말이 역설적이다. “실은 C플러스가 가장 나빠. 그 학생이 너무 평범하다는 증거가 아닐까?”(324쪽)

 교수 가 요구했던 건 학생들의 기계적 처리 능력보다는 창의력일 것이다. 창의력이란 자기 개성에 충실한 학생 개개인의 자신감, 때로는 창조적 오독(誤讀)에서 나온다며 그들에게 용기를 북돋아준 발언이다. 그렇다면 지난 해 늦가을 겸사겸사 만났던 최재천 이화여대 석좌교수가 들려준 이색 학점론(論)도 함께 음미해볼 만하다. 여러 대학에서 강의해 본 경험이 풍부한 그에 따르면 학교마다 학생들의 수강 태도가 좀 다르다.

 “서울대·연세대 학생들은 의자에 앉을 때부터 삐뚜름합니다. ‘어디 강의 한 번 들어나 볼까?’ 하는 식이죠. 이화여대생들은 그게 없어요. 정말 착실해요. 왠지 아세요? 남녀공학에서처럼 C,D학점을 도맡아 깔아주는 얼렁뚱땅 남학생들이 없으니까 여학생끼리 피나게 경쟁하는 것이죠.” 처음엔 그렇고 그런 학교자랑처럼 들렸다. 웬걸, 그는 이내 고학점에 매달리느라고 모험을 하지 않는 요즘 학생들을 혹독하게 질타하기 시작했다.

 “저는 학생에게 말합니다. 학점 기계로 만족한다면 훗날 하청업자가 될지는 모르나 사회적 리더로 성공하긴 힘들다. 너만의 문제의식을 가지고 좀 더 넓고, 삐딱해져라. 방법은 하나다. 타 분야 책까지 무섭게 읽어라.“

  실제로 그는 기업 강연 때 관계자들에게 올A 학점 졸업생을 뽑는 걸 경계하라고 주문한다. 그들은 창의력 없는 안전운행파다. 외려 다양한 강좌를 섭렵하며 ‘스스로 배가 고파’ 책과 씨름해본 학생에게서 미래의 빌 게이츠, 스티브 잡스가 나온다.

 더 다 기자의 회고담, 최 교수의 지적은 요즘 같은 무한경쟁 시절에 조금은 과한 주문일지 모른다. 대학과 사회를 이처럼 빡빡하게 만들어놓은 게 누군데, 여기에 더해 엉뚱한 주문까지 하는 어른들이 무책임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대학이, 그리고 창의적 사회란 게 과연 무엇이던가. 그런 큰 그림과 원칙을 염두에 둔다면 응당 들려주고 고민해봐야 할 사안이다. 대학문을 들어서는 새내기, 다시 새 학기 맞는 젊은 대학생, 당신들의 분전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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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youtu.be/ELC_e2QBQMk


코난 오브라이언 (Conan Christopher O'Brien, April 18, 1963 -)은 미국 매사츄세츠주 브루크린에서 태어난 토크쇼 사회자, 코메디언, 제작자, 극작가이다. 하버대 대학을 다녔고, SNL 의 작가, 심슨즈의 작가로 참여하다가 1993년 데이비드 레터맨이 떠난 레이트 나잇 쇼를 맡기도 했다.


Honorary Degree Recipient Conan O'Brien's Commencement Address to Dartmouth College Graduates


[참고자료]

다스무스 대학 졸업식사

http://www.dartmouth.edu/~commence/news/speeches/2011/obrien-speech.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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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는 '후진성'이 낳은 비극이 아니다… 오히려… (8·끝) 이택광 경희대 교수

-"이것이 국가인가" 탄식이 언론을 뒤덮고 전근대적 적폐를 사고 원인으로 지적하지만 이윤의 무한추구를 위해 최소한의 도덕마저 소멸시키며 극단으로 치달은 한국 자본주의가 원인 아닐까 ? -

세월호 참사는 단순한 여객선 사고에 그치지 않고 국가에 대한 질문을 정면에서 제기하는 사건이었다. 마치 타이태닉호 침몰이라는 상징적 사건이 유럽의 성장주의에 대한 반성을 촉구했던 것처럼, 세월호 참사가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도 유사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세월호 참사의 원인에 대한 논의로 들어가면, 각자 다른 입장을 보이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너나없이 반성하자는 목소리는 같은데, 지목하는 참사의 원인은 제각각이다. 세월호 참사가 단일하지 않기 때문에 강조점을 어디에 두는지 여부에 따라서 원인 진단도 달라질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닐까 한다. 

일차적으로 세월호 참사는 청해진 해운과 선장의 잘못이라고 볼 수 있다. 안전 규정을 무시하고 점검을 소홀하게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단순 사고로 끝날 수 있었을 상황이 참사로 번져갔던 원인은 해경을 비롯한 국가의 부실 대응이었다고 하겠다. 따라서 세월호 참사가 사고의 책임을 따지는 상황에서 국가의 의미를 묻는 상황으로 확대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인 것이다. 여기에 진두 지휘하는 제스처를 취하면서 박근혜 대통령이 전면에 나선 것도 이 사안을 국가의 문제로 나아가게 하는 데 한몫 했다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재난이 정치의 영역으로 넘어오게 된 것이고, 일부에서 주장하는 것과 달리 이런 현상이 '순수'하지 못한 시민들로 인해 발생하는 것이라고 보기 어렵다. 오히려 박 대통령도 이런 사태를 야기하는 데 일조했기 때문이다. 

박 대통령이 세월호 참사의 원인으로 지적한 것이 바로 '적폐'이다. 이런 문제의식은 정부의 부실 대응을 야기한 원인으로 한국의 전근대성을 지목하는 목소리와 묘하게도 화음을 이룬다. 박 대통령의 논리에 따르면 적폐는 비정상적인 것이고, 이것을 정상화하는 것이 이른바 국정기조인 것인데, 말할 것도 없이 비정상의 정상화가 전제하는 것은 전근대성을 타파하는 정상국가의 완성을 의미한다. 텔레비전으로 생중계되고 있는 구조 현장을 보면서 한국의 후진성을 새삼 실감했다는 '증언들'이 인터넷 게시판과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쏟아져 나온 것이나 “이것이 국가인가”라는 개탄이 언론을 뒤덮은 것은 무엇을 말해주는 것일까. 경제 규모에서 선진국 대열에 진입했는데, 그에 걸맞은 국가의 꼴이 갖춰져 있지 않다는 자각이 충격으로 다가온 것이라고 볼 수 있겠다. 

선진국이라는 표현의 뉘앙스에 이미 담겨 있는 의미가 바로 비정상의 정상화이다. 후진국 또는 비정상적인 국가를 발전시켜서 선진국 또는 정상적인 국가로 가야 한다는 발상이 여기에 드리워져 있다. 이 말만 놓고 보면 한국의 전근대성을 세월호 참사의 원인으로 지목한다는 점에서 박 대통령만 유독 이런 생각을 하는 것처럼 보이진 않는다. 적어도 선진국이라면 발생할 수 없는 참사라는 논리가 정치적 입장을 떠나 광범위한 지지를 얻었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사실은 같은 주장을 하고 있음에도 전근대성의 책임 소재를 각자 유리한 대로 따져 묻고 있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할까. 아마 이 문제의 정점에 ‘해경 해체’를 선언한 박 대통령의 대국민담화가 있을 것이다. 비정상의 정상화를 위해서 부정부패로 썩어 문드러진 감염 부위를 도려내야 한다는 위생학적인 상상력이 이런 해결책을 내놓은 것이리라. 

