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입생에게 - 장상호
대학에서 학문하는 자세
장 상호 교수 (사범대 교육학과)
신입생 여러분! 서울대학에 합격한 것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젊은이들이 선망하는 대학의 문턱에 넘어 온 여러분이 세상의 모든 것을 얻은 것 같은 느낌을 지금 만끽하는 것은 당연한 권리이기도 합니다.
여러분의 기쁨은 또한 부모들의 기쁨이기도 합니다. 저 자신이 두 아들 모두를 서울대학에 입학시킨 학부모의 한 사람으로서 당시의 행복을 지금도 생생히 기억 합니다.
여러분에게 주어진 그 특별한 선택적 축복은 이제부터 전개될 대학생활과 원만하게 연결될 때 배가될 수 있을 것입니다.
서울대는 학문을 구심점으로 하는 자생적 공동체
초등, 중등, 고등학교와 이제부터 여러분이 생활할 대학은 전혀 다른 뿌리와 전통을 가지고 있는 점을 먼저 지적하고 싶습니다.
여러분이 졸업한 공립학교는 서구에서 19세기 근대국가의 출현과 더불어 출현한 것으로서 국가나 사회에서 미리 규정하는
특정한 시민의 양성이나 산업을 위한 인적 자원의 확보라는 필요에 호응하는 노선을 따르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국가의 관료주의적 위계의 맨 밑에서 학생의 신분으로서 정해진 계획과 지시에 따라 피동적으로 교육을 받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이에 비해서 대학은 멀리 12, 13세기 구라파에서 가르침과 배움을 목적으로 일단의 교수들 혹은 학생들이 결집하여 이루어진 자생적 공동체로서 출발하였으며,
그로 인해서 대학은 국가나 일반사회로부터 비교적 자율성이 보장되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제 그 공동체의 한 구성원으로서 그 전통을 살려나갈
주체의 위치에 놓여 있습니다.
대학은 이전의 상아탑이라는 이념과는 다른 현실여건에 의해서 영향을 받고 있기 때문에 오늘날의 대학을 순수한 의미의 학문공동체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이 부분에서 대학, 혹은 단과대학마다 그 목적과 정도의 차이가 있을 것이고, 그 차이에 따라 학구적인 대학과 비학구적인 대학의 분류가 가능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에서 서울대학은 대체적으로 전자의 것으로 분류하는 데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서울대학에서의 성공적인 적응은
학문생활의 적응과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학문은 체험의 내용을 갱신해 나가는 것 : 배움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필요해
학문이란 무엇입니까? 학문에 대한 인식은 그 체험의 정도에 따라 달라집니다. 사실 학문의 목적은 그 체험의 내용을 갱신해 나가는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앞의 질문에 대한 해답은 학문 안에 참여하면서 점차 깨달아 가는 것이기 때문에 신입생 여러분의 장래의 경험에 크게 의존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자의 체험에만 의존하여 해답을 얻는 데에는 한계가 있기 마련입니다. 이 글은 바로 대학 안에서 학문생활을 하는 데 필요한 자세에 관한 조급한 충고
정도로 생각하면 되겠습니다.
짧은 글에서 학문에 대한 고답적인 이야기를 늘어놓을 여유가 없습니다. 다만 지적하고 싶은 부분은 여러분이 고등학교를 거쳐서 서울대학에 진학한다는 것은
엄청난 이질적인 전통의 뿌리와 목표를 가진 공간의 간극을 뛰어넘어서는 것을 의미하며, 그만큼 그 공간 안에서 생활태도도 달라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역설적인 이야기가 될지 모르겠으나 학문에 적응하는 방식은 여러분이 서울대학에 합격하기 위해서 저급학교에서 공부했던 방식을 초월해야 합니다.
교수생활을 하는 동안 안타깝게도 이 부분에서 재적응을 하지 못하고 한 동안 방황하거나 시간을 허송하는 학생들을 많이 접했습니다.
학문은 고유한 내재율의 지배를 받습니다. 학문에 입문하는 것은 바로 그 내재율에 맞추어 들어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현행 우리나라의 중등학교교육은 학문을 오도하거나 역행하고 있는 부분조차 많은 듯합니다. 중등학교에서 잘 적응하는 것과 대학에서 학문생활에 잘
적응하는 일은 근본적인 태도의 전환을 요구합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 학문, 지식, 그리고 배움에 대한 전혀 새로운 인식을 필요로 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여러분들이 중등학교에서 익숙해 왔지만 버려야 할 인식과 이제부터 대학에서 여러분이 새롭게 갖추어야 할 인식을 여섯 가지로 대비하여 구체적으로 지적하고자 합니다.
