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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ank B. Gibney

ysl* 사람들 / 2007. 4. 16. 22:19

프랭크 B. 기브니(Frank B. Gibney 1924.9.21- 2006.4) 타임지 일본 특파원, 엔사이클로피디어 브리태니커 편집위원회 부위원장, 환태평양연구소 소장, 일본브리태니커회사 사장과 한국브리태니커회사 초대 사장을 역임했으며, 환태평양국가문제 전문가로 알려져 있다. 말년에는 포노마 대학의 정치학 교수를 역임하였다. 예일대학을 졸업하고 이차 대전 중 일본어 번역 관련일을 정부기관에서 하였다. (영화 굿 셰퍼드가 생각난다^^). 저서로〈얼어붙은 혁명 The Frozen Revolution〉(1959)·〈허술한 강대국 일본 Japan, The Fragile Superpower〉(1975)·〈태평양 시대 The Pacific Century〉(1992)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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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사 30주년 기념 특집 1-기념사

책과 함께 한 30년, 뉴미디어와 함께 할 미래 

한국브리태니커회사 창립 30주년을 맞은 이 자리에서 회사의 지난 30년을 회고하는 것은, 마치 때때로 들여다보던 손때 묻은 가족 사진첩을 넘기는 것과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지금 이런 얘기를 하는 까닭은, 회사가 창립된 이래 지금까지 이 회사를 위해 일했던 여러분들과 함께 할 수 있었던 것이 큰 행운이라고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고인이 된 한창기 씨와 제가 '한국브리태니커회사'라는 이름으로 회사를 설립한 것은 1968년이었습니다. 이때 회사를 일명 '브리태니커 200주년 기념회사'로 부르기로 했으며, 당시 브리태니커의 회장이던 고 윌리엄 벤튼 씨도 이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했습니다. 브리태니커의 공식적인 창립년도는 '신사들의 모임 Society of Gentlemen'(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을 만들기 위해 출자했던 사람들을 이렇게 불렀습니다)이 영국 스코틀랜드의 에든버러에서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Encyclopædia Britannica/EB〉의 기념비적인 첫 권을 발간했던 1768년이었는데, 시카고와 런던의 브리태니커 임원들은 동아시아 지역에 새 회사를 창립해 앵글로-아메리카 회사의 영역을 넓힘으로써 창립 200주년을 기념하는 것도 매우 뜻 깊은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외국에서 회사를 시작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일본에서 브리태니커회사를 성공적으로 창립한 선례가 있었던 것이 크게 도움이 되었습니다. 당시 일본브리태니커회사는 영어판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을 성공적으로 판매하고 있었고, 일본어판의 발간을 위해 편집계획을 세우고 있었습니다. 원래 영국 스코틀랜드 에든버러에서 시작된 브리태니커는 20세기초에 미국 회사가 이를 인수해 뉴욕으로 갔다가, 다시 시카고로 본사를 옮기기 시작해서, 당시는 편집진과 경영진 모두 시카고로 이전을 거의 마친 상태였습니다.


외국회사 설립에 대한 성공적인 선례가 있었지만, 시카고 본사의 임원들 가운데에는 미국 이외의 지역에 새로 브리태니커의 지사를 설립하는 문제에 대해 우려를 표시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따라서 본사 경영진은 한국브리태니커회사는 자체적으로 운영해야 한다, 즉 한국에서 운영자금을 조달할 수 있어야 한다는 방침을 정했습니다. 그때 한국에 설립될 회사를 지원하기 위해 미국 은행에서 융자금을 얻도록 결재했던 시카고 본사의 한 임원이 그 때문에 거의 해고될 뻔한 적도 있었습니다.


한국에서 회사를 시작하는 일 역시 본사 임원을 설득하는 일 못지 않게 힘든 일이었습니다. 당시 한국의 박정희 대통령은 외국회사가 한국에 들어오는 것을 그리 달가워하지 않았습니다. 회사를 시작하기까지 온갖 관료주의적인 장애물과 같은 험한 길을 헤쳐나가야 했는데, 이때 한국의 변호사와 회계사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한국브리태니커회사는 다른 지역의 브리태니커회사가 갖지 못한 독특한 이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한국은 배움에 높은 가치를 두는 나라였기 때문에 다른 어느 나라보다도 브리태니커의 책과 자료들을 가치 있는 교육자료로 인정한다는 점이 그것이었습니다.


회사를 창립하는 데 무엇보다 큰 도움이 된 것은 새로 생기는 한국브리태니커회사에 참여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본사 임원의 한 사람으로서 제가 한국브리태니커회사의 초대 사장을 맡았습니다만, 곧 이 책임을 한창기 씨에게 넘겨줄 수가 있었습니다. 이는 시카고에서 경영진을 파견하던 그간의 관행에 한 획을 긋는 계기였으며, 시기적절하게 이루어진 변화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한창기 씨가 없었다면 오늘날의 한국브리태니커회사는 없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는 여러 가지 뛰어난 특징을 골고루 갖춘 인물이었습니다. 이해가 빠르고 상상력이 풍부한 경영자였으며, 판매와 경영의 귀재였고, 거기에 더해서 편집인의 통찰력까지 겸비한, 드문 인물이었습니다. 저는 지금도 그의 타계가 우리 모두에게 커다란 손실이 아닐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 안타까운 마음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의 지도력 아래에서 한국브리태니커회사는 명실상부한 한국의 회사로 성장했습니다. 후에 한창기 씨의 뒤를 이어 사장을 맡았던, 회계분야에 탁월한 기량이 있었던 이연상 씨와 뛰어난 젊은 인재들의 도움으로, 한창기 사장은 회사 창립 초기부터 계속해서 판매 기록을 경신했고, 회사 설립 후 몇 해 지나지 않아 '200주년 기념회사'는 브리태니커회사 내에서 최고경영상을 수상하게 되었습니다. 일본에 오는 길이면 거의 빼놓지 않고 한국에 들르던 저는 한국브리태니커회사의 업적을 대단히 자랑스럽게 생각하곤 했습니다.