이것이 가능한 까닭은 공동체를 구성하는 과정이 바로 면역성을 만들어내는 계기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공동체는 이권보다도 증여를 통한 호혜평등의 원칙으로 작동한다. 이런 상호주의를 지탱하는 것이 위기나 위험으로부터 공동체를 안전하게 지키려는 면역성이다. 세월호 참사에서 확인할 수 있었던 안전에 대한 열망은 바로 이런 공동체와 면역성의 상관관계에서 발생한 것이다. 그러나 ‘내 가족’을 위한 면역성이 지나치게 강하면 공동체가 위협받듯이, 특정 집단의 안전만을 강조한다면, 지금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것처럼 자신들의 권력만을 지키려는 경향이 노골화할 수밖에 없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지금 정부가 보여주는 행태나 세월호 참사를 둘러싼 다양한 문제점은 한국이 전근대성을 벗어나지 못했기에 일어나는 현상이 아니다. 오히려 세월호 참사는 그 어디보다도 한국의 자본주의가 극단으로 치달았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다. 당장 선령 제한을 해제하고 증축에 증축을 거듭한 세월호야말로 이윤 추구의 막장을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선장이나 유병언 일가의 뻔뻔함은 이 때문에 가능하다. 자본의 입장에서 보면 이들은 최대의 이윤을 추구했을 뿐이다. 이런 상황에서 사고의 원인을 적폐나 부정부패 같은 애매한 도덕 규범의 문제로 치환하는 것은 문제의 본질을 놓치는 것이다. 이런 참사가 개인의 도덕성 문제라고 한다면, 지금 정부가 이야기하는 것처럼 세월호 선장을 살인자로 규정하고 유병언 일가를 일망타진하면 될 일이다. 그러나 과연 그럴 것이라고 장담할 수 있을까. 역설적으로 세월호의 적폐야말로 전근대성이라기보다 고도화한 한국 자본주의의 실상이 아닐까. 

당장 눈을 돌려보더라도, 이른바 전근대성과 관계없어 보이는 선진국에서 일어난 수많은 대형 참사들을 어렵지 않게 목격할 수 있지 않은가. 영국의 셰필드 힐스버러 축구장 붕괴사고나 런던 패딩턴 열차 사고를 전근대성과 연결하기는 쉽지 않다. 노르웨이에서 일어났던 총기 테러 사건의 원인이 전근대성이라고 주장할 이들은 없을 것이다. 미국은 또 어떤가. 카타리나 태풍으로 엄청난 사상자를 낸 뉴올리언스 참사가 있었다. 따라서 충분히 근대화된 국가라고 하더라도 대형 참사는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다. 문제는 그 참사에 적절하게 대처하는 정부의 능력일 것이다. 

이런 능력을 효율성과 동일시했던 것이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역대 정부 모두에서 확인할 수 있는 공통점이었다. 이때 말하는 효율성이라는 것은 적은 비용으로 높은 효과를 발휘하는 이윤 추구의 논리에 지나지 않았다. 언제 발생할지도 모를 재난에 대비해서 막대한 국가예산을 낭비할 것이 아니라, 비용을 민간에게 넘기면서 상생하는 길을 찾아야 한다는 민영화의 논리가 그럴 듯하게 들리는 지점이다. 예산을 적게 쓰는 '작은 정부'가 효율적이고 좋은 정부라는 암묵적 합의가 있었다. 시민사회에 대한 정치적 부담을 외면할 수 없었던 진보 정부가 모든 것을 시장의 논리에 맡기는 무모한 선택을 하지 않은 것을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자본주의의 핵심 동력은 이윤의 무한 추구에 있다. 정부는 이런 자본주의의 법칙을 진리로 받아들이고 위배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이른바 신자유주의라고 불리는 사고방식이었다. 그러나 2008년 세계금융위기 이후 폴 크루그먼이나 조지프 스티글리츠 같은 수많은 경제학자들이 지적했고, 최근 세기 자본론에서 토마 피케티도 동의했듯이, 자신만만하게 신자유주의가 주창했던 방식으로 불평등의 문제는 해소되지 않았다. 오히려 고삐 풀린 자본주의는 빈익빈부익부 현상을 더욱 부채질하는 한편으로, 열심히 노력하면 너도 나도 부자가 될 수 있다는 환상을 부추겼다. 한때 우리에게 부동산과 증권으로 대표되었던 거품경제는 성장 없는 자본수익률의 증가가 만들어낸 신기루였던 것이지만, 인생역전을 꿈꾸는 이들에게 둘도 없는 기회처럼 보였다. 

한국의 경우는 어땠을까. 국가 주도로 경제성장을 추진해왔던 근대화 과정이 말해주듯이, 국가를 통해 자본가가 육성된 경우가 한국이다. 민주화는 인권과 평등이라는 시민권의 가치가 확산되는 과정이자 동시에 국가에 복속되어 있던 자본가가 해방되는 과정이기도 했다. 

우리가 선진국이라고 습관적으로 부르는 서구의 근대성을 구성하는 사상의 핵심은 자유주의였다. 영국의 자유주의자들은 개인의 자유와 평등을 지키려면 사유재산이라는 물적 토대가 필요하다고 보았다. 이처럼 정치권력에게 개인의 경제활동을 침해하지 않도록 만드는 자유주의의 논리는 정교한 도덕철학의 논리 위에 서 있다. 이런 도덕철학의 규범과 시장경제의 법칙을 조율하는 정부의 기능이 바로 근대성의 요소라고 불린다. 지금 한국에서 결핍되어 있는 것은 도덕과 경제를 매개하는 정부의 역할이다. 이 역할을 바로 세우자는 것이 정치적 입장을 떠나 확인할 수 있는 공통의 주장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정부의 효용성과 자본주의는 아무 연관성을 갖지 않는다는 문제가 있다. 도덕을 통해 규제되는 자본주의가 진짜 자본주의일까, 아니면 도덕 따위는 필요하지 않는 자본주의가 진짜 자본주의일까. 이윤의 무한추구를 위해서 최소의 도덕마저 소멸시킨 한국의 자본주의야말로 발전에 발전을 거듭해서 도달한 순수한 자본주의인 것은 아닐까. 이 순수성을 다른 위협으로부터 지키기 위한 면역체계가 비대해져서 마침내 공동체의 공동선마저 붕괴시킨 것이 세월호 참사의 본질이라는 생각이 강하게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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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팸메일이 왔다. 구글이 내게 무슨 사연이 있겠나.. 했더니 역시 스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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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ogle dd.80@apf.asso.fr

3월 30일


Dear Google User,

You have been selected as a winner for using Google services. Find attached email with more details.

Congratulations,

Matt Brittin.
CEO Google UK.

©2014 Google - Terms & Privacy




===

이번에는 래리 페이지가 내게 스팸 메일을 보냈다.


Google Corporation cvigilg@inen.sld.pe

3월 27일
에게
Good Day,

Attached to this email is your winning notification for the prize you have won.

Larry Page
Chairman of the Board and Chief Executive Officer
2014 Google Corporation.