학문하는 재미에 젖어 지식의 의미에 대해 고민해볼 것
첫째, 학문하는 이유에 대한 반성적 성찰이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고등학교에서 여러분은 좋은 대학에 진입하기 위한 시험공부에 치중해 왔을 것입니다.
대학에 진학하는 이유도 다양할 것입니다. 여러분이나 학부모의 대다수는 서울대학이 유망한 직장과 사회적 지위를 얻을 수 있는 입구라는 사실에 큰 비중을 두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서울대학 출신이 국가의 중요한 직책을 대부분 점유하고 있으며, 졸업이 바로 그런 직책의 한 부분을 보장받는 방법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굳이 부인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학문 이외의 것을 얻기 위한 공부는 학문의 세계를 진정으로 체험하지 못한 사람들의 저급한 행태입니다. 그런 것들을 배제하고도 학문은 진리를 추구하는 것 자체에 그 고유한 가치를 부여하는 세계입니다.
이제부터 학문만이 지니고 있는 고유한 맛, 멋, 재미, 뜻, 보람에 흠뻑 젖어 보려고 노력하십시오.
사회적 지위, 보상, 대가는 그런 특수한 가치추구에 부수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유의했으면 좋겠습니다. 공부를 신나게 하다가 자연스럽게 출세하는 수는 있겠지만, 그 반대의 경로는 드물고 또한 위험하다는 말입니다.
둘째,진정한 의미의 지식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반성하기 바랍니다. 중등학교의 교육은 주로 일률적인 교과서를 중심으로
이루어집니다. 교과서는 각 단원으로 나누어지고, 그 안의 중요한 개념에 따라 잘게 세분됩니다. 그 세분된 개념들이 쌓여지면
지식이 된다는 생각이 여기에 작용하고 있습니다. 대학에서조차 저명한 학자들이 만들어 놓은 이런저런 지식을 나의 머릿속에 차곡차곡
하나씩 쌓아놓는 것이 공부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더러는 있어 보입니다. 그러나 지식은 구조이며, 체계입니다. 지식은 사건과 사태들을
보고 해석하는 틀을 발견하는 것이며, 새로운 지식을 습득한다는 것은 동일한 사건이나 사태를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볼 수 있도록
자신을 변화시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속담이 있듯이 어떤 주제 혹은 대상에 자기가 가진
단편적인 생각을 모아서 하나로 정리해 보는 기회를 자주 갖는 것이 중요합니다. 같은 주제에 대해서 여러분은 어떻게 서로 다른
견해를 가질 수 있습니다. 토론과 논쟁은 그 견해들의 약점을 서로 보완할 수 있는 좋은 매체가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정답은 없다 :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찾아 헤매는 것이 중요
셋째, 이른바“정답”에 대한 고정관념을 버리십시오. 중등학교에서는 교과서에 있는 것을 정답으로 간주합니다. 그것에
어긋나는 반응은 가차 없이 오답으로 평가합니다. 여러분이 서울대학에 입학한 것도 좋든 궂든 그 관례에 잘 순응해 온 덕분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관례는 학문에 역행하는 신화로 보입니다. 흔히 진리에 도달한다거나 혹은 그것을 발견하는 것이 학문의
목표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진리는 포착되는 대상이 아니라 추구하는 가치입니다. 학문의 역사에서 확실하고 절대적인 지식은
존재해 본 적이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상대적으로 더 나은 지식만을 확보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사람은 자신이
생각하는 것이 정답으로 착각하면서 생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정답은 항상 불확실성과 오류가능성이 있으며, 그 개선의 정도에
있어서 약간씩의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그 수준은 끝이 없기 때문에 여기서 앞선 사람이든 뒤진 사람이든 누구나 자기가 지금
생각하는 정답에 의문부호를 붙이고 더 나은 정답을 찾아 나서야 할 것입니다.
넷째,지식이 수동적으로 주어진다는 생각을 버리십시오. 교수가 가진 지식을 언어를 통해서 곧바로 전수받을 수 있다는
생각도 포기하십시오. 다시 교과서의 이야기를 해야겠습니다. 중등학교의 생활은 이미 주어진 내용이 있고, 그것을 어떻게 하등의
가감이 없이 머릿속에 집어넣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로 여겨져 왔기 때문에 여러분은 많은 정보를 있는 그대로 저장하는 컴퓨터를
천재의 지위에 올려놓고 선망했는지도 모릅니다. 그 생각은 여러분이 가진 엄청난 잠재능력을 단지 사용하기에 편리한 도구와 비교하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지식을 책을 통해서 읽거나 혹은 강의를 통해서 읽을 때, 여러분이 가진 모종의 생각의 틀에
의해서 능동적으로 여과되어 접수됩니다. 여기에는 암중모색, 발견, 그 이후의 내부적인 감동과 희열이 개재합니다. 그 점이 정보를
단지 복사하는 데 머무는 컴퓨터와 지식을 창조적으로 구성해 내는 인간의 두뇌의 엄청난 차이입니다. 그 차이에 주목하기 바랍니다.