영어판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을 시작으로, 한국브리태니커회사는 점차 그 활동 영역을 넓혀나갔습니다. 당시 미국의 상원의원이던 윌리엄 벤튼 씨의 기부금을 기초로, 한국에서는 거의 최초로 외국인이 영어를 가르치고 연구하는 재단법인 언어교육 부설 언어교육학원(Language Teaching Research Center/LTRC)을 설립했으며, 영어공부 교재를 개발하고 판매하기 시작했습니다. LTRC는 지금도 활발하게 활동하는 영어 교육기관이며, LTRC의 초대 원장은 재능 있는 언어학자로서 지금은 고인이 된 데일 엥거 씨였습니다. 그는 한국에서 일하는 동안, 언어학 분야 학자 몇 분과 학교 선생님들로 한 그룹을 조직해, 실용영어 공부를 위한 교재인 〈술술영어 Encounter English〉를 개발했습니다. 초급·중급·고급으로 구성된 〈술술영어〉는 그 탁월한 가치를 인정받아 세계 각국의 브리태니커회사에서 그 나라 언어로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후일 시카고 본사에서는 이 교재를 비디오와 CD로도 제작해 교재의 가치를 한층 더 높이는 계기를 마련하기도 했습니다.


한창기 사장은 브리태니커를 판매하는 데에만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창립 초기부터 판매조직과 함께 편집진을 구성했던 한국브리태니커회사에서는 한국 출판사상 가장 뛰어난 한국인문지리지라고 평가받은 〈한국의 발견〉을 비롯해 독자적인 출판물을 여럿 펴냈습니다.


한국브리태니커회사가 탄탄한 편집진을 가지게 되자, 이는 곧 영어판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 실린 한국 관련 항목을 늘리는 데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되었습니다. 편집위원회 임원의 한 사람으로서 저는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 한국 관련 항목이 적다는 것에 우려하고 있었으며, 한국의 여러 학자들과 나눈 대화를 통해 제 우려가 타당성이 있음을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한창기 사장도 역시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 한국 항목이 충분하지 않다고 강하게 느끼고 있었습니다. 당시 고려대학교 총장으로 재직하고 있던 김준엽 박사가 이끄는 비공식적인 학술위원회도 우리에게 같은 내용의 조언을 주었고, 시카고에 있는 브리태니커 편집진은 우리의 견해에 대단히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습니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로, 1974년 당시 'EB3'이라고 불렸던 브리태니커 15판이 간행되었을 때는 한국 관련 항목이 크게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창립 이래 한국브리태니커회사는 영어판, 그리고 특히 일본어판 〈브리태니커 국제 백과사전 Britannica International Encyclopædia/BIE〉에 한국에 관한 항목을 늘리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으며,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한국브리태니커회사가 창립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1971년에 이미 영어판 〈1971 브리태니커 연감 Britannica Book of the Year/BBOY〉에 박정희 대통령의 장문의 글이 머릿기사로 수록되었는데, 이는 전년도인 1970년에 전 미국 부통령 휴버트 험프리 씨가 브리태니커의 이사 자격으로 한국을 방문한 결과였습니다. 오래 전부터 친한(親韓) 인사이던 험프리 씨는 대통령 선거에서 낙선한 1968년에 브리태니커 이사가 되었던 터였습니다. 여러 가지 면에서 험프리 씨의 한국 방문은 성공적이었습니다. 그는 한국 국민들이 자신을 잘 아는 데다가 가는 곳마다 반갑게 맞는 데에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험프리 씨의 방문은 한국브리태니커회사가 한국-미국 간 우호관계를 더욱 공고히 하는 데 큰 역할을 했음을 증명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 후 상당한 기간이 지난 뒤 저는 노태우 대통령을 만나 인터뷰할 기회를 가졌고, 그 기사를 권두특집으로 〈1992 브리태니커 연감〉에 수록할 수 있었습니다.


한국브리태니커회사의 우수한 편집진은 월간지 〈뿌리깊은나무〉를 창간했습니다. 한창기 사장이 편집을 총지휘했던 이 잡지는 곧 한국문화 해석에 뛰어난 시각을 갖고 있는 잡지임이 증명되었습니다. 이 잡지는 한국 전통음악과 민속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이를 현대에 되살리려는 한창기 사장의 꾸준한 노력의 결실이었습니다. 한국브리태니커회사는 전액 외국자본으로 세운 회사이면서도, 수준 높은 문화상품과 잡지를 통해서 자기 목소리를 가질 수 있었고, 자국의 문화를 발굴하고 지키는 수호자라는 독특한 이념을 가진 회사로 성장해 갔습니다. 〈뿌리깊은나무〉는, 일면 비판적이기도 하면서 당시 정치상황을 볼 때에는 자유주의적인 성향을 가진 잡지였는데, 1980년 당시 권위주의적이던 군부정권에게 미움을 받아 정부명령에 의해 폐간되는 비운을 겪게 되었습니다. 슬픈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한창기 사장은 이에 굴하지 않고, 자매편이라고 할 수 있는 〈샘이깊은물〉이라는 잡지를 창간했습니다. 이 잡지는 1997년 그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계속 간행되고 있습니다.


1980년대에 접어들어서도 한국브리태니커회사는 영어판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술술영어〉 등의 어학 프로그램, 문화상품, 각종 단행본 등을 판매하면서 성장을 계속했습니다. 브리태니커 판매대리인들은 여러 차례에 걸쳐 국제브리태니커상을 받았고, 한국브리태니커회사는 국내외적으로 방문판매 분야에 선두주자가 되었습니다. 다른 나라의 브리태니커회사들도 한국에서 많은 것을 배워갔습니다.


한국의 문화계 인사들은 100회에 걸쳐 '브리태니커 판소리 감상회'를 개최하고 〈브리태니커 판소리 전집〉을 펴내는 등 한국의 전통 문화를 되살리는 데 탁월한 업적을 이룬 한창기 사장에게 뜨거운 박수를 보냈습니다. 이와 함께 한국어로 된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편찬의 필요성이 점차 커져 갔습니다.