Google.do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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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침몰 사건이 한국인에게 던지고 있는 질문들은 엄중하다. 우리는 누구인가? 수백의 인명을 실은 배가 물속으로 가라앉는 동안 전신마비 환자처럼 그 침몰을 지켜보는 것 외에는 아무 일도 하지 못한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서, 그리고 희생자들에 대해서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국가는 또 무엇인가? 재난 앞에서 국민의 인명 하나 구해내지 못한 국가는 어떻게 국가이고 나라인가? 지난 수십 년 동안 비슷한 인재성 사고를 수없이 겪고도 사고공화국이기를 벗어나지 못하는 한국 사회는 도대체 어떤 사회인가? 2014년 4월16일 사건 이후 진도 팽목항에는 죽어간 아이들을 향한 절절하고도 가슴 아픈 절규의 쪽지들이 바람에 흩날리고 있다. “얘들아, 이 사회를 절대로 용서하지 말라.” “누가, 무엇이, 너희들을 죽였는가?” “이것은 우리가 죽을 때까지 지고 가야 할 죄다.”


이런 질문과 절규들은 세월호 참사 이후 우리 사회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어디서부터 무슨 일을 시작하고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에 관한 요청과 명령들을 제시하고 있다. 해야 할 일은 많다. 그러나 일의 목록을 누가 어떻게 짜건 간에 거기 반드시 필요한 것은 실패를 성찰하고 그 실패의 재연을 막아낼 방법을 모색하는 일이다. 사회는 어느 때 실패하고 왜 실패하는가?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살피는 것이 성찰이고 문제 해결의 방법과 비전을 찾아보는 것이 모색이다. 세월호 사건은 우리가 성찰과 모색이라는 두 가지 작업부터 진지하고 성실하게 수행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사회가 재난의 가능성 앞에서 자기를 지켜낼 원천적 능력은 거기서부터 키워진다.


<한겨레> 창간 26돌 기념 특집의 하나가 ‘고전 선정’과 ‘고전 읽기’에 바쳐진 것은 세월호 사건이 제기하는 이런 성찰과 모색의 요청에 응답하기 위한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 시도는 절대로 한가한 것이 아니다. 기본은 번쩍거리지 않고 화려해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그 기본을 내팽개치는 순간 사회는 실패를 예약한다. 돌아보면 우리 사회는 기본을 소홀히 함으로써 끊임없이 실패를 예약해 오지 않았는가? 그 기본 중에서도 기본적인 것이 ‘생각할 줄 아는 사회’를 만드는 일이다. 생각이 없고 생각하기를 거부하는 사회는 거기서부터 이미 재난을 내장한 위험사회다. 그런 사회에서 아이들은 끊임없이 죽고 어른들은 병들고 사회적 삶의 고통은 늘어난다. 생각할 줄 아는 사회를 만들어 나가고자 할 때 거기 요구되는 중요한 시민적 프로그램의 하나가 고전 선정과 고전 읽기다.


고전이란 무엇인가? 세월호 참사는 한국인들에게 어떤 텍스트가 고전으로 선정될 만한 것인지 다시 생각해볼 것을 요구한다. 우리가 잊고 있었던 질문들 앞으로 사정없이 우리를 소환하는 책이 지금 우리에게 고전이다. “너라면 이런 배를 타겠느냐?” “너라면 이런 나라에 살겠느냐?” “너라면 어떤 사회를 만들고 싶은가?” 오래된 질문들을 마치 처음인 것처럼 대면하게 하는 책이 지금 우리에게 고전이다. “가치가 물구나무설 때 사회는 어찌 되는가?” “무엇이 가치인가? 삶은 어느 때 의미를 획득하는가?” “문명의 목표는 무엇이겠는가?” “너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인가?”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아직 다 하지 않은 책, 자기 발언의 의미를 자기 시대에 다 소진시키지 않은 책, 어둠 속의 섬광처럼 한순간 우리를 전율하게 하는 책, 그런 책이 지금 우리에게 고전이다. 우리를 향해 얼음을 깨는 도끼처럼 불편하고 불안한 질문 던지기를 멈추지 않는 책, 우리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질문들에 정답을 주고자 하지 않고 다만 길을 안내하는 책, 생각을 자극하고 생각과 생각을 연결하게 하는 책이 지금 우리에게 고전이다.


<논어>에는 마구간에 불이 났을 때의 공자의 언행을 기록한 대목이 한군데 나온다. 마구간에 불이 났는데 공자가 퇴근하여 그 이야기를 듣고 묻기를 “사람이 다쳤느냐?” 그러곤 말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묻지 않았다. 참 멋대가리 없는 이야기다. 그래서 뭐가 어찌 되었다는 거냐? 공자의 제자들은 왜 그런 맹물 같은 이야기를 <논어>에 기록해 두었는가? 사람 값보다 말(馬) 값이 더 비쌌던 것이 공자 시대의 가격체계이고 가치서열이다. 그 시대에 사람의 안위부터 먼저 걱정한 것이 공자다. 세상의 가치서열을 무시한 그는 바보다. 그런데 세월호 참사에서 한국인이 뼈에 사무치도록 절감한 것은 사람보다 돈이 더 중요하게 여겨지는 사회의 ‘비참’이다. “인간들아, 인간을 욕되게 하지 말라”는 것은 <사회계약론>의 저자 장 자크 루소가 21세기 한국 사회에 던지는 절절한 당부다. 권력을 가진 자들과 부유한 자들은 어째서 동료 인간들의 불행에 그토록 무감각한가? 그 루소가 한국인들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한겨레> 창간 26돌 기념 특집은 26권의 책을 이 시대 한국인의 사유의 식탁에 올릴 텍스트로 선정하고 텍스트 하나하나로부터 정치, 사회, 경제, 문화, 역사, 문명, 인간 등에 관한 질문 하나씩을 뽑아내고 있다. 물론 26권이라는 숫자는 은유적인 것이며 질문 26개도 그러하다. 그러나 이것은 고전의 의미와 그 선정방식에 대한 새로운 접근법이다. 고전은 통상적인 고전 반열에 오르는 책들이어서 고전인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시대 한국인의 삶에 어떤 질문을 던지는가라는 관점에서 선정되고 있다. 질문은 텍스트가 명시적으로 던지는 것일 때도 있고 암시적 잠재적인 것일 때도 있다. 독자가 텍스트를 향해 던지는 질문도 중요하다. 시민은 누구인가? 세월호 이후 한국인에게 이 질문이 중요해졌다면 사회의 몰락을 막아내는 자가 바로 시민이라는 생각이 그에게 절절한 것이 되었기 때문이다. 작가 버지니아 울프는 <3기니>에서 어떤 인간형을 길러내는가라는 질문이 교육의 핵심부에 놓여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지금의 한국인, 한국 사회에 너무도 필요한 질문이고 지적이다. “어떤 사회를 만들 것인가”라는 질문과 “어떤 인간을 길러낼 것인가”라는 것은 지금의 우리에게 불가분으로 연결된 질문들이다. 어떤 나라를 만들고 어떤 문명의 문법을 구축해 나갈 것인가라는 질문도 마찬가지다.


