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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대통령이 이번 8․15광복절 경축사에서 ‘공정사회’라는 정치적 어젠다를 내놓은 이래 공정사회는 공동체의 지배적 화두가 되었다. 단순한 정치적 구호를 넘어 시대적 요청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추세다. 왜 공정사회가 정치권은 물론 국민들사이에 초미의 관심사가 되고 있는 것일까. 총리·장관 후보자 낙마와 외교부의 특채파동이 겹치면서 지도층의 부정과 불공정을 가늠하는 엄한 잣대로 대두된 것이 직접적 이유다. 하지만 이것은 상황논리에 불과할 뿐, 근본적인 이유라고는 할 수 없다. 이미 ‘신국론’을 쓴 아우구스티누스도 말하지 않았던가. “정의가 없다면 국가도 강도집단과 다를 바 없다(remota justitia, quid sunt regna nisi magna latrocinia?)”고. 이처럼 자명할 정도로 중요한 공정의 가치가 새삼 커다란 사회적 반향을 불러일으킨 것은 그만큼 우리 사회가 공정하지 못했다는 반증이다.

과거의 화두가 “우리도 한번 잘 살아보세”였다면, 지금의 화두는 누가 뭐래도 “우리도 한번 공평하게 살아보세”다.
당연히 공정은 공동체라는 배가 항해하면서 방향을 잡는데 기준으로 삼아야할 ‘북극성’과 같은 가치다. 하지만, 그 ‘공정’을 실천하는데 각별히 유의해야할 사항이 있다. 그것은 칼이나 불이 인간생활에 아무리 유익하다고 해도 그들을 사용하는데 분별력과 신중함이 요구되는 이치와 같다.

첫째, 공정성은 한 공동체의 지속가능성을 위해 구성원 모두가 공유해야할 규범이지만, 권력층과 지도층이 제일 먼저 준수해야할 행동규범이다. 불공정은 권력과 재력을 가진 사람이 부조리한 방식으로 이익을 추구할 때 생긴다. 이것은 이미 플라톤의 ‘국가’에서 트라시마쿠스가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라고 했을 때 반어법으로 설파한 내용이다. 바로 이점이 공정이 일차적으로는 국민에게 요구할 행동규범이 아니라 권력층과 지도층이 우선적으로 지켜야할 도덕률이 되는 이유다. 권력층부터 솔선수범하지 않으면 공정사회는 무의미해지기에 권력주도세력의 ‘자기 채찍질’은 반드시 선행되어야한다.

둘째, 공정사회는 약자와 빈자를 배려하는 사회다. 고단한 삶을 살아가는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는 공정사회의 도덕적 매력은 자명하다. 서민들이 내쉬는 한숨소리에는 사람들의 공감을 이끌어내는 ‘도덕적 호소력’이 배어있지 않은가. 하지만 공정사회 추진에는 대전제가 있다. 잘사는 사람과 대립각을 세우는 식으로 접근해서는 안된다는 점이다. 물론 잘사는 사람과 못사는 사람을 ‘상생’이 아닌 ‘상극’의 존재로 접근한 경우도 없는 것은 아니다. 일찍이 임꺽정이나 일지매는 부자들 로부터 재물을 빼앗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줌으로써 박수를 받았고 ‘의적(義賊)’으로 불리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의적 이야기는 다수인들의 삶 자체가 절대빈곤으로 점철되었던 ‘헝그리 시절’의 신화일 뿐, 공정사회의 지향점이 될 수는 없다.
공정사회가 성공하려면 잘사는 사람과 못사는 사람을 20 대 80이나 2 대 98, 1 대 99의 ‘적대적 범주’로 나눌 것이 아니라 꽃과 나비처럼 ‘공생관계’라는 데서 출발해야한다. ‘부자아빠’가 있기 때문에 ‘가난한 아빠’가 생긴다는 ‘제로섬(zero-sum)’ 논리보다는 ‘부자아빠’가 있기 때문에 ‘가난한 아빠’가 노력할만한 이유와 동기가 생긴다는 ‘포지티브섬(positive sum)’ 논리가 공정사회의 기조가 되어야 한다는 의미다.  ‘기득권자’와 ‘비기득권자’로 나누면서 분열을 부추기며 ‘있는 자’와 ‘없는 자’의 대결구도를 이용한 ‘포퓰리즘’을 구사하기보다는 통합을 지향하는 구도로 나아가는 것이 공정사회의 철학이기 때문이다.