개발 당시에는 '코리아나 Koreana'라고 불렸던 한국어판 〈브리태니커 세계 대백과사전 Britannica World Encyclopædia/BWE〉이 발간되기까지는 오랜 역사가 필요했습니다. 한국브리태니커회사가 설립된 지 1년 뒤 일본브리태니커회사에서 일본어판 〈브리태니커 국제 백과사전〉을 시작할 때, 저는 지금은 국회의원이 된 손세일 씨에게 부탁해 도쿄[東京]에서 일본어판 편집진과 함께 일하면서 한국어판 백과사전을 위한 계획을 세우도록 부탁했습니다. 당시 〈동아일보〉의 회장이었던 고 김상만 씨도 이 계획에 적극적인 관심을 보였고, 우리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동아일보〉와 공동으로 한국어판 백과사전을 편찬하는 일에 대해 얘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브리태니커 본사 임원들을 설득하는 일은 몹시 어려웠고, 그들이 이 계획에 대해 동의하기까지는 상당한 시일이 걸렸습니다. 그런 중에 1985년 한창기 사장이 잡지와 그의 숙원이던 문화사업에 더욱 전념하기 위해 한국브리태니커회사를 사임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한창기 씨의 뒤를 이어 사장이 된 이연상 씨는 회사 설립 당시부터 일했던 분이었으며, 한국어판 백과사전 편찬 계획에 적극 찬성하고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이연상 사장은 1987년 시카고 본사의 국제상품개발부(International Products Development)의 도움을 받아 한국어판 백과사전 편찬에 관한 구체적인 계획을 마련했고, 그 이듬해에 본사 승인을 얻었습니다. 젊고 유능한 편집자들의 헌신적인 노력과, 김준엽 총장을 비롯한 한국 최고의 지성을 대표하는 이들로 구성된 각 분야 자문위원들의 도움을 받아 드디어 한국어판 〈브리태니커 세계 대백과사전〉을 성공적으로 완간할 수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편집작업이 그렇듯, 한국어판 백과사전을 만드는 데도 예상했던 것보다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특히 완간을 앞두고 개발비용이 예산을 초과해 곤란을 겪고 있던 때에 받은 〈동아일보〉 고 김상만 회장의 지원에 대해 지금도 깊은 고마움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의 결단으로 〈동아일보〉와 공동출판이 결정되었으며, 백과사전 편찬 작업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습니다. 첫 권이 출간된 것은 1992년이었고, 1994년에는 마지막 권인 27권을 완성했습니다. 〈브리태니커 세계 대백과사전〉은 진정한 의미에서 한국에서는 처음인 '국제적인 백과사전'이었고, 브리태니커로서도 가장 중요한 상품의 하나가 되었습니다. 이 백과사전은 한국과 세계 여러 나라 학자들이 함께 노력해 이룩한 결실이었으며, 출판계에서도 획기적인 업적이라고 널리 인정을 받았습니다. 지난 몇 년간 예상보다도 많은 독자가 이 백과사전을 구입한 것에서, 그 명성과 효용성을 독자들도 인정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1993년 거의 4반세기를 회사를 위해 일해왔던 이연상 사장이 사임했습니다. 그 전후 몇 년 동안 전세계의 브리태니커회사가 거의 동시에 지도력의 약화라는 고통을 심각하게 겪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1995년 브리태니커가 새 주인을 맞아 신선한 자극을 받으면서, 새 세기를 향해 갈 방향을 설정할 수 있었던 것은 정말 다행한 일이었습니다.


새 브리태니커 회사는 인터넷 온라인 서비스와 시디롬(CD-ROM)을 통해, 가장 권위 있는 '지식의 보고'를 독자에게 즉시 제공하는 세계 최고의 회사로 발돋움하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영어판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의 증보판 발간과 함께 몇 년 전부터 개발해온 〈브리태니커 온라인 Britannica Online〉 서비스와 CD-ROM판의 1998년판을 선보였으며, 그 밖에도 일본과 중국에서는 개정판을 위한 작업과 CD-ROM 개발이, 인도·러시아·폴란드·헝가리·라틴아메리카 국가에서는 그 지역 언어로 된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출간을 위한 편찬 작업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연상 사장 이후 한때 한국브리태니커회사에는 본사에서 파견된 경영자가 와 있었지만, 지금은 한국인에게 경영이 다시 맡겨졌으며, 전자출판과 인쇄매체 두 분야를 병행 발전시키는 쪽으로 회사의 방향을 설정하고 판매와 편집 면에서 함께 힘찬 전진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오랜 세월 동안 한국브리태니커회사의 한 가족으로 지내온 사람으로서 이 책 편집진의 노고를 치하하며, 앞으로 다가올 30년도 지난 30년만큼이나 성공적이고 또한 좋은 일이 많이 있는 기간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프랭크 B. 기브니 (김사라 옮김) - 인용 출처 브리태니커

* 관련자료

뉴욕타임즈 부고 http://www.nytimes.com/2006/04/14/us/14gibney.html?ex=1302667200&en=2a1c5325e5e5ccf5&ei=5088&partner=rssnyt&emc=r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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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ewsroom1.chosun.com/newsroom/MemberList.html?code=0020에서)

 jrkim@chosun.com / nomad.chosun.com

칭기즈칸은 속도, 기술, 정보를 그 어떤 가치보다 존중했다. 칭기즈칸은 정복지의 기술자를 절대로 죽이지 않았고 그 어떤 제왕보다 기술자를 존중했다. 칭기즈칸의 군대는 역사상 그 어떤 군대보다 더 먼 거리를 비교도 안 되는 빠른 속도로 움직였으며, 전 세계에 깔린 역참(驛站)과 대상(隊商)으로 조직된 네트워크로 제국의 모든 정보를 장악하고 있었다. 또한 현대의 기업처럼 공룡을 만들었다가 어려워지면 살인적인 구조조정을 자행하는 둔한 시스템이 아니라, 변형과 변신이 자유롭고 철저한 실력 위주로 운영되는 천호제(千戶制)라는 제국 인력풀 시스템을 가지고 있었다. 칭기즈칸의 제국경영에서 특히 빛나는 대목은 당시 몽골제국이 혼혈 잡종 사회로 신분의 수직 상승이 오로지 실력으로만 판가름 나는 완벽하게 열린 사회였다는 점이다. 칭기즈칸은 수많은 이질적 민족과 종교, 서로 다른 언어와 문화의 사람들을 하나의 ‘팍스 몽골리카’ 내부로 수용하면서 아무도 차별하지 않았다. 다양성의 수용과 통제의 균형, 이것이 ‘개방성’으로 표현되는 칭기즈칸의 수용정책이었다.
(칭기즈칸-밀레니움맨, 김종래 지음)