지금은 생각을 거부하는 것이 유행처럼 된 시대다. 사회는 생각하지 않고 비판은 냉소의 대상이 되고 윤리적 사유에는 모라토리엄이 걸려 있다. 생존의 공포에 짓눌린 사람들은 짜증내며 반문한다. 누가 모르나? 그래서 어쩌라고? 생각이 밥 먹여 주나? 그런데 이런 짜증과 함께 우리는 죽어간다. 그 ‘우리’에게 함석헌 선생은 말한다.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

도정일/문학평론가·책읽는사회문화재단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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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의 날을 반납합니다
-세월호 참사를 교육 혁신의 계기로 삼고자 합니다.-

저희는 오늘 스승의 날을 반납합니다. 어버이날, 카네이션을 달지 않으신 어버이들과 같은 비통한 심정으로 오늘 하루, 스승의 자리를 돌아보고자 합니다. 지난 4월 16일 세월호 침몰 이후 저희들은 강의실에 들어서기가 힘들었습니다. 학생들을 바라볼 면목이 없었습니다. 배가 가라앉는데도 어린 학생들에게 '가만히 있으라'라는 말만 반복한 선박 회사 직원이 바로 저희들이 아니었던가 하는 자괴감 때문이었습니다.

세월호 사태의 원인을 진단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우리 사회의 온갖 부조리와 모순이 뒤엉킨 결과일 것입니다. 권력 누리기에만 골몰하는 뻔뻔한 정치권과 관료사회, 오로지 이윤만을 추구하는 야비한 기업과 시장, 타인을 존중할 줄 모르는 비정한 사회에서 이런 사건 사고가 나지 않는다면 오히려 이상할 것입니다. 세월호를 침몰시키고, 또 침몰한 배에서 단 한 생명도 구해내지 못한 주범은 '돈이 전부다' '권력이 최고다'라는, 그 누구도 예외이기가 쉽지 않은 사회적 합의일 것입니다.

스승의 날 아침, 저희들은 교육자로서 조금 다른 관점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세월호 참사의 보다 근본적인 원인은 교육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건국 이래 우리의 교육이 제대로 이뤄져 왔다면, 그리하여 사회가 온전한 개인, 건강한 시민들로 구성되었다면, 청해진과 같은 선박회사는 간판조차 내걸 수 없었을 것입니다. 정부의 초기 대응 또한 이처럼 불가사의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기레기 언론'이란 용어도 상상할 수 없었을 것이고, 희생자와 유족에 대한 일부 인사들의 패륜적 언사도 감히 이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세월호에서 '어른의 말'을 들은 학생들 대부분이 목숨을 잃고 말았습니다. 어른의 말을 들으면 생명을 부지할 수 없는 사회, 이런 사회는 명백하게 실패한 사회입니다. 어른의 말을 듣지 않아야 살아갈 수 있는 사회, 이런 사회는 교육 자체가 불가능한 사회입니다. 교육은 한마디로 어른의 말입니다. 어른의 말에 논리와 의미를 부여하고, 그것을 통해 새로운 어른을 길러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월호와 함께 어른이 설 자리를 잃었습니다. 교육의 토대가 붕괴됐습니다. 어른과 아이, 부모와 자녀, 선생과 학생 사이의 연결고리가 끊어졌습니다. 이처럼 광범위하고 심층적인 단절은 없었습니다. 

세월호가 우울, 분노, 허탈, 절망의 대명사가 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주저앉을 수는 없습니다. 애도하고 추모하고 서로 위로하며 기어코 다시 일어서야 합니다. 어른이 살아나야 합니다. 어른이 어른의 자리에서 우리의 아이들을 미래의 당당한 어른으로 키워내야 합니다. 세월호 참사로 고통을 겪고 있는 모든 이들을 위한 최선의 애도는 교육을 바로 세우는 것입니다. 교육을 혁신하는 것이야말로 미증유의 사회적 트라우마를 치유하고, 더 나은 미래를 위한 가장 근본적인 대책일 것입니다. 

세월호 참사를 교육 혁신의 계기로 삼아야 합니다. 공감하고 대화하는 능력을 재점검하고, 협동하고 배려하는 마음을 극대화하면서 변화를 일으켜야 합니다. 교육의 정상화는 실로 '거대한 전환'이 아닐 수 없습니다. 거대한 전환은 사회 전체의 공감과 참여가 있어야 합니다. 모든 어른이 스승이 되어야 합니다. 모든 마을과 도시가 교실로 거듭나야 합니다. 사회 전체가 좋은 학교로 바뀌어야 합니다. 스승의 날 아침, 저희들은 우리 사회의 모든 어른들과 함께 학생들 앞에서 떳떳하고 싶습니다.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교육이 사회의 뿌리입니다. 정치를 정치답게, 경제를 경제답게 하는 토양이 교육입니다. 스승으로서 고개를 들기 힘든 스승의 날 아침, 교육의 미래를 위해 다음과 같이 제안합니다. 

- 교육은 사회적 불의에 적극 개입하고 해결책을 모색해야 합니다.  
- 교육은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고 연대하며 책임감 있는 민주 시민을 키워내야 합니다.
- 교육에서 경제 논리, 기업 논리, 힘의 논리를 최대한 배제해야 합니다.
- 경쟁 위주의 교육 정책을 근본적으로 바로잡아 교육을 정상화해야 합니다.
- 교육 정상화를 통해 배려하고 존중하는 사회를 만들어나가야 합니다.
- 교육 정상화를 통해 '국민을 섬기는 국가'를 건설해야 합니다. 

2014년 5월 15일

세월호 참사를 교육 혁신의 계기로 삼고자 하는

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자 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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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참사로 숨진 이들의 명복을 빌며 우리 연세대학교 교수 일동은 비탄한 심정으로 참회하고 성찰하는 마음을 같이 나누고자 합니다. 무엇보다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육자로서 꽃다운 나이에 어른들의 구조를 믿고 기다리다가 숨을 거둔 단원고등학교 학생들, 이들과 함께 끝까지 곁에 있다가 유명을 달리한 선생님들을 생각하면 참담함과 비통함을 금할 길 없습니다. 아들딸의 시신을 붙들고 통곡하는 부모님들, 아직 시신조차 만나보지 못한 채 팽목항을 지키고 있는 부모님들의 처참한 심정에 가슴깊이 동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세월호 참사는 분명한 인재였다는 점에서 특별한 반성을 우리 모두에게 요구하고 있습니다. 본분을 망각하고 수많은 목숨을 앗아가도록 방치한 세월호 선장과 선원들을 포함한 청해진해운에 일차적 책임이 있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사고 발생 후 적절히 대처하지 못하고 구조의 난맥상을 보여 온 해경을 포함한 정부당국의 책임도 결코 이에 못지않게 엄중할 것입니다. 사실을 제대로 알리지 못하고 가족을 잃은 이들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던 일부 언론의 태도와, 무기력하게 대처 과정을 지켜보기만 했던 정치권의 태도는 전 국민의 분노를 일으켜 왔습니다. 침몰하는 세월호에서 우리가 동시에 목격한 것은 국가라는 제도의 침몰과 책임의식이라는 윤리와 양심의 침몰이었습니다.

