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신입생에게 주는글 - 홍세화
귀족 예비군에게
홍세화 (한겨레신문 편집위원)
솔직히 말하자.
나는 서울대에 입학한 학생에게 축하한다는 말을 할 수 없다.
나름대로 민중적 지향성을 유지하려고 애쓰는 사람이 어떻게 장래 한국의 사회귀족이 될 가능성이 높은 사람에게 축하 메시지를 보낼 수 있겠는가. 다만 자기성찰을 게을리하지 말 것을 당부할 뿐이다.
오늘 이 땅을 지배하고 있는 사회귀족들은 사회의 엘리트로서 가져 마땅한 능력도 부족한 데다 사회적 책임감은 아예 갖고 있지 않다. 그대 또한 자기성찰을 게을리한다면 그런 선배의 전철을 밟을 것이다.
그대는 머리가 좋거나 배경이 좋아서 치열한 학벌경쟁에서 승리하여 서울대생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시험문제를 잘 풀고
주입식 교육, 암기위주 교육에 잘 적응하는 능력을 갖고 있다는 점을 말해줄 뿐, 그대가 사회문화적 소양이나 인문학적 상상력을 갖고
있다는 점을 말해주지 않는다.
그대 자신을 돌아보라. 그대는 인간에 대해, 그리고 사회에 대해 철저하게 무지하다. 그럼에도
자신의 무지를 인식하지 못한 채 권력의지와 기름진 생존을 위한 경쟁에서 우위를 점한 것에 자족함으로써 결국 이 천박한 자본주의
사회의 지배층에 속하게 될 것이다.
아직 젊은 그대가 인간적 감수성을 품고 있다고 믿고 말하건대, 실로 놀랍지 않은가? 인간은 소우주라 했거늘, 남과의 경쟁에서
승리했다고 은근히 오만해져 자기성숙의 긴장을 이완한다는 사실이. 그리하여 사회문화적 소양도 갖추지 않고 인문학적 바탕도 없는
사람들이 이 사회를 지배한다는 사실이. 바로 오늘 한국사회의 모습이 그러하다.
스스로 머리가 좋다고 믿는 사람일수록 가슴에 새겨둬야 할 게 있다. 인간은 본디 합리적인 동물이 아니라 합리화하는 동물이라는
점이다. 우리 사회에서 머리 좋고 요령에 뛰어나다는 것은 자기 합리화에 뛰어나다는 것을 뜻한다. 그래서 그대 또한 장래에
20:80의 사회에서 20의 상층을 차지한 자신에 만족하고 80의 기본적 생존권에도 무관심한 채 필드에서 골프채를 휘두르는 자신을
합리화하는 아흔아홉 가지 이유를 발견하게 될지 모른다. 그리고 마침내 그런 합리화조차 하지 않게 되는 것은 존재가 의식을
규정하기 때문이다.
부디 남과 경쟁하지 말고 그대 자신과 싸우라. 스스로 사회귀족이 되는 길보다 사회귀족 체제에 맞서 싸우는 길을 택하길 바란다.
2006년 3월 6일 대학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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