그간 유목민에 대한 거의 모든 기록들은 편견과 공포로 가득 차 있었다. 유목민에 대한 정착 문명권의 오만과 멸시는 20세기가 저물 때까지 지속되었다. '문명'이라는 용어 자체가 이미 '유목'을 '야만'의 자리에 배치해 놓기 위해 출현한 것이었다. 어쩌면 유목제국이 몰락한 후에도 오랫동안 벗어나지 못했던 칭기즈칸 콤플렉스가 중세 이후 역사의 한 동력이었는지 모른다. 서양사는 특히 그랬다.  그런 강박관념 속에서 근대 이후의 문명권이 누려온 학문과 기술의 비약적인 번영은 '혐오스런 유목민'과 영원한 결별을 꾀했다. 유목민들의 포악성을 피해 더욱 안전한 문명속으로 달아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서구의 근대는 성공을 거두었다고도 볼 수 있다. 이제 아무도 유목민으로부터 현재형의 공포를 느끼지 않는다.
그러나 도대체 이를 어찌해야 좋은가? 그렇게 달아나고 달아난 끝에 인류는 다시 첨단 문명의 표상으로 유목민을 거론한다. 특히 서구 문명이 21세기를 '유목적인 것'으로 천착하는 데 앞장선다. 프랑스의 석학 자크 아탈리는 '부유한 사람들은 즐기기 위해 여행할 것이고 가난한 사람들은 살아남기 위해 이동해야 하므로 결국은 누구나 유목민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앨빈 토플러도, 기 소르망도 비슷한 주장을 폈다. 이미 휴대폰, 노트북, 컴퓨터 등이 사이버 세계의 기마 궁사들을 양산하고 있다. 오랜 세월에 걸쳐서 인간이 이동적인 삶을 감내했기 때문에 말(馬)은 인터넷으로 대체되어야 했다. 이제, 이동적인 관점이란 모든 인간의 잠재적인 자세이며, 인간 존재의 기본적인 범주들 가운데 하나라고 말해야 할 상황에 이른 것이다.
(왜 유목민인가? 김종래 http://nomad.chosun.com/jr01/sub1012.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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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대 직장인의 애환을 만화로 그리던 조주청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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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도 만화와 여행을 좋아하시더니
이제는 여행 전문작가가 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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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아 2004년 10월호  명사 음식기행
http://www.donga.com/docs/magazine/shin/2004/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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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상원위원 에드워드 M. 케네디. (Edward Moore "Ted" Kennedy)
(http://kennedy.senate.gov/newsroom/index.cfm)

쟁쟁한 케네디가이지만 대통령 후보가 될 생각은 하지 않는다.
그에게는 채패퀴딕 사건이 있기 때문이다.
그는 매사추세츠 주 상원의원으로 만족해야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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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존, 로버트, 에드워드 케네디. http://www.senate.gov/~kennedy/images/bros.jpg)

채패퀴딕은 마사즈 빈너드 섬의 동쪽 끝 지역으로 이 섬은 골프장, 휴양지로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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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 그는 음주후 자신의 여비서  Mary Jo Kopechne와 동승한 차가 물에 빠지자
자신만 빠져나오고, 차 속의 에어포켓에서 두 시간 동안 살아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여비서의 죽음을 방관하고 자신의 사고를 은폐하려 한 것으로 보인다.
(사고 9시간 후 신고하였다.)
물론 법적으로 그는 최소한의 책임만을 물었지만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그의 행동이 접합하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있고,
그런 이유로 대통령후보는 꿈에도 못 꾸는 것이다.
그래 메리 조는 거기서 유부남 6명과 미혼여성 6명이 모이는 파티에 왜 갔더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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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 대한 모든 것이 있는 사이트
http://www.ytedk.com/index.htm

미국 매서추세츠 주 마사즈 비너드 섬에 대한 소개
http://www.jgolfi.com/academy/column/

오바마 대통령 후보 지명을 위해 마지막까지 애쓴 케네디 상원의원.
[사진. 한겨례 신문. 출처- 워싱턴 로이터 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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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정의 힘 이라는 책을 알고 있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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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 있을때 케이블 테레비젼에서 그런 책과 세미나를 안내했지만
우연히 케이블 테레비젼에서 그의 부흥회 녹화를 보는 순간
쉬운 말로, 웃으면서 설교하는 그에게 사람들이 몰리는지 알 수 있었다.
힘든 삶, 좌절하는 사람들에게 신앙적으로 극복하라는 메시지.
일부에서는 기복신앙적이라는 비판도 있지만, 신도가 늘어난 교회 목사님 치고
안 그런 목사님이 몇이나 될까?
아니 우리 삶이 안락하고 걱정없기만 하다면 얼마나 좋을까?
59년생인 그는 61년생인 아내(부목사)와 함께 레이크우드 교회를 담임하고 있다.

http://joelosteen.lakewood.c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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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 1 : Enlarge Your Vision
Part 2 : Develop a Healthy Self-Image
Part 3 : Discover the Power of Your Thoughts and Words
Part 4 : Let Go of the Past
Part 5 : Find Strength Through Adversity
Part 6 : Live to Give!
Part 7 : Choose to Be Happ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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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셉 스티글리츠

ysl* 사람들 / 2007. 2. 19. 23:49
국제화와 FTA 만이 살 길이라는 주장이 터져 나오는 요즘,
IMF 부회장을 지냈던 컬럼비아대학 경제학과 교수의 날카로운 지적이
또 한번 주목을 받고 있다.
그는 정보경제학이란 개념으로 2001년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하였다.