세월호 침몰의 원인과 대처 및 수습 과정에서의 책임은 한 치의 의구심도 남김없이 명명백백하게 밝혀져야 하고 준엄한 법의 심판을 받도록 해야 합니다. 특히 국민들로부터 권력을 위임받은 정부는 '국가는 재해를 예방하고 그 위험으로부터 국민을 보호하기 위하여 노력하여야 한다'라고 헌법에도 명시되어 있듯이 이번 참사를 철저히 파헤치고 근본적인 대책을 마련해야 합니다.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저희들이 보기에, 이번 참사의 근본 원인은 물질적 탐욕에 젖은 나머지 생명의 가치를 내팽개친 황금만능주의, 편법과 탈법의 관행을 암묵적으로 받아들여 온 결과중심주의에 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산업화와 민주화를 모범적으로 이루어 왔다고 자부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세월호 참사는 우리 사회가 얼마나 삶과 생명에 대한 철학 및 성찰이 빈곤한 반인간적 사회인지를 여실히 증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무기력한 국가와 황폐해진 사회의 실상이 여지없이 드러난 세월호의 비극을 전국민적인 참회와 반성의 계기로 삼기를 제안합니다. 먼저 학생들을 가르치고 학문을 탐구하는 우리 교수들부터 진지하고 겸허하게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고자 합니다. 과정과 원칙을 무시한 채 결과만을 중시하고 비리와 이권으로 뒤엉켜있는 우리 사회를 질타하고 개혁하기는커녕, 오히려 이를 방조하며 이에 편승하려 하지는 않았는지 자성합니다. 스승의 날을 맞이하여 우리의 스승답지 못한 모습을 뒤돌아보며 가슴 속 깊이 뉘우치고자 합니다.

나 아가 우리 사회를 이끌어갈 책임을 진 모든 이들도 우리의 반성과 참회에 동참하기를 바랍니다. 국민의 안전·자유·행복의 보장에 소홀했던 현 정부를 포함한 정치권은 스스로 철저히 반성하면서 원인규명과 대책마련을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아야 합니다. 기업들 또한 공정경쟁을 왜곡하고 사회적 책임을 외면하고 있지 않았는지 진지하게 자신들을 돌아보고 정경유착이라는 낡고 잘못된 관행과 결별해야 합니다. 언론은 갑갑한 국민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신문고의 역할을 제대로 담당해왔는지 겸허하게 자성하면서 불법과 탈법을 적극적으로 고발하고 민주주의를 위한 권력 감시를 올바로 수행해야 합니다.

침 몰한 세월호 안에서 구조의 희망을 버리지 않고 두 손 모아 기도하며 서로의 손을 붙잡고 격려하던 어린 학생들은 엄중한 역사적 숙제를 안기고 우리 곁을 떠났습니다. 이들의 죽음 앞에 대한민국의 모든 어른들은 근본적인 참회와 성찰에 기초하여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를 실현하기 위한 실천으로 응답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탐욕과 비리, 생명경시 풍조가 우리 사회의 모든 구석에서 말끔히 제거될 때까지, 그리하여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의 구성원 모두가 인간적인 삶을 누리고 나눌 수 있을 때까지 반성과 개혁의 발걸음을 멈추지 않을 것임을 이들에게 엄숙하게 약속해야 할 것입니다.

어린 아들딸을 잃은 유가족 여러분들의 아픔과 고통에 깊은 위로의 말씀을 전하고, 안타깝게 세상을 떠난 고인들의 명복을 다시 한 번 간절히 빕니다.

2014. 5. 14

연세대학교 교수 일동

강 상현, 강승혜, 강정한, 고광윤, 권수영, 권영준, 기하서, 김갑성, 김경모, 김도형, 김동노, 김동현, 김동환, 김명섭, 김성보, 김성태, 김세익, 김시호, 김영희, 김왕배, 김용민, 김용준, 김종철, 김준일, 김준환, 김철, 김충선, 김태환, 김택중, 김학진, 김학철, 김현미, 김현숙, 김혜림, 김호기, 나윤경, Linda Kilpatrick-Lee, Michael Michael, 마광수, Mandel Cabrera, 문상영, 문정인, 문창옥, 박경수, 박상영, 박상용, 박애경, 박준성, 박찬웅, 방연상, 백경선, 서상규, 서현석, 서홍원, 설혜심, 손영종, 손창완, 손호현, 송인한, 송현주, 신동빈, Anthony C. Adler, 안춘수, 양재진, 양혁승, 여인환, 오홍석, 원재연, William L. Ashline, 유현주, 윤대희, 윤태진, 윤혜준, 이경원, 이덕연, 이동귀, 이삼열, 이상길, 이원용, 이윤석, 이윤영, 이재원, 이종수(법전원), 이지현, 이진호, 이태정, 이태호, 이한주, 이희경, 장원섭, 전광민, 전수진, 전지연, 전현식, 정석환, 정애리, 정의철, 정종락, 정종열, 정종훈, 정희모, Jen Hui Bon Hoa, 조문영, 조용수, 조재국, 조현수, John M. Frankl, Joseph Hwang, 차혜원, 최건영, 최우영, 최윤오, 최종건, 최종철, 최준호, Carl Sobocinski, Krys Lee, Tae Lee, Terence Murphy, Pearl Kim Pang, Paul Tonks, 하연섭, Hans Schattle, 한균희, 한승헌, 한웅, 허대식, 현승준, 홍길표, 황금중 (외국인교수 15명을 포함한 총 13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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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우근 칼럼] 승무원은 마지막이야!

[중앙일보] 입력 2014.04.28 00:10 / 수정 2014.04.28 00:10
이우근
법무법인 충정 대표
꽃이 바람에 진다. 채 피기도 전에 여린 꽃잎들이 허공에 흩날린다. 봄꽃처럼 싱그러운 열일곱 살 안팎의 고등학생 등 백수십 명이 봄바람에 꽃잎 지듯 바닷속으로 떨어졌다. 엘리엇의 ‘황무지’가 아니더라도 4월은 우리에게 잔인한 달이다. 독재에 항거하다 희생된 4·19의 영령들 때문만이 아니다.

 1970년 4월 8일 와우아파트가 무너져 34명이 목숨을 잃었다. 1995년 4월 28일 대구 지하철 공사장에서 도시가스의 폭발로 101명이 희생됐다. 토목건축이나 위험물 관리에 관한 입법적·행정적 체계가 완비되지 않은 상황에서 조급하게 땅부터 파헤친 안전의식 결여가 원인이었다.

 그리고 2014년 4월 16일 아침의 진도 앞바다, 수학여행에 나선 고등학생 등 470여 명을 태우고 제주로 향하던 세월호가 물살 거센 맹골수도에서 좌초할 무렵, 25세의 신참 3등 항해사에게 조타실을 맡긴 대리 선장은 침실 안에 있었다. ‘움직이지 말라’는 안내방송으로 승객들의 발이 객실에 묶여 있는 동안 선장과 기관사 등 선박직 선원들은 승객 몰래 전용 통로로 배를 빠져나와 맨 먼저 구조선에 올랐다.

 그렇게 살아나온 선장이 한가롭게 젖은 돈이나 말리고 앉아 있을 때, 스물두 살의 임시직 승무원 박지영씨는 학생들에게 구명조끼를 입혀주고 대피시키느라 동분서주하다가 목숨을 잃었다. “언니는 왜 구명조끼 안 입어요?” 학생의 물음에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다. “승무원은 마지막이야.” 선장도, 항해사도 헌신짝처럼 내던진 책임윤리·직업윤리·생명윤리가 아르바이트 여대생의 입에서 울려 퍼졌다.

 그 절체절명의 재난 현장에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 대한민국은 존재하지 않았다. 때마다 애국가를 부르고 태극기 앞에 머리를 조아리던 어린 학생들은 가라앉는 배 안에서 조국의 손길을 애타게 기다리다가 분노와 절망의 마지막 숨을 품고 바닷속으로 잠겼을 것이다. 대한민국의 생명윤리도, 우리 사회의 책임윤리·직업윤리도 함께 바다에 잠겼다. 행정안전부의 간판을 굳이 안전행정부로 바꿔 달면서 국민의 안전이 최우선이라고 외치던 이 정부 아닌가.

