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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만년의 양식’을 찾아서 / 김병익

등록 : 2015.02.05 18:37 한겨레 신문 특별기고


이제 80 산수(傘壽)의 자리에 다가선 내게 책들은 입을 모아 이 ‘높이 쌓인 나이’에 ‘평온한 적요’를 권하고 있었다. 평정(平靜), 그래 ‘노화 방지’가 아니라 ‘노화의 기술’이다. 오에 겐자부로가 에드워드 사이드와 나눈 글에서 ‘고요한 비탄’을 삼키는 ‘만년의 양식’이라고 쓴 것과 비슷한 태도일 것이다. 해가 말띠에서 양띠로 바뀌는 즈음 내가 깊은 울림을 받으며 읽은 책은 헬렌 니어링이 쓰고 이석태가 옮긴 <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였다. ‘이진순의 열림’(<한겨레> 2014년 12월27일치)에서 도드라지게 소개된 이 책의 저자 니어링은 내게 그저 귓결로 스친 이름이었지만 옮긴이는 20여년 전 고 황인철 변호사를 위한 일로 여러 차례 만난, 그때부터 신뢰와 존경을 품어온 변호사로 최근 문제의 세월호 진상조사위원장의 책임을 맡은 분이었다. 지난해가 내게는 ‘희수’(喜壽: 77세)여서 무언가 즐거운 해가 되겠다고 기대했는데, 봄에는 이 세상의 죄 많음을 무구한 죽음으로 증거한 안타까운 바다 참사로 시달렸고 가을에는 회식 자리에서마다 “우리들의 남은 젊음을 위하여, 건배!”를 외치던 쉰 해 묵은 친구가 작고해, 내 정서는 외려 ‘비수’(悲愁)의 한스러움에 젖고 있던 참이었다. 길에는 낙엽이 뒹굴고 밤의 어둠은 길었다. 처세훈이며 힐링북에 경멸을 갖고 있던 내가 저절로 집어든 것들이 늙어감과 죽어감에 대한 에세이들이고 그것들은 그동안의 내 무심한 삶을 서럽게 졸여왔다. 이런 유의 책읽기가 니어링의 생애까지 이른 것이었다.


니어링의 글에서 먼저 꽂혀온 구절은 “그이는 오랫동안 최선의 삶을 살았고 일부러 음식을 끊음으로써 위엄을 잃지 않은 채 삶을 마쳤다”란 대목이었다. 나는 그 ‘삶의 마침’을 참관하기 위해 찬찬히 책장들을 넘겼고 두 부부의 유다른 삶의 방식에 감탄하면서 마침내 200쪽을 넘겨서야 스콧 니어링의 마지막 장면을 만날 수 있었다. 육체의 쇠약을 느껴야 했던 그는 100세의 생일을 맞으며 “나는 죽음의 과정을 예민하게 느끼고 싶다”며 “되도록 빠르고 조용하게 가고 싶다”는 희망을 밝혔다. 처녀 시절 크리슈나무르티의 연인이었던 헬렌은 “사람이 죽는 방법은 그 사람이 살아온 삶의 방식을 반영해야 하는 것이라고 보았고 나는 기쁜 마음으로 그이가 품위 있게 그렇게 하도록 도왔다”고 고백했다. 스콧은 식음을 끊었고 한달 후 “천천히 천천히 그이는 자신에게서 떨어져 나가 점점 약하게 숨을 쉬더니 나무의 마른 잎이 떨어지듯이 숨을 멈추고 자유로운 상태가 되었다.”


이 ‘자유로운 상태’로의 삶의 종말은 니체에게 ‘자유죽음’(Freitod)을 가리킨다는 것을 김희상이 옮긴 두 책 <늙어감에 대하여>와 <죽음을 어떻게 말할까>에서 배웠다. 쉰여섯 한창나이에 광기 속에서 삶을 마감한 이 철학자는, 단지 경멸받아 마땅한 조건 아래 치르는 ‘부자유한 죽음’과는 달리 인생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고른 죽음을 ‘자유죽음’으로 규정했고 소크라테스를 그 모범으로 꼽았다 한다. 그 실제의 자세한 장면이 윌리 오스발트의 <죽음을 어떻게 말할까>에 기록되고 있다. 저자의 90대 아버지는 요도관의 병 따위에 시달리면서 “그만하면 인생을 충분히 맛보았다”고 만족해하며 ‘자유죽음’을 선택한다. 그는 ‘조력자살단체’에 신청하고 자신이 마지막을 취할 날짜와 시간, 장소를 결정한다. 친구들, 가족들을 차례로 불러 ‘작별 식당’에서 마지막 회식을 하며 지난날들을 회상하고 화해하며 축복을 나눈다. 마침내 “죽기에 얼마나 좋은가 싶은 화창한 봄날” 아버지는 “노룻빛 정장을 반듯하게 차려입고 거기에 어울리는 넥타이를 매고 인사를 나눈 뒤” 침대에 누워 드디어 ‘죽음의 천사’를 마신다. 아버지의 “맥박은 갈수록 약해지다가 마침내 생명의 표시도 멈추었다.” 사람들은 아버지의 그 존엄스런 종말에 대해 “당신의 용기를 칭송했으며 살아계실 때의 품위와 잘 어울렸다”고 경의를 표했다. 그 엄숙한 장면에 앞서, 나는 29세의 젊은 나이에 악성뇌종양으로 희망을 버리고 예고한 날 존엄사를 택한 미국 여성에 관한 기사도 유다른 감정으로 접하기도 했었다.