그는 세계화와 자유무역을 포기할 수 없다면, "모든 나라가 자기보다 작은 개발도상국에 모든 상품에 대해 시장을 열고, 원산지 규정 같은 기술적 방해를 없애며, 농업 보조금을 철폐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농업 보조금은 우리의 농민을 조금 살릴 수 있겠지만, 농업에 승부를 걸어야 하는 개도국의 농민들에게는 더 비참한 삶을 강요하기 때문이다. 어디 보조금이 농업에 대해서만 있겠는가?

영세 학문을 보조하는 일이 더 경쟁력 있는 학문을 죽이는 일이 될 수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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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seph Stiglitz

Phone: 212-854-1481 Fax: 212-854-8059
E-mail Address: jes322@columbia.edu

Address:
Economics Department, Columbia University
814 Uris Hall, MC 3308
420 West 118th Street
New York, NY 10027


홈페이지
http://www.columbia.edu/cu/economics/faculty/current/jes322.html

김민웅의 세계통신 (신동아 1998. 7월호)
http://www2.donga.com/docs/magazine/new_donga/9807/nd98070140.html

조선대학교 철학과 게시판의 글
http://www.philo-sophia.net/memopage/memo_5.php?IJOB=content&page=9&key=&keyword=&idx=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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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yler Brule

ysl* 사람들 / 2007. 2. 19. 11:46

Jayson Tyler Brûlé (born 1968 in Winnipeg, Manitob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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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일러 브룰은 캐나다의 언론인이자 잡지 발행인. 1989년 영국으로 건너와 BBC TV의 리포터, "가디언", "스턴", "선데이 타임즈", "배니티 페어"의 기자로 활동했다. 1994년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취재하다가 저격수에게 총을 맞은 후 언론계를 떠났다. 그후 스타일 패션 잡지 "월페이퍼*"을 발행하여 대 성공을 거두고, 2006년 10월 새 잡지 "모노클"을 시작했다.

In May, 2002, Brûlé left Wallpaper and concentrated on "Winkmedia" (now "Winkreative"), a design agency he founded in 1998.

In 2005, Brûlé hosted the TV media magazine The Desk on BBC 4. In 2006, he co-produced "Counter Culture" - a documentary series about cultural aspects of shopping - on the same channel.

He is a regular columnist for the Financial Times and The New York Times. His "Fast Lane" column, which appears in the Weekend supplement of the Financial Times, is a write-up of his observations on travel, trends and high-end consumer goods, gathered in the course of his travels during the week, which often seem to involve visits to more than two continents.

In October 2006, he announced that he would create a new magazine, to be called Monocle.

In December 2006, he announced in his "Fast Lane" column in the Financial Times, that he would be taking a break from the column at the close of the year to work on projects.


from http://en.wikipedia.org/wiki/Tyler_Br%C3%BBl%C3%A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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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치를 창조하는 직업  
 
 매일 출근길 버스에 오르면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내가 아는 ‘일은 저렇게 해야 해’라는 생각을 갖게 해주는 몇 사람 중 한 명이다.

그 는 내가 다니던 학교 셔틀버스 운전사였다.  매일 무심하게 오르고 내리던 셔틀버스를 기다리며 어느 날부터인가 그 사람이 운전하는 버스였으면 좋겠다라는 바람을 갖기 시작했다.  건장하고 키가 큰 깔끔한 차림의 흑인 운전기사 그 주인공이다.  늘 뚱하고 말이 없 는 뚱뚱한 백인 운전기사가 운전하는 차만 타다가 차에 오르는 순간 “Hi, How are you doing?”이 라는 인사를 듣게 되었을 때는 당황스럽기 까지 했다.  


첨엔 습관적으로 “Good. How are you?”를 하고 대답했으 나 그는 “Pretty good. Thank you” 로 정식으로 대답했다.  나는 뜻하지 않게 그와 정식 인사를 나눈 셈이 되었 다.  버스에 오르는 그 짧은 시간 동안 우리는 정식으로 인사를 나누었다.  말뿐만이 아니다.  고개와 상체를 나에게 돌린 후 눈 까지 맞춰가며 인사를 한다.

그런 날이면 기분이 매우 좋다.  서로에게 무관심하고, 하루 종일 아는 사람을 만나지 않으면, 누구 하나 나와 눈을 맞추지 않는 외로운 캠퍼스에서 나에게 저렇게 반갑게 인사를 건네는 사람이 있다니…  학생들이 많이 타는 정류장이라고 예외는 아니다. 10명이건 20명이건, 타는 데로 인사를 건넨다.  

그리고 모든 학생들이 웃는 얼 굴로 인사를 한다.  마치 파티의 주인공과 손님들 같이 인사를 나누는 것만으로 요란하다.  재킷이 멋있다는 둥, 날씨가 어떻다는 둥, 조심해서 올라타라는 둥 그 짧은 시간에 참 많은 이야기를 나눈다.  자리에 앉는 학생들은 모두 얼굴에 웃음이 묻어 난다.   마치 소풍이라도 떠나는 버스 같다.  아저씨 역시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운전을 하신다.  그리고 내릴 때 역시 큰소리로 잘 가라는 인사를 잊지 않는다.  시험기간이면, 시험 잘 보라는 이야기도 빼놓지 않는다.  

하루는 종점에 서있는 버스에 올라타 서 떠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운전기사가 차에 올랐다.  아저씨가 어떻게 인사를 하실까 사뭇 궁금해졌다.  하얀색 스웨터와 바지, 구두 그리고 베레모까지 근사하게 차려 입은 아저씨는 하얀 이를 드러내는 웃음을 웃으며 학생들을 바라보고, ‘시험기간인데 많 이 힘들지 않느냐, 행운이 있길 바란다’며 짧게 인사를 하시고 운전대를 잡으셨다.  

나만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그 아저씨의 셔틀을 타는 날이면 기분이 좋아진다.  셔틀버스 운전사가 누구인가를 가지고 그날의 운을 점쳐보기도 한다.  그리고 그 아저씨도 마찬가지이다.  아저씨는 하루 종일 일하는 동안 참 즐거울 것 같다.  늘 똑 같은 길을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돈다고 생각하면 지겹기 짝이 없겠지만, 늘 새로운 학생들을 태우고, 반가운 얼굴들을 만나고, 반가운 학생들을 수업에 늦지 않도록 안전하게 운반해 주는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게 아닌가.  