 간판을 바꾼다고 내실이 채워지는 것은 아니다. 안전의 내실이란 정신적으로는 책임의식의 확립, 실제적으로는 치밀한 안전관리 시스템과 체질화된 훈련이다. 그 치열한 노력이 있었던가. “다시는 불행한 사고가 재발하지 않도록 만전을 기하겠다.” 얼마나 많이 들어온 공염불인가. 몇 명 감옥 가고, 몇 명 물러나고, 결의대회 몇 번 하면 그만이었다. 책임지고 물러난다? 거짓말이다. 물러나는 것이 무슨 책임인가. 책임을 다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무책임 때문에 물러나야 하는 것이다.

 여동생에게 구명조끼를 입혀주고 실종된 여섯 살배기 오빠, 친구에게 구명조끼를 양보하고 숨진 고등학생, 첫 제자들을 살려내고 배와 함께 물에 잠긴 새내기 여교사, 기우는 배의 난간에 매달려 제자들에게 구명조끼를 던져주던 담임교사,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는 바다에 뛰어들어 구조에 힘을 쏟던 이름 없는 잠수대원, 이들의 희생과 헌신은 어둠 속 한줄기 섬광처럼 빛났다. 그런가 하면 비탄의 울음바다에서 무슨 사진이나 찍으려다 쫓겨난 정·관계 사람들의 처신은 얼마나 누추한가. 구조 현장의 지리멸렬한 지휘체계, 필수 인력과 장비의 늑장 투입, 재난 전문가가 배제된 재난대책본부의 관료주의…, 온 국민의 마음이 까맣게 타들어갔다.

 누가 ‘선진국의 문턱’ 운운하는가. 배 한 척 침몰해도 이렇듯 공황상태에 빠지는 터에 동시다발 테러가 발생하면 어찌할 것인가. 안전관리가 엉망인 곳이 여객선 하나뿐일까. 우리 사회 각 부문의 책임의식이 혁명적으로 쇄신되지 않는 한 선진화의 길은 아득히 멀다. 재난 관련 법안들을 무더기로 방치한 채 오로지 정파 싸움에만 몰두해 온 정치권, 몸 사리기에 급급한 관료들에게 쇄신을 기대하기에는 너무 지쳤다. 공직사회보다 역량이 뛰어난 민간에 기대할 수밖에 없다. 기업·공장·학교·병원·공연시설과 사회·종교단체들이 미흡한 여건에서나마 최적의 재난 대응 시스템을 스스로 갖춰나가면 무책임한 관료와 정치권도 마지못해 뒤따라오지 않겠는가.

 4월은 잔인한 달이지만 부활절의 계절이기도 하다. 다 피지 못하고 서럽게 진 우리의 꽃다운 넋들이 안식의 영혼으로 부활하기를 기원한다. 생명이 다하기까지 제자리를 지킨 박지영씨의 빈소에는 ‘대한민국 국민’의 이름으로 바친 조화가 놓여 있었다. 유언 같은 그녀의 마지막 한마디가 총체적으로 무너진 대한민국의 생명윤리를, 우리 사회의 책임윤리와 직업윤리를 일깨우고 있다.

 “승무원은 마지막이야!”

이우근 법무법인 충정 대표 


[참고자료]

중앙일보 2014.4.28일자

http://joongang.joins.com/article/094/14548094.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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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호의 시시각각] "세월호 진짜 살인범은 따로 있다"

[온라인 중앙일보] 입력 2014.04.30 00:02
이철호
수석논설위원
지난 주말 대형선박 선장을 거친 뒤 선주(船主)로 변신한 두 분을 만났다. 세월호 참사가 하도 기가 막히고 원인이 궁금해서다. 침통한 표정의 두 사람 이야기는 똑같았다.

 -사고 원인이 무엇이라 보는가.

 “배를 아는 사람은 침몰 영상에 담긴 비밀을 다 안다. 첫째, 배는 대개 밑바닥이 해저에 닿아 가라앉는다. 세월호는 뒤집어진 채 침몰했다. 배 윗부분이 더 무거웠다는 뜻이다. 둘째, 가장 끔찍한 건 선수 밑 부분이 이틀간 물 위에 떠 있던 장면이다. 일반인은 에어 포켓이라 희망을 걸었지만 진실은 정반대다. 그곳은 뱃사람들이 생명수라 부르는 평형수가 들어있어야 할 곳이다. 그곳에 공기가 들어찼으니 뜬 것이다. 평형수가 턱없이 부족해 복원력을 상실했다는 증거다.”

 -그런 위험을 외부에서 눈치챌 수 있나.

 “모든 선박은 선수와 선미에 만재흘수선이 표시돼 있다. 화물 과적으로 이게 물에 잠기면 출항 금지다. 사고가 나면 고의적 범죄로 간주돼 보험금조차 못 받는다. 원래 화물과 평형수는 1등 항해사가 맡는다. 선장이 출항 전에 반드시 체크하는 게 GM(무게중심과 경심과의 거리: 화물량과 평형수에 따라 달라짐)이다. 이게 기준보다 작으면 출항을 거부하고, 선주도 꼼짝없이 받아들이는 게 바다의 법칙이다. 다만 선장과 1등 항해사가 짜고 화물 과적량만큼 평형수를 적게 넣으면 만재흘수선은 물 위에 나오게 된다. 이런 꼼수로 GM이 무너진 채 바다로 나가는 것은 죽음의 항해나 다름없다.”

 -25세 3등 항해사와 조타수의 급변침이 원인으로 지목되는데.

 “뱃사람의 눈에는 그들은 큰 죄가 없다. 변침이 주범은 아니다. 복원력을 상실하면 빙판에서 자동차를 모는 거나 같다. 세월호는 군산 앞바다부터 기울었다는 증언이 있다. 저녁에 샤워하고 아침 식사 준비로 배 밑의 식수가 줄었을 것이다. 운항 과정에서 배 밑의 기름도 소모했다. 가뜩이나 부족한 평형수가 더 줄어든 셈이다.”

 -화물 고박이 허술했다는데.

 “처음 기울어졌을 때는 화물이 쏠려 위험을 증폭시켰을 것이다. 하지만 45도 이상 기울어진 뒤에는 상식과 정반대다. 오히려 밧줄이 풀려 무거운 컨테이너가 바다로 미끄러져 빠진 게 다행이다. 쇠사슬로 단단히 고박됐으면 순식간에 뒤집어져 174명이 탈출할 기회조차 없었을 것이다.”

 -진짜 범인은 누구인가.

 “비밀의 열쇠는 선장과 1등 항해사가 쥐고 있다. 평형수 펌프를 맡는 기관장도 비밀을 알 수 있는 위치다. 하지만 진짜 살인범은 배 위가 아니라 육지에 숨어 있다. 인천항에서 화물을 과적하고, 만재흘수선을 눈속임하기 위해 평형수에 손을 댄 인물이다. 세월호는 규정보다 화물을 2000t 더 실어 운송비 8000만원을 추가로 챙겼다. 배는 모르면서 돈만 밝힌 인물이 진짜 살인범이다.”

 -탑승객들에게 “선실에 그대로 있어라”라고 했는데.