학자들이 만들어 낸 지식들의 최종의 결과를 맹목적으로 모방하려고 하지 말고, 그 창조의 과정을 재생하여 여러분 자신의 지식으로
소화시키는 과정을 체험하려고 노력하십시오.
조급성을 버리고 기초부터 천천히 시작 : 주관적인 감식 능력을 기르도록 노력할 것
다섯째, 학문에는 첩경이 없다는 것을 유념하기 바랍니다. 지식에는 엄청난 수준의 차이가 있습니다. 중등학교에서는 그
개인차를 인정하지 않고 오직 교과서라는 한 가지 수준에 일치하도록 요구했기 때문에 지식을 자신의 수준에 맞게 단계별로
차근차근하게 공부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습니다. 그러나 대학의 커리큘럼에는 다소간 그 선택의 여지가 있습니다. 학문공동체에서
인정하는 최고의 지식을 가진 교수들의 높은 지식을 일시에 획득하려는 목표에 도전하는 것은 많은 좌절만을 가져올 것입니다. 너무
어려운 것을 조급하게 공부하려고 하지 말고 자신의 수준에 맞춰 기초에서부터 천천히 단계를 밟아 마스터해 나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당장 구미에 맞는 지식을 제공하는 사람을 좋아하거나 혹은 그런 부류의 강의만을 좇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배움의
가치가 있는 지식은 여러분 각자가 지금의 상태에서 당장 이해할 수 없으나 조금 노력을 하면 이해할 수 있는 아리송한 내용입니다.
최선의 노력으로 자신의 현 단계보다 한 발짝 앞으로 나아갈있는 수준의 지식을 목표삼아 공략하기 바랍니다.
여섯째, 자신의 지적 발전에 대한 최종적인 검증을 자신의 판단에 의존하려고 노력하십시오. 중등학교에서는 이런
주관성을 이른바“객관성”이라는 말로 위험시하거나 억압하거나 금시기해 왔을지도 모릅니다. 지식을 검증하려면 객관적인 실험이 있어야
된다거나 혹은 지식의 습득여부는 누구나 그 결과에 대해서 승복할 수 있는 객관적인 방법에 의해서 평가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여러분은
내내 주입받아 왔습니다. 그러나 객관성이라는 개념 자체도 주관의 일부이며, 더 나아가 그것이 매우 위험한 주관이라는 점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학문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객관적인 사실들을 올바로 판단할 수 있는 주관적인 감식력의 수련입니다. 그 감식력은
각 수준의 지식을 착실하게 단계별로 습득하면서 스스로 지식을 수정해 나가면서 습득될 수 있습니다. 이는 다양한 음식을 먹어본
사람은 더 나은 음식이 무엇인지를 스스로 아는 방법과 이치상 같습니다. 이처럼 여러분이 추구하는 진리에 대한 주관적 판단의 능력을
내부에 장치했을 때 비로소 여러분은 기존의 문화적 관례나 전통, 혹은 주위 사람들의 칭찬과 비난에 장단 맞춰서 부화뇌동하지 않고
세상에 대한 참된 판단을 내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2006년 열린지성 3호]
'ysl* 컨텐츠 > 그한마디'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개업예배 순서 (0) | 2015.07.26 |
---|---|
20대들아, 대한민국의 미래는 필리핀이다'다 (1) | 2015.07.12 |
[정철근의 시시각각] 영화보다 사실이 더 슬픈 연평해전 (0) | 2015.07.10 |
저는 연평해전 박동혁 병장의 주치의였습니다 (1) | 2015.07.10 |
[특별기고] ‘만년의 양식’을 찾아서 / 김병익 (0) | 2015.03.15 |
신입생에게 - 오세정 (0) | 2015.01.11 |
대학신입생에게 주는글 - 홍세화 (0) | 2015.01.11 |
중앙일보 2015 새해 특별기고 김훈 (0) | 2015.01.02 |
[양선희의 시시각각] 알리바바를 보는 허탈함에 대하여 (0) | 2014.09.25 |
[노트북을 열며] 미치도록 본질 (0) | 2014.08.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