 시간이 좀 지나니, 아저씨의 팬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운전석 옆에나 뒤에 서서 아저씨와 이런 저런 이야기를 도란 도란 나누는 학생들이 생겨나고, 무언가를 건네주는 학생들도 생겨난다.  

종점에서 담배나 피우고 버스 옆에 서있는 다른 기사들과는 달리, 아저씨 주변엔 학생들이 있다.  단순히 운전기사가 아니라 하루에도 수천 명의 학생을 기분 좋게 해주는 사람. 그게 그 아저씨의 직업이 아닐까 한다.

“내 가 이런 일을 할 사람이 아니다”라는 생각을 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면서 ‘이런 일’이란 말로 자신의 직업을 비하한다.  하지 만, 어쩔 수 없이 그 일을 하는 자기가 너무나도 부끄러워지고, 직업에 대해서 충실하게 임하지 않게 된다.  그리고 자기 일이 아 니라고 생각하고 싶어하기 때문에, 일을 막하고, 고객에게 함부로 하는 경우가 많다.  괜한 분풀이를 고객에게 하는 셈이다.  그러 면 “이런 일도 제대로 못하는 사람”이 되고 만다.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또는 자신의 직업에 혹 만족하지 않더라 도, 거기에서 의미를 찾고, 보여지는 이상의 가치를 창조하여야 하는 것이 아닐까?  직업에서 가치를 창조한다는 것이 결코 대단한 일에서만 가능 한 것이 아니다.  작은 일이라도 남들이 생각지 못한 가치를 창출할 수 있다. 

내가 나를, 내가 하는 일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다른 사람이 인정할 리 절대 없다.  그러면 앞에 말한 대로, 그런 일조차 제대로 할 줄 모르는 사람이 되고 만다.  더 좋은 것을 원한다면, 지금 하는 일에 충실하고, 남들이 예상치 못한 부가가치를 만들도록 노 력해야 한다.  그렇게 한다면 더 좋은 기회는 자연스럽게 따라오게 마련이다.

 
글쓴이  mirthy8980 조회: 98, 추천: 1  마지막 수정 시간: 2004-07-16 17:3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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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정 / 커리어디시젼 대표 (www.careerdecision.co.kr)
 
 한양대학교 외국인 회사 면접 클리닉 담당  
 '몸값을 최고로 올리는 자기경영의 기술’ 저자  
 미국상담협회, 미국경력개발협회 프로페셔널 회원  
 전 리헥트해리슨 코리아  
 전 삼성전자 본사 인사팀  
 전 미네소타 대학 유학생 전담 카운슬러/어드바이져  
 미국 미네소타대학 상담심리학(진로상담 특화) 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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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이여,야망을 갖지말라

‘젊은이들이여, 야망을 가져라’라는 영어문구를 많이 들어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야망을 품었다고, 또는 꿈을 가졌다고 성공한 사람을 나는 주변에서 한명도 보지 못했다. 필요한 것은 야망이나 꿈이 아니다. 야망이나 꿈은 너무 막연하다. 너무 원대하기 때문에 현재 자신의 모습과 비교하면 워낙 거리가 멀고 스스로가 초라하게 느껴진다.

그 렇다면 정작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구체적인 목표 의식이다. 가까운 장래에 이룰 수 있는 정확한 목표를 설정해야 한다. 빌 게이츠가 허름한 창고에서 사업을 시작했을 때 무슨 거창한 꿈이 있었을까? 국내 재벌들이 사업 초기에 뜨거운 야망에 불탔었을까? 내 생각에는 아니다. 그저 아주 가까운 미래만 바라보며 최선을 다했을 뿐이다.


예를 들어보자. 부자가 되고 싶어하는 사람은 많다. 그러나 부자가 되는 것을 목표로 삼으면 절대 부자가 될 수 없다. 월급을 받는 순간 그 돈으로는 부자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기에 한편으로 좌절하면서 버는 대로 쓰게 되고 결국 평생을 신용카드에 의존하게 된다.


하지만 목표를 ‘1000만원 모으는 것’으로 정하면 구체적인 계획을 세울 수 있다. 월급에서 얼마를 떼어 저축해야 한다는 계산이 나오고 그에 따른 행동도 이어진다. 저축을 하게 되고 곧 목돈을 쥐니 부자의 길로 접어드는 첫 계단에 올라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때문에 당신의 모든 목표는 가까운 미래에 이루어질 수 있는 구체적인 것으로 정해야 한다. 10년 후? 2년 후도 너무 길다. 오직 내년에만 관심을 가져라. 영어 공부나 컴퓨터 익히기도 마찬가지다. 영어를 잘 하는 사람이 되고 싶은 꿈보다는 당장 중학교 기초영문법을 2개월 이내에 독파하겠다거나 컴퓨터인 경우에는 한달 안에 엑셀을 끝내겠다는 세부 목표를 가져야 한다.


일단 목표를 세웠으면 뒤를 돌아보지 말 일이다. 영어를 못하는 사람의 경우 거의 모두 교재의 앞 부분만 손때가 묻어 새까맣다. 어제 공부한 것을 내가 제대로 기억하고 있는가 하는 불안감에 자꾸 들쳐보기 때문이다. 하지만 뒤를 돌아보면 안된다. 계속 전진하면서 한 권이 끝났을 때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는 것이 비결이다. 우리 삶의 목표도 역시 마찬가지다. 먼 훗날에 대한 막연한 야망이나 꿈은 당신의 현실과는 너무나 큰 괴리감이 있어 결국 당신을 도태시킨다. 가까운 장래에 아주 구체적인 목표를 세운 후에는 뒤를 돌아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라. 그것이 꿈으로 가는 첫계단이다.sayno@korea.com


<이진기자>leej@donga.com
2000.12.4

세이노 선생의 팬클럽 카페도 있다. http://cafe.daum.net/sayno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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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신입생에게

이태호 출처:이슈투데이 소속:서울대 직위:부교수


요즈음 나라가 어지럽습니다. 기성세대는 이런저런 눈앞의 '이슈(issue)'에만 매달려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기성세대는 여러분을 한시도 잊은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요즘처럼 여러분에게 희망을 거는 때는 일찍이 없었다고 할만큼 여러분에 대한 우리 기성세대의 기대는 큽니다. 여전히 여러분은 우리 세대 최대의 희망입니다. 제가 이 글을 띄우는 이유는 우리 기성세대가 여러분을 잊지 않고 있다는 조그만 표시를 하기 위해서 입니다.