 “작은 배는 승객이 한쪽에 몰리면 전복된다. 하지만 세월호처럼 큰 배는 다르다. 탑승객 무게를 다 합쳐도 50t짜리 컨테이너 하나에 못 미친다. 무조건 구명조끼 입히고 갑판으로 내보내야 한다. 과연 세월호 선장이 정말 선장인지도 의문이다. 사고 직후 브리지에서 청해진 본사와 직접 교신한 인물이 숨은 실세일 것이다.”

 -정부의 구조대책이 비판받고 있다.

 “구조 순서부터 뒤죽박죽이다. 세계 해운업계가 놀라는 대목은 사고 해역에 대형 크레인이 하릴없이 서 있는 장면이다. 이탈리아 콩코르디아호도 인양 준비에 6개월, 완전 인양까지 20개월이 걸렸다. 값비싼 리스비를 들이며 대형 크레인이 미리 올 필요가 없다.”

 -어떻게 수습해야 하나.

 “총리나 장관은 바다를 모른다. 현장 보고를 학습하기도 벅찰 것이다. 현장 전문가에게 사령탑을 맡겨야 한다. 9·11 테러엔 뉴욕소방서장이 현장을 장악했고, 빈 라덴 제거 작전에는 대통령·국무·국방장관을 제치고 미 합동특수전 공군준장이 상황을 지휘했다.”

이철호 수석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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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수대] 한국과 일본에서 들린 '천사의 목소리'

[중앙일보] 입력 2014.04.22 00:10
그도 견디기 힘들 만큼 두려웠을 것이다. 스물둘, 대학을 휴학하고 승객 안내를 담당하는 승무원으로 배를 탄 지는 겨우 1년 반이었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사고에도 의연했다. 당황한 학생들에게 3~4층을 오가며 구명조끼를 나눠주고, “언니는요?”라는 학생들의 조급한 외침에는 이렇게 답했다. “선원은 맨 마지막이야. 너희들 구하고 나는 나중에 나갈게.” 세월호 침몰 사고에서 끝까지 승객들을 돕다 목숨을 잃은 승무원 박지영(22)씨 이야기다.

 또 하나의 인물이 겹쳐진다. 3년 전 3·11 동일본 대지진 당시 일본 미야기(宮城)현의 어촌마을 미나미산리쿠(南三陸) 동사무소 직원이었던 엔도 미키(遠藤未希)다. 당시 나이 24세. 결혼 8개월차 새댁이었다. 리히터 규모 9.0의 대지진이 일본 동북부를 강타한 오후 2시46분 위기를 감지한 그는 2층의 방송실로 뛰어들어 마이크를 잡았다. “높이 6m의 큰 쓰나미(지진해일)가 오고 있습니다. 즉시 고지대로 대피해 주세요. 해안 근처에는 절대 다가가지 마세요.” 쓰나미가 육지까지 집어삼키는 데 걸린 시간은 30여 분, 그의 목소리는 계속해서 마을 전체에 울려퍼졌다. 그 다급한 외침을 들은 7000여 명의 마을 사람이 고지대로 대피해 목숨을 건졌다. 결국 건물을 덮친 쓰나미에 쓸려간 그는 사고 발생 후 한 달이 넘어서야 싸늘한 주검으로 고향 바닷가로 돌아온다.

 지난주 세월호 사고 발생 이후 두 사람 생각을 떨칠 수 없다. 둘 다 베테랑이라기엔 젊은 나이였다. 자신이 일상적으로 수행하던 그 업무가 이토록 위험천만할 수 있다는 것을 그들은 알고 있었을까. 꿈에서도 상상해본 적 없는 위기가 눈앞에 닥친 순간, 내가 할 수 있는 일, 해야 하는 일만 생각하며 굳건히 자리를 지키게 만든 그 힘은 어디서 나왔을까. 나라면, 나였다면 그럴 수 있었을까 싶어서다.

 숭고(崇高)한 이들의 죽음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일본인들은 대지진 후 3년이 흐른 지금도 ‘천사의 목소리’라는 이름으로 엔도 미키를 기억한다. 그가 마이크를 부여잡고 목숨을 잃은 현장에는 추모의 발길이 이어지고, 초·중·고등학교 도덕 교과서에는 죽음으로 의무를 다한 그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우리도 아주 오랫동안 세월호를 끝까지 지킨 이 젊은 승무원의 이름을 기억했으면 한다. 일상이기에 쉽게 잊어버리고 마는, 내가 하고 있는 이 일의 무겁고도 엄중한 책임을 되새기게 해주는 이 ‘천사’를 말이다.

이영희 문화스포츠부문 기자


[참고자료]

중앙일보 2014.4.22

http://joongang.joins.com/article/181/14504181.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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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에 대한 열풍이 가실 줄 모르고 있다. 그래서일까, 지금 왜 인문학에 대한 갈망이 그렇게 강해졌는지 물어보는 사람들이 매우 많다. 이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나는 웃음을 머금고 대답하곤 한다. 20대 초반, 혹은 대학생이었을 때의 지성과 감성을 회복하려는 무의식적인 행동 아니겠느냐고. 한마디로 지금처럼 속물이지 않았을 때의 지성과 감성을 안타깝게 그리워하는 것, 달리 말한다면 계속 속물로 타락하는 것에 대한 공포가 아니라면, 30대에서부터 50대까지의 내면을 지배하는 인문학 열풍은 전혀 이해될 수조차 없을 것이다.

 

속물은 모든 것을 이해관계로 재단하고 거기에 따라 행동하는 사람이다. 돌아보라! 회사 초년병에서부터 정치가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속물이 많은가. 이런 경향은 이해, 즉 이득과 손해를 유일한 가치 평가 기준으로 밀어붙이는 자본주의 체제에 의해 더 강화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일까, 이해에 밝은 사람이 현명한 사람이라고 인정되는 기묘한 편견이 삶의 진실이라도 되는양 횡행하고 있기까지 한다. 그 결과 아름다움과 추함, 진실과 허위, 사랑과 미움, 아니면 정의와 부정의 등 다른 가치는 모욕받고 멸시된다.


속물은 전세 대신 월세를 받는 것이 현명한 판단이라고 당당히 읊조리지만, 그 결과 세입자들의 삶이 얼마나 궁핍해지는지 고민하지는 않는다. 속물은 학연과 지연을 자신이 가진 당연한 자산이라고 떠벌리지만, 그것이 다수 사람들에게 엄청난 피해의식을 안겨준다는 걸 느끼려고 하지 않는다. 속물은 자식을 위해 노력하며 그걸 사랑이라고 믿지만, 아이를 위해서라기보다는 자신의 삶을 아름답게 치장하려는 자기 사랑이라는 걸 죽어도 인정하지 않는다. 속물은 자신의 기득권을 강화하기 위해 정치적 목소리에 핏대를 세우지만, 이웃들과 후손들의 삶에는 기꺼이 눈을 감아버리고 만다.


사사로운 이해관계를 넘어서지 않는다면, 아름다움, 진실, 사랑 그리고 정의라는 가치는 항상 문화 콘텐츠나 혹은 자신을 미화하는 화장품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한류니 창조경제니 하는 사생아적 개념의 탄생, 혹은 인문학적 가치들에 대한 모독은 바로 이럴 때 이루어진다. 그렇지만 돌아보라! 대학시절 우리는 어떤 가치를 품고 살았는지. 이익보다는 아름다움, 진실, 사랑, 그리고 정의를 추구하지 않았는가. 이익만을 추구하는 동료나 기성 세대들을 조롱하지 않았는가. 인문학은 속물로 살지 않겠다는, 혹은 사적인 이해를 초월하겠다는 의지가 아니라면 아무런 가치도 없는 것이다.


