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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결 인생 ㅋ
[매거진 Esc] 여기자 K의 숨기고 싶은 이야기


한겨레

솔직히 1997년 아이엠에프 위기가 고마울 때가 있다. 98년 대학 졸업반 때 입사시험 봤다 하면 떨어지는 게 일이었다. “이게 다 그 망할 놈의 외환위기 때문이야!”라고 말할 수 있어서 다행이지, 아이엠에프가 없었다면 아마 남들은 “걔가 좀 그렇지… 쯧쯧” 그랬을 테고, 나 자신도 자괴감 땅굴에 은거해 개구리 잡아먹었을 것이다. 이런 생각이 단지 피해망상이 아니라는 데는 나름 근거도 있다. 10년 전, 나의 구직 행태를 보면 지금 밥 벌어 먹는 자신이 기특하고 영특하다.

자아실현? 내가 누군지 나도 모르는데 실현은 또 웬말이냐. 늘 뱃속은 헝그리하지만 헝그리 정신은 없는 나에게 ‘기자 아니면 안 돼’라는 포부도 있을 리가 없었다. 일단 밥은 먹고살아야 할 거 아닌가. 원서 접수와 탈락을 반복하다가 드.디.어 서류전형, 필기시험, 험난한 고비를 넘어 임원 면접 보는 날, 정장 좍 빼입고 대기하자니 오금이 저렸다. 면접 임원의 첫 질문. “왜 우리 회사를 지원했어요?” 100가지 예상 질문을 준비하면서 어쩐지 뭔가 빠진 게 하나 있다 싶더라니. 순발력을 발휘해 내가 생각해도 기특한 급답변을 제출했다. “사보 만들려고요.” 순간 정적. 임원도 안됐다는 듯 “우리 사보 안 만드는데”라며 말끝을 흐렸다.

어느 방송사 시사·교양프로그램 작가로도 지원했다. “어떤 시사·교양프로그램 좋아해요?”(피디들) 아뿔싸. 나는 드라마, 오락 프로그램이 아니면 보지 않아 왔다는 걸 시사·교양프로그램 작가 면접 보며 깨달았다. 우물쭈물하니까 한 피디가 “그냥 좋아하는 프로그램 말해 보세요” 한다.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순풍산부인과요.” 아예~, 이후 변변한 질문을 받지 못했다.

한 언론사 면접시험장. “뉴스가 뭐라고 생각해요?” “아…, 음…, 그게, 새로운 거요.”(맞지 않나요?) 그 임원, 냉소적으로 묻는다. “그럼 *씨 면접 보는 것도 새로운 건데 국민들한테 뉴스에요?” 그래, 나의 부모님한테나 뉴스겠지. 고개를 주억거리는데 똑같은 질문을 내 옆에 앉은, 이미 우주의 비밀을 깨달았을 듯이 보이는 지원자에게 한다. “네, 뉴스는 세상을 보는 창입니다.” 우악! 뉴스가 바로 저거였구나.

사실 지금 다니는 언론사에서도 처음엔 낙방했다. 다른 지원자들, 눈을 똘망똘망하게 뜨고 “그 의견에 반대합니다”라고 말할 때 목소리는 또 어쩌면 그리 청아한지, 반해버렸다. 토론 시험 시간, 다른 지원자들은 눈치 못챘을지 모르는데 사실 나는 토론시험 보는 지원자가 아니라 "이분 말도 맞고 저분 말도 맞다"고 중재하는 사회자가 돼갔다. 떨어질 줄 알고 있었지만, 인간은 죽게 돼 있는 걸 알면서도 사람 죽으면 슬프듯이 불행을 준비한다고 아프지 않다더냐. 낙방 날, 창경궁 돌담 밑에서 똥색깔 낙엽을 비처럼 맞으며 꺼이꺼이 울었더랬다. 그래도 신은 있는지, 세상에서 제일 똑똑한데다 마음도 고운 합격자 두 명이 그만두는 바람에 보결로 들어오게 됐다. 그렇게 떨어질 듯 붙으며 시작한 기자 인생은 그만둘 듯 잘릴 듯 또 출근하는 방식으로 이어졌다. 그러고 보면 매일 아슬아슬 죽을 듯 살아남는 ‘보결 인생’도 보결복이라고 아무나 받겠나 싶으니 내 자신, 이뻐 죽겠다.

기사등록 : 2008-06-18 오후 11:4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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