신입생 여러분에게 진심 어린 축하를 보냅니다. 여러분은 그토록 고대하던 대학이란 땅에 드디어 도착하여 첫 발을 내딛게 되었습니다. 이제 여러분은 무엇이든지 대학입시를 위한 점수로 환산되는 냉혹한 입시교육의 강을 마침내 건넌 것입니다. 참으로 축하할 만한 일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냉정하게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대학에 대하여 무엇을 알고 있는가?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여러분은 과연 '준비된' 신입생인가? 선배의 입장에서 여러분에게 몇 가지 귀뜸을 해주고자 합니다.

대학이라는 곳은 열린 세계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이 가고싶은 방향으로 가고싶은 만큼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열린 세계는 방황을 야기하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자기가 가고있는 방향이나 지나온 길을 종종 잊어버리거나 혼동하는 일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방황 없이는 새로운 것, 더욱 좋은 것을 찾을 수 없습니다. 열린 세계에서는 방황을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방황을 의미 있게 하는 법을 익혀야 합니다.

대학이라는 곳은 불확실한 세계입니다. 불확실성의 세계에서는 가능성에 도전하여야 합니다. 확실한 것을 추구하는 자는 남이 이미 이루어 놓은 것을 뒤따를 수 있을 뿐입니다. 현실은 대학에서 진리라 정의한 것을 싸고도는 소립자의 구름과 같은 것입니다. 여러분이 여태까지 뉴톤(Newton)적 세계관을 가지고 살아왔다면 이제부터는 양자역학적 세계관에 도전하여 보십시오.

대학이라는 곳은 경쟁사회입니다. 경쟁사회에서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노력하지 않으면 낙오될 뿐입니다. 그러나 한번의 실수는 혹시 용서될 수도 있습니다. 눈물 젖은 성적표를 받아 본 후에야 경쟁의 참 맛을 알겠거든 한 번 실컷 놀아 보십시오. 실패 역시 훌륭한 기회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면 실수를 용서받을 자격이 있습니다.

대학은 여러분 평생의 윤리관을 완성하는 곳입니다. 사람은 윤리관이 있어야 자립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능한 한 신중히 여러분의 윤리관을 선택하고 관리하십시오. 사람의 윤리관이란 쉽게 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순간의 선택이 일생을 좌우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대학은 학문을 하는 곳입니다. 학문 이외의 일로 쓸 데 없이 여러분 자신을 바쁘게 하지 마십시오. 끊임없이 의심하는 용기와, 호기심을 풀기 전까지는 그치지 않는 끈질김을 가진 사람만이 학문을 할 수 있을 만큼 한가할 수 있습니다.

이제 몇 가지 실천사항을 이야기하였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신념입니다. 오직 믿음이 있는 자만이 실천할 수 있습니다. 이 험한 세상에서 여러분이 목적지에 도달할 때까지 포기하지 않도록 지켜주는 것은 신념입니다. 자기 자신과 사회에 대한 믿음을 가지십시오. 사회는 스스로 믿는 자를 돕습니다.

그러나 유의하십시오. 자신에 대한 지나친 믿음은 금물입니다. 냉철하게 자신의 능력과 욕망의 대차대조표를 작성하십시오. 목표에 대한 욕망은 적게, 실력은 넘치게 유지함으로써 대차대조표의 흑자를 유지하십시오. 실력보다 많은 욕망이 모든 실패의 원인임을 잊지 마십시오. 부디 항상 자신에게 겸손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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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 내 꿈은

도종환

어릴 때 내 꿈은 선생님이 되는 거였어요
나뭇잎 냄새 나는 계집애들과
먹머루 빛 눈 가진 초롱초롱한 사내 녀석들에게
시도 가르치고 살아가는 이야기도 들려주며
창 밖의 햇살이 언제나 교실 안에도 가득한
그런 학교의 선생님이 되는 거였어요
플라타너스 아래 앉아 시들지 않는 아이들의 얘기도 들으며
하모니카 소리에 봉숭아꽃 한 잎씩 열리는
그런 시골학교 선생님이 되는 거였어요.

나는 자라서 내 꿈대로 선생이 되었어요
그러나 하루종일 아이들에게 침묵과 순종을 강요하는
그런 선생이 되고 싶지는 않았어요
밤 늦게까지 아이들을 묶어놓고 험한 얼굴로 소리치며
재미없는 시험문제만 풀어주는
선생이 되려던 것은 아니었어요
옳지 않은 줄 알면서도 그럴 듯하게 아이들을 속여넘기는
그런 선생이 되고자 했던 것은 정말 아니었어요.
아이들이 저렇게 목숨을 끊으며 거부하는데
때묻지 않은 아이들의 편이 되지 못하고
억압하고 짓누르는 자의 편에서 선생이 되리라곤 생각지 못했어요

아직도 내 꿈은 아이들의 좋은 선생님이 되는 거예요
물을 건너지 못하는 아이들 징검다리 되고 싶어요
길을 묻는 아이들 지팡이가 되고 싶어요
헐벗은 아이들 언 살을 싸안는 옷 한 자락 되고 싶어요
푸른 보리처럼 아이들 쑥쑥 자라는 동안
가슴에 거름을 얹고 따뜻하게 썩어가는 봄흙이 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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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약력]
1955년 9월 27일 (충청북도 청주시) 생

학력
청주중학교
원주고등학교
충북대학교 (국어교육과/학사)
충북대학교 (국어국문학과/석사)
2006 충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박사)

육군 상병 소집해제

종교
가톨릭 (세례명: 진길 아우구스티노)[5]

약력
덕산중학교 교사 (1977~1989 전교조 참여로 해직)
1986 시집 접시꽃 당신
1991 재혼
2007 한국작가회의 사무총장
더불어민주당 대변인
더불어민주당 충북도당 위원장
2012 비례대표 국회의원 
2016 충북 청주시 흥덕구 국회의원 당선 (20대, 21대)
2017 문화체육관광부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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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호와 GS CI에서 표절을 해낸 랜도사가 궁금해졌다. 과연 처음 랜도사를 시작한 월터 랜도(walter Landor)는 성공시대에 나올만한 사람이고, 그가 만든 회사는 많이 거대해진 모양이다. 회사 홈 페이지(www.landor.com)에 나와 있는 월터 랜도에 대한 이야기를 읽어 보면 그렇다. (누가 회사 설립자를 깎아내릴 것인가?)