셋째, 공정사회는 경쟁을 공정하게 만드는 사회지 경쟁을 폐지하거나 다른 것 - 예를 들면 추첨제 - 으로 대체하는 사회는 아니다. 경쟁은 양질의 공정사회를 만드는데 필요하다. 하이에크(F. A. Hayek)는 경쟁이 없으면 개인은 자신이 가진 능력을 최대한 개발하거나 발휘하려고 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개인이 자신이 가진 잠재력을 최대한 발휘하지 않으면, 공동체는 그 질이 하락할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공정사회는 경쟁의 철학을 폐기하기보다 활성화시켜야 한다.
모든 차들이 일차선 도로로만 주행해야 한다면, 특별한 운전기술을 갈고 닦을 필요가 없다. 보통 속도로 가는 주행선도 있고 빠른 속도도 가능한 추월선이 있어야 열심히 운전을 배우는 사람이 생긴다. 더 빨리 가고, 더 기분 좋게 달리기 위해서 말이다. 주행선과 추월선이 공존하는 사회를 만들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모든 차가 일차선으로만 달려야 한다면, 운전자들은 평등하다는 느낌을 받기보다 짜증을 낼 가능성이 크다. 특히 능숙하고 실력있는 운전자들의 불만이 커질 것이다. 빨리 달리고 싶은 욕구와 빼어난 운전솜씨를 발휘할 방법이 전무하여 앞차와 부딪히는 사고도 빈번하게 발생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추월선을 마련하면 능력있는 운전자는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다. 천천히 달리는 차와 더 빨리 달리는 차가 충돌없이 평화롭게 공존하며 상생하는 길이 열리는 것이다.

넷째, 공정사회는 개인의 몫과 개인의 권리를 보장하는 사회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나’는 ‘나’의 권리를 가지고 있고 ‘너’는 ‘너’의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식으로 모든 인간관계를 가늠하려고 하는 사회는 아니다. 공정사회는 권리만을 중시하는 권리만능주의 사회와는 다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내 몫’이 훼손당했다며 권리를 요구하는 소리만 넘쳐나고, 법과 질서를 지키며 공동선을 위해 기여하는 등, 의무나 책임을 이행하는 문제가 사소한 범주로 밀려난다면, 공정은 제자리를 찾을 수 없다. 공정사회를 위해서는 ‘권리’에 대한 집착을 줄이고 ‘의무’와 ‘노블레스 오블리주’와 같은 ‘초과의무(supererogation)’에 대한 관심을 가져야한다. 바이블에 나오는 ‘착한 사마리아인’처럼 어려움을 당한 이웃을 돕는 것이 초과의무다. 그러므로 헌혈이나 고아입양은 의무는 아니지만 공정사회에 넘쳐흘러야 할 선행이다.
그동안 우리 사회의 권리주창자들은 ‘각자의 몫’을 설명하는데 노력해 왔지만,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공동의 몫’에 대한 설명에는 상대적으로 인색했다. 그 결과 ‘자신의 몫’만 챙기는 ‘깍쟁이’가 많아졌다.
그러나 공정사회가 사회적 관계로부터 차단된 개인을 전제로 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과 개인, 개인과 사회 간에 구현되어야할 ‘관계 지향적인 개념’임에 주목한다면, 권리만능주의는 사회적 관계로부터 자연적으로 발생되는 ‘공동의 몫’이 결여된 불충분한 비전이다.
바로 이것이 권리가 중요하지만 공정사회의 핵심적 화두가 될 수 없는 이유다. ‘각자의 몫’ 에는 개인이 향유할 수 있는 권리와 자기 이익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 구성원으로서 함께 나누어야할 ‘공동의 몫’도 있다는 사실에 유의할 때, 개인의 권리․이익과 더불어 그 역할을 수행할 책임과 의무 역시 포함될 때 공정사회가 된다.

다섯째, 공정사회가 재화의 공정한 분배를 보장하는 사회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재화의 분배에만 ‘집중’하는 사회는 아니다. 공동체의 구성원들을 경제적 인간, 즉 물질적 욕구의 대상으로만 치부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물질적 만족은 중요하다. 그러나 인간이 빵만으로 살 수 없듯이 공동체도 빵만으로 살아갈 수는 없다. 공정사회가 분배문제에만 매몰돼서는 안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도덕적이고 정신적인 문제를 외면하면 공동체는 비열함과 저급함만을 노정할 뿐이다.
공정사회가 물질적 복지에 치중하는 나머지 공동체의 영혼처 럼 다루어야할 지성과 품위, 덕목을 소홀히 한다면, 더 이상 공정사회가 아니다. 구성원들사이에 공유해야할 예의와 배려, 지혜는 물론, 국가공동체에 대한 헌신이나 열정도 풍부해야한다. 게다가 대한민국의 시민으로 살아간다는 사실이 왜 자랑스러운지를 말해주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공정사회는 “국가가 내게 무엇을 해줄 것인가” 하는 문제뿐만 아니라, “내가 국가를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도 물어야한다. 그렇지 않으면 공정사회는 기여와 헌신 보다는 각종 요구로 가득한 사회가 될 것이다.
일찍이 키케로는 공정성과 관련, “명예롭게 살고 남을 해하지 않으며 각자에게 그의 것을 주는(honeste vivere, non laedere alterum, suum cuique tribuere) 사회”라고 규정한 바 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공정성은 자신의 뼈를 깎고 자신의 살을 도려내는 ‘자기반성적 개념’이 되어야지, “조자룡 헌칼 휘두르듯” 타인을 비판하기 위한 ‘도덕적 무기’가 되어서는 안된다. 남의 눈의 ‘티끌’을 보기보다 자신의 눈의 ‘들보’를 보겠다는 정신, 바로 이것이 공정사회의 ‘알파’요, ‘오메가’다.

글/박효종 서울대 윤리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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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대한언론인회 <대한언론 10월호>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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