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정일의 人 + 文] 인문학 사유의 네가지 책임
ysl* 컨텐츠/그한마디 / 2010. 12. 20. 12:36
인간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하면 인간을 이해할 수 있을까? 옛날 페르시아의 한 왕자는 자기가 장차 나라를 잘 다스리자면 인간을 잘 알아야 한다 생각하고 전국의 학자들을 불러 인간 이해의 방법을 마련해오라고 당부한다. 20년이 지나 학자들은 낙타 스무 마리에 책 2000권을 싣고 나타난다. “너무 많다. 줄여오라.” 또 10년이 지난다. 그 사이 왕자는 왕이 되어 있고 학자들은 낙타 세 마리에 책 500권을 실어 왕에게 대령한다. “이것도 너무 많다. 더 줄여라.” 다시 몇 년이 흐른 뒤 이번에는 나귀 한 마리에 책 100권 등짐을 지운 학자들이 나타난다. 왕은 이미 늙고 병들어 임종의 침상에 누워 있다. 왕은 탄식하며 말한다. “인간을 아는 일이 그렇게도 어려운가? 죽는 순간까지도 나는 인간을 알 수 없단 말이냐?” 그러자 학자 하나가 왕에게 귓속말로 일러준다. “폐하, 사실은 단 한 줄이면 됩니다. 인간은 태어나서 살다가 죽습니다. 그게 인간입니다.”
인간의 한 생애가 ‘태어난다, 산다, 죽는다’는 단 세 개의 동사로 요약될 수 있다는 것은 그리 기분 나쁜 일은 아니다. 인간은 누구나 죽음 앞에 평등하듯 그 세 개의 동사 앞에서 평등하다. 인간만이 아니다. 태어난다, 산다, 죽는다는 것은 모든 생명 가진 것들에 공통으로 적용되는 생물학적 전기(傳記)다. 그 전기는 생명체 공통의 것이라는 점에서 평범하고 평등하며 위대하다. 인간이 그 전기로부터 제외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인간의 코빼기에서 자만심을 뽑아내고 그를 낮은 곳으로 임하게 하는 효력을 갖고 있다.
그 러나 인간과 그의 삶에 대한 사유행위로서의 인문학은 “태어나서 살다가 죽는다”의 생물학적 전기를 거부하는 데서 출발한다. 인간이 잘 나서가 아니라 인간이 자기 존재와 삶의 방식에 대해 지고 있는 ‘책임’을 생각하고 따지는 것이 인문학의 중요한 한 과제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누구나 태어나 살다가 죽는다. 하지만 여기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살다가’라는 부분이다.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 인간의 전기는 천차만별로 달라진다. 어떤 사람은 인간으로 태어나 개처럼 죽고, 어떤 사람은 개처럼 태어나 인간처럼 죽는다. 삶의 방식이 각기 달랐기 때문이다. 철학자 볼테르는 생전에 자기 묘비명을 써놓고 죽은 사람이다. “친구를 사랑하 고 적을 미워하며 죽노라”는 것이 그의 자작 묘비명이다. 이 비명은 그가 어떻게 살고 왜 살았는가를 요약한다. 그것은 생물학적 보편 전기와는 다르다. 사마천은 자신이 왜 ‘사기’를 쓰게 되었는가를 밝힌 글 ‘임안에게 보내는 편지(報任安書)’에서 “사람은 누구나 한 번 죽지만 어떤 죽음은 태산보다 무겁고 어떤 죽음은 새털보다 가볍다”는 구절을 남긴다. 죽음의 차이에 관한 언명치고 동서고금에 이보다 더 빛난 표현이 없을지 모른다. 죽음의 차이는 사실은 삶의 차이, 어떻게 살았는가의 차이에 좌우된다.
넓 게 규정했을 때 인문학은 인간에 관한 사유, 표현, 실천의 총합이다. 이 의미의 인문학은 강단 인문학 혹은 학문으로서의 인문학과는 좀 구별될 필요가 있다. 학문으로서의 인문학은 서구 근대의 산물인 반면, 인간에 관한 사유, 표현, 실천으로서의 인문학은 동서양에 걸쳐 오랜 역사를 갖고 있다. 우리가 보통 인문학이라 부르는 것은 문학, 철학, 역사, 예술사, 서지학 같은 근대 이후의 학문 분과들을 지칭하기도 하지만 사실은 인간이 인간을 이해하고 인간을 생각하고 인간의 길을 모색해온 동서고금의 오랜 사유전통을 더 많이 의미한다. 이런 인문학은 전문 연구자만의 것이 아니고 전공자만이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 인문학은 만인의 것이다. 강단 인문학의 경우처럼 학문으로서의 인문학을 연구하는 것과 인문적 가치를 실천하는 것으로서의 인문학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인문학을 학문으로 공부하는 사람에게는 자기 전공 분야의 인문학 갈래를 연구하는 것이 주 과제다. 그는 ‘인간의 책임’을 생각하는 것이 인문학의 기본정신이라는 관점을 꼭 가져야 할 필요가 없다. 그런 정신없이도 강단 인문학은 가능하기 때문이다.
내 가 이 칼럼에서 진행해보고 싶은 것은 강단 인문학적 작업이 아니다. 나의 관심은 인간에 관한 사유와 실천으로서의 인문학이 중시해야 할 네 가지 책임의 문제에 관한 것이다. 인간에 대한 인간의 책임, 사회에 대한 인간의 책임, 역사에 대한 인간의 책임, 문명에 대한 인간의 책임이 그것이다. 다시 강조하지만 내가 말하는 인문학은 전문 연구자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또 내가 말하는 인문학은 교양주의자들이 생각하듯 예술과 문화 등등에 대한 무슨 고급 교양이니 소양이니 하는 것들을 스펙 쌓듯 쌓아나가는 것을 능사로 삼지 않는다. 인문학에 관한 이런 종류의 ‘교양론’은 이미 오랜 타락의 전력을 갖고 있다.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인문학은 단순 장식물도 액세서리도 아니다. 또 일부 실용주의자들이 착각하듯 무용한 백수의 사업인 것도 아니다. 이 종류의 실용주의 역시 사유의 정지를 특징으로 하는 이 시대의 정신적 마비와 타락을 반영한다.
이 칼럼은 위에 말한 네 가지 책임의 문제를 달팽이 북한산 오르듯 능력의 한도 안에서 가능한 한 천천히 생각해보자는 구도를 갖고 있다. 우선 ‘인간에 대한 인간의 책임’이라는 부분에서는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것이 핵심 질문으로 등장한다. 이 질문이 다음 칼럼의 주제다.
도정일은
문학평론가. 경희대 영어학부 명예교수.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설립위원장. 책읽는사회문화재단 이사장. 저서 ‘시인은 숲으로 가지 못한다’ ‘대담’ ‘시장전체주의와 문명의 야만’ 등.
[참고자료]
쿠키뉴스. 국민일보 2010.12.
http://news.kukinews.com/article/view.asp?page=1&gCode=kmi&arcid=0004441388&cp=n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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