1913. 7. 9일 독일 뮤니히 출생.
1931년 18살에 영국으로 유학.
1939년 미국 횡단여행후 샌프란시스코에 정착
1941년 부인과 회사 설립
1964년 페리보트로 회사를 옮김 (흠... 회사가 보트에 있다고? 상담 고객에게는 멀미약을 주었다는 일화가 있음)
1980년대 후론트 스트리트로 회사 옮김
1995년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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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creative visionary who pioneered the use of design and visual imagery as strategic marketing and business tools, Walter Landor helped create and develop some of the world's most recognized brands and corporate identities, including Coca-Cola, Levi's, Cotton Inc., Kellogg's, GE, Fuji Film, Saturn, Miller Lite, Alitalia, 20th Century Fox, Philip Morris, Singapore Airlines, 3M, the World Wildlife Fund, Pacific Telesis, Wells Fargo Bank, Dole Foods, Del Monte, Safeway Stores and Bank of America.

Born in Munich on July 9, 1913, Walter as a youth was influenced by the Bauhaus and Werkbund design movements. At 18, he decided to focus his career on designing for the mass audience so that the greatest number of people could benefit and "become more alive to what is enriching and enjoyable in our everyday world."

Walter left Munich to complete his studies at London University's Goldsmith College School of Art in 1931. At 22, he became a founding partner with Misha Black and Milner Gray in England's first industrial design consultancy, Industrial Design Partnership (IDP).

In 1939, Walter travelled to the United States as part of the design team for the British Pavilion at the New York World's Fair. Following the World's Fair, he crossed the U.S. to San Francisco, where he immediately decided to settle. "For me, it was a city that looked out on the whole world, a city built on the cultural traditions of East and West.... how could I live anywhere else?"

In 1941, Walter established Walter Landor & Associates in his small Russian Hill flat, with his wife Josephine as his first "associate." As his company grew, Walter became one of the first to use consumer research in packaging design, and is widely credited with establishing the economic value of design and effective visual communications in business. Over the next few decades, groundbreaking creativity backed by strategic thinking saw Landor Associates become the world's preeminent design firm, working with some of the world's best-known companies.

In 1964, Walter moved his firm to the ferryboat Klamath, anchored at San Francisco's Pier 5. The move to the Klamath greatly enhanced the company's reputation for innovation and creativity, and it also provided more space to expand the firm's design and consulting capabilities. Although Landor Associates eventually outgrew the ferryboat in the late 1980s and moved to its present headquarters at 1001 Front Street, the Klamath remains the firm's corporate symbol.

In 1994, the Smithsonian Institution's National Museum of American History completed The Walter Landor Collections of Design Records and Packaging to document and permanently house the legacy of Walter Landor's, and Landor Associates', contributions to American design history in the 20th century. According to John Fleckner, Director for the Smithsonian's Center of Advertising History, "Walter Landor's pioneering work in corporate communications, marketing, and the use of symbols and visual imagery is an essential part of the broader story of American culture and society in the last half century."

Walter died on June 9, 1995, at the age of 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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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bert Falcon Scott

ysl* 사람들 / 2007. 1. 16. 23:36
1912년 남극에서 사망한 영국 탐험가 로버트 팰콘 스콧(Robert Falcon Scott)

스콧은 죽음을 맞는 마지막 순간까지 위엄을 잃지 않은 것으로 유명하다. 스콧의 이런 불굴의 태도는 이후 영국인들의 무한한 존경의 바탕이 되었다. 아래는 스콧이 죽음을 앞에 두고 영국민에게 보낸 마지막 메시지의 한 대목으로, 영국에서 널리 회자되는 내용이다.

“…그러나 나 스스로는 이 탐험여정을 후회하지 않는다. 이 여정은 영국인들이 역경을 견디며 서로를 돕고, 죽음을 강인하게 맞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우리는 위험을 무릅썼고, 우리가 그럴 것이라는 것도 미리부터 알고 있었다. 환경은 우리 편이 아니었지만, 우리는 불평할 이유가 없었다. 마지막까지 신의 섭리에 경의를 표하며 결연하게 최선을 다하고 있다. 만약 우리가 살아 돌아갔다면, 나는 온 영국인들의 심장을 휘저을 나의 동료들이 겪어낸 역경과 인내, 그리고 불굴의 용기를 이야기했을 것이다. 가지런하지 못한 메모들과 우리들의 주검만이 남아 훗날 그 이야기를 전할 터이지만, 틀림없이 그리고 분명히 우리나라와 같이 위대하고 부유한 나라는 우리들을 의지할 것이라고 믿는다.” (스콧이 영국민에 보낸 마지막 편지)

한겨레 http://www.hani.co.kr/arti/international/europe/184439.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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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시티, 배트맨 리턴즈의 원작자 프랭크 밀러. 그의 독특한 세계관과 그림에 대한 평가를 이정도로 할 수 있는 사람이 국내에 있다는 것이 놀랍다. 프랭크 밀러의 작품들을 보고 있노라면 매트릭스나 일본 만화들의 영향력이 도대체 어디에서 어디로 간 것인지 궁금해진다. 최근에는 스파르탄의 이야기를 그린 300가 영화화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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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관련글 원글 : 프랭크 밀러의 신시티
http://blog.empas.com/collector/9409507

프랭크 밀러 작품  모음 사이트
http://moebiusgraphics.com/

영화 신시티
http://video.movies.go.com/sinc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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