여기서 잠시 키에르케고르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보자. <인생행로의 여러 단계(Stadier paa Livets vei)>에 등장하는 내용이다. 엄청난 노력으로 보석을 정확히 감별할 수 있는 경지에 오른 보석상이 있었다고 한다. 어느날 그는 보석인지, 흔한 돌인지 구별하지 않고 행복하게 놀고 있는 어떤 꼬맹이를 보고 경악하게 된다. 이에 대해 키에르케고르는 말하고 있다. “아마도 그 보석상은 귀한 것과 흔한 것이란 절대적인 구분이 무의미해지는 광경을 보고 경악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런 구분 없이 돌을 가지고 행복하게 노는 아이를 볼 때, 그는 자신이 천박하다고 느끼며 이 경악스러운 광경에 빠져들게 될 것이다.”


키에르케고르의 보석상은 그래도 행복한 사람이다. 귀한 돌인지 아니면 흔한 돌인지가 중요하지 않게 되면, 그는 직업을 잃을 것이다. 보석상이란 직업을 얻기 위해 그가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을 기울였는지 생각해보라. 그렇지만 그는 자신의 개인적 이해관계보다는 어느 아이의 행복에 몰입할 수 있는 감수성은 아직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아니 정확히 말해 보석상은 지금껏 망각하고 있던 행복을 되찾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보석상이 되기 전, 그도 분명 어린아이일 때가 있었을 것이고, 당시 그도 지금 보고 있는 아이처럼 행복을 만끽할 때가 있었을 것이다.


만일 그가 오로지 이해관계에 빠져버린 철저한 속물이 되어버렸다면, 그는 아이의 행복한 놀이를 무시했을 것이다. 어쩌면 그는 아이에게 진지한 얼굴로 가르침을 전해주려고 했을지도 모른다. “이 돌은 비싼 거니, 남에게 주지 말아라. 그리고 네가 들고 있는 그 예쁜 돌은 흔한 돌이니 아무한테나 줘도 된다.” 아마 아이는 무슨 소리를 하느냐는 듯 보석상을 쳐다보게 될 테지만. 불행히도 구제불능의 속물에다가 허영심의 노예였다면, 그는 아이를 야단쳐서 돌들의 가치를 강제로 주입하고는 아이의 행복을 산산이 짓밟아버릴 것이다. 행복에 젖은 채 놀이에 몰입하는 아이를 보면서, 아니 속물로 변해버린 자신을 반성하면서, 키에르케고르의 보석상의 삶은 근본적으로 변하게 될 것이다. 그렇지만 이런 보석상과 같은 어른을 발견하기는 너무나 힘든 일이다.


인문학적 감수성이 있는 사람은 자신과 같은 그런 사람을 만들 것이고, 속물은 자기와 같은 속물을 만들 것이다. 지금 학교는 속물 양산의 기계로 변한 지 오래다. 부모도, 선생도, 그리고 사회도 한 목소리로 이익이라는 자본주의 가치를 우리 아이들에게 강요하고 있다. 심지어 지성의 산실이라는 대학도 여기서 예외는 아니다. 독립적이기 힘들었던 중·고등학교 시절, 외부에서 강요된 가치를 거부한다는 건 수월한 일은 아니다. 그렇지만 대학시절에서마저 이익과 해로움만이 유일한 가치 기준이라는 걸 수용한다면, 우리 젊은이들에게 행복은 그만큼 멀어지게 될 것이다. 이익 이외에, 아름다움, 진실, 사랑 그리고 정의라는 더 숭고한 가치가 있다는 걸 배울 수 있는 제도적으로 주어진 거의 유일한 기회를 놓지 말고 꽉 잡아야 한다.


아무리 속물이 되어버린 선배들이 대학교를 이익이나 따지는 보석상 양성소로 만들었다고 하더라도, 여기에 굴복해서는 안된다. 대학생은 자신들의 행복을 위해서, 그리고 기성세대들이 자신이 속물이라는 사실을 자각하도록 만들기 위해서, 이익 이외에 다른 숭고한 가치가 있다는 걸 삶으로 그리고 열정으로 보여주어야 한다. 아름다움에 젖어들고, 진실을 숙고하고, 사랑에 온몸을 던지며, 정의를 뜨겁게 외치는 젊은이가 적어질수록 우리 미래는 어려울 것이다. 새로운 시작을 축하하기는커녕 무거운 짐을 지도록 하는 어느 선배의 노파심을 이해주기를. 14학번 파이팅!


[참고자료]

경향신문,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403022029565&code=990100&nv=st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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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 2035] 마오보단 연아가 됐어야

[중앙일보] 입력 2014.02.24 00:01
고백한다. 나는 줄곧 연아보단 마오에게 마음이 갔다. 타고난 긴 팔다리와 강한 체력, 멈추지 않는 훈련까지. 어린 나이에 세계를 제패한 김연아 선수는 ‘별에서 온 그대’처럼 너무 완벽해 보였다. 그래서 동경했지만 사랑하진 못했다.

 아사다 마오 선수는 좀 달랐다. 가끔씩 그녀에게서 그 시절의 내 모습이 보였다. 취업을 하겠다는 목표는 분명한데 결과는 참혹했던 스무 살 초반의 때다. 시험장에만 들어서면 그녀처럼 몸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꼭 붙어야 한다. 이겨야 한다”는 생각에 웃음도 잦아들었다.

 전략도 마오와 비슷했다. 마오는 연아를 꺾을 유일한 카드인 트리플 악셀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부끄럽게도 나의 ‘트리플 악셀’은 토익 900점이었다. 그걸로 토익 800점대에 몰린 경쟁자들을 물리칠 수 있다고 착각했다. 결국 토익 점수 말고는 내세울 게 없는 사람이 됐다.

 실패했을 땐 뒤끝도 길었다. “한석봉은 붓을 탓하지 않는다”고 했건만 나는 벼루와 먹까지 내가 가진 모든 걸 탓했다. 난처한 질문을 던진 면접관, 내 대답을 가로챈 다른 응시자를 곱씹으며 미워했다. 피해야 할 징크스는 갈수록 늘어 갔다. 세상에서 내가 제일 불행하다고 믿었다. 무슨 세상이 이렇게 힘겨운가 싶었다.

 마오보단 연아가 됐어야 했다. 모두가 뒤끝을 보이고 있는 지금도 김연아 선수는 “노력한 만큼 보여줘 후회는 없다”고 말하고 있지 않은가. 그녀뿐만이 아니다. 박승희 선수도 여자 500m 쇼트트랙 결승에서 넘어져 동메달을 목에 걸고도 “괜찮다. 기여할 수 있어 행복하다”고 말했다. 스포츠 여왕들의 강한 정신력을 배웠다면 내 도전의 과정도 결과도 조금 더 행복하지 않았을까.

 그러고 보니 사람들이 열광하는 여왕이 한 명 더 생각났다. 애니메이션 ‘겨울 왕국’의 주인공 엘사. 그녀도 같은 말을 한다. “사람들이 뭐라고 하건 상관없어. 다시는 울지 않을 거야. 난 자유로워. 다 잊어(Let it go).” 남들이 정한 목표에서 자유로워진 ‘멘털 갑(甲)’ 여성들의 인기와 승리가 반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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