봄이 문턱에 서서(立春) 들어올 참이고 갖가지 생명이 피어날 준비를 하고 있는 이 새날들에, 죽음을, 그것도 다른 좋은 말로 바꾸며 자살을 이야기하는 내 고단한 심술을 이해해주기를 바란다. ‘늙는다’는 말을 되도록 피하고 ‘나이가 많아진다’고 써오던 내게 이제 한살 더 얹어진 ‘연세’에 세월의 무게를 더 무겁게 느끼지 않을 수가 없게 된 것이다. 장 아메리는 <늙어감에 대하여>에서 “늙음 혹은 늙어감이 몸과 영혼이 느끼는 시간의 무게”라고 무게 있게 표현하고 있지만 사실 내게 그것은 몸의 불편한 무거움과 정신의 엷어감에 다름없는 일이었다. 아메리는 그 무게를 “자신 안에 쌓인 인생의 기억”이라고 좋게 말하고 있음에도 그 실상은 “자기 권태와 자기 보상을 동시에 느끼는 풀 길 없는 아포리아”이고 그래서 ‘불치의 병’이며 “세계를 잃어가는 아픔”에 젖지 않을 수 없게 됨을 인정하고 있다. “역동적 현실로부터의 추방 혹은 등 떠밀림”을 이제 사실로서 받아들여야 할 참에 이르렀음을 나는 여기서 또 깨닫는다. 우리가 끝내 당해야 할 종말이란 이 노령으로부터 시작되는 갖가지 과정들에서 디뎌야 할 단계들의, 몽테뉴의 이른바 ‘최종 목표’이다. 그는 “인간의 노쇠야말로 가장 음험하고 가증스런 유린”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이상하게도 10대 후반에는 영원에 대한 종교적 갈망을 느꼈고 신을 버린 20대 중반에는 소멸에의 열망에 젖었으며 30대에는 때 이른 ‘등 떠밀림’의 다른 말일 ‘체념’에 익숙해지고 있었다. 시인 천양희는 “돌은 쌓으면 탑이 되는데/ 삶은 왜 층층이 쌓여도 탑이 안 되느냐”고 <그는 질문을 계속했다>에서 묻고 있지만 이제 80 산수(傘壽)의 자리에 다가선 내게 책들은 입을 모아 이 ‘높이 쌓인 나이’에 ‘평온한 적요’를 권하고 있었다. 평정(平靜), 그래 ‘노화 방지’(anti-aging)가 아니라 ‘노화의 기술’(art of aging)이다. 일본 작가 오에 겐자부로가 에드워드 사이드와 나눈 글에서 ‘고요한 비탄’을 삼키는 ‘만년의 양식’이라고 쓴 것과 비슷한 태도일 것이다. 그것은 빌헬름 슈미트의 <나이든다는 것과 늙어간다는 것>을 옮긴 장영태 박사가 그 ‘평정’을 중세의 현자 에크하르트가 ‘내려놓음’이라 써서 ‘지금의 삶을 좀더 수월하고 풍성하게 해주는 정신적 원천’으로 설명한 ‘마음의 평정’을 바라며 노년을 “볕 좋은 테라스에서의 삶”이 되기를 소망하는 것과도 비슷한 그림일 것이다. 현자 니어링도 현대인의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11가지 권고 중 두번째로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라”고 권하고 있었다.


이 서늘한 말들은, “오래 살기를 바라면서 늙으려 하지는 않는다”는 세네카의 빈정거림처럼 힘든 몸의 욕망을 내려놓고 내면의 고요함으로 오늘의 늙은이들에게 99세 긴 나이의 숫자와 팔팔하기 힘든 그 연세 육체의 괴로운 형편 사이에 몸의 욕망을 내려놓고 내면의 고요함으로 끼워넣기를 권하고 있다. 누구도 경험할 수 없는 죽음은 고통스런 불안이고 일상으로 겪는 노화는 애달픈 불평이어서, 나이 들수록 게으르고 무모해지는 타성에 이처럼 아름다운 평정의 마음을 바라는 것은 내게 분명 과람한 욕심이리라. 그럼에도 피할 수 없이 한 살 보탠 만큼 더 무거워진 나이의 무게를 감당하기 위해 달리 기댈 데도 없어지고 말았다. 하기에, 감히 소망으로나마 새해 머리맡에 어떤 모습으로든 그 ‘평정’이란 걸 앉혀두고 싶은 내 가난한 욕심이 허락되기를 소망한다. 우리 사회와 법, 의료계와 삶의 정서도 존엄사나 ‘생전유언’(living will)으로, 태어남은 우연이지만 물러남은 자유로운 선택일 ‘인간의 최종 권리’가 보장되기를 마지막 버킷 리스트로 남겨둘 뿐이다.


김병익 문학평론가

Posted by wizys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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