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가 어려워도, 정치가 꼬여도 민족의 자존심 숭례문 복원이 진행되고 있었다. 세상 사람들이 뭐라하든 묵묵히 문화재 보존과 건축을 지켜온 이들이 일하고 있었다. 중앙일보는 이들의 모습을 스케치한 기사를 연말에 실었다. 외국 같았으면 숭례문 복원을 따라가는 다큐멘터리나 영화가 제작되었을 텐데.... 중앙일보 정도라면 시리즈 기사나 단행본을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중앙 M&B를 분사한 것이 문화사업이라고 떳떳이 말할 수 있을지 모른다. 짧은 기사지만 가슴이 찡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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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2월 11일 새벽 숭례문이 무너져내렸다. 610년의 역사가 다섯 시간 만에 파편이 됐다. 사람들의 가슴도 타버렸다. 주춤거리던 경기가 겨울들며 싸늘해졌다. 사람들은 마음까지 얼어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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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해 속에서 찾아낸 부서진 잡상(위)과 숭례문 현장(아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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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10일 오전 소나무 한 그루가 넘어갔다. 숭례문 무너지고 딱 열 달 뒤였다. 강원도 삼척시 황장산 자락이었다. 110살짜리 적송이었다. 아흐레 동안 열아홉 그루가 더 넘어갔다. 그중 일부는 숭례문의 몸이 된다.
이 땅의 흙과 나무와 돌이, 숭례문의 피와 살과 뼈가 될 준비를 하고 있다. 사람들의 손길이 바삐 움직이며 거기에 숨을 불어넣고 있다.
숭례문 복구 현장을 돌아봤다. 나무를 베고, 그 나무를 다듬고, 잔해 속에서 찾은 조각을 맞추고, 구부러진 못을 펴는 이들의 얼굴은 밝았다. 절망이 누운 자리에 희망이 피고 있었다.
올 week& 신년호 1면은 광화문이었다. 공교롭게 송년호는 숭례문이다. 문으로 한 해를 열고 문으로 한 해를 닫는다.
제자리 찾는 광화문처럼, 다시 서는 숭례문처럼, 내일 뜨는 해는 희망의 해다.
강릉·삼척=전수진·이도은·이영희·안충기 기자
사진=권혁재 전문기자 shotgun@joongang.co.kr>
“얘들이 숭례문 가면 이런 영광이 없지”
소나무 베기 한 평생 이종렬씨
숲
속에 들어서자 휴대전화 안테나 막대가 사라진다. 여기는 삼척시 준경묘. 태조 이성계의 5대조 양무장군의 묘역이다. 묘에 이르는
길은 좁고 위태롭다. 지프도 헐떡일 만큼 험하고 가파르다. 숲에는 아름드리 소나무들이 빼곡하다. 이 고즈넉한 숲 속에 저벅저벅
발소리를 내며 도끼를 둘러멘 사내들이 나타났다. 숭례문의 새 기둥이 될 소나무를 베러 나선 이들이다. 우두머리 이종렬(55)씨가
목장갑 끼고 장화 신고 성큼성큼 산판(山坂)을 오른다. 나무와의 한판 대결, 곧 시작이다. 이달 17일 아침의 풍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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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렬씨에게 휴대전화를 걸었더니 ‘청춘을 돌려다오’ 멜로디가 흘러나왔다. 이땅 곳곳의 문화재에 그의 청춘이 묻어있으니, 청춘은 갔지만 아주 간 것이 아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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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싸움
큰
나무를 베려면 베는 이의 배포도 커야 한다. 벌목 현장에 나온 신응수 대목장이 말한다. “크고 담대한 사람은 큰 나무를 베고,
작고 겁 많은 사람은 작은 나무를 베죠.” 100년 넘게 살아온 소나무의 기상이 만만치 않다. 고개를 끝까지 젖혀야 꼭대기가
보일락 말락 한다. 이종렬씨가 자신보다 15배는 큰 나무를 슬쩍 올려다본다. 기싸움이다. “나무한테 지면 그 나무를 벨 수가
없어요.” 그의 솜씨는 정평이 났다. 신 대목장도 “이종렬씨에게 맡겨 놓으면 시원하다”고 말한다.
이씨가 생각하는
비밀병기는 자신의 눈썹이다. 삐죽삐죽 위로 뻗친 짙고 검은 눈썹이 호랑이 형상이다. “눈썹이 이러니 나무들이 무서워하죠. 이발소
가서도 눈썹만큼은 절대 건드리지 못하게 합니다.” 손에 톱을 쥔 지 30년이 훌쩍 넘었다. 그간 넘어뜨린 나무가 수천 그루는 될
거란다. 그의 손을 거친 많은 소나무가 창경궁을 비롯한 숱한 문화재의 복원에 쓰였다.
화
마에 스러지는 숭례문을 보며 발을 구르기는 이씨도 마찬가지였다. 저 문을 다시 세울 때 힘을 보태고 싶었다. 그런데 기회가
왔다. 준경묘에서 벤 나무의 일부를 숭례문에 쓰기로 했고 이씨가 그 일을 맡은 것이다. 이번 벌목의 의미가 특별한 이유다. 벌목
첫날 도끼를 든 이씨 앞에서 "어명이요”소리가 울려퍼졌다. 나라의 일이니 그리 알라는 뜻이었다. 나무의 영혼을 위로하는
‘고유제’도 올렸다. 내일이면 일이 끝난다. 문화재청과 전주이씨 준경묘 봉향회가 허가한 건 모두 20그루다. 39만㎡에 이르는
준경묘의 소나무들의 품질은 이 땅에서 최고 수준이다. 조선시대엔 왕실만이 이곳의 소나무를 베어 썼다. 궁궐을 짓고 왕가의 관을
짜는 데 쓰였다. 1961년 숭례문 복원 당시에도 이곳 소나무가 기둥으로 들어섰다.
나무에서 눈을 뗀 이씨가 자리를 옮겨 톱을 잡는다.
천둥소리
일
의 시작은 톱 손질이다. 톱날을 가는 둥근 줄을 들고 전날 벤 나무의 그루터기에 앉아 손질을 시작한다. 기름으로 돌리는
엔진톱이다. 도끼와 손톱으로만 작업하던 70년대에 비하면 세월 참 좋아졌다. 예전엔 아름드리 나무 하나 베려면 이틀은 족히
걸렸다. 이날 이씨가 나무를 넘기는 데 든 시간은 짧게는 3분, 길어야 10분을 넘지 않았다.
톱 손질도 끝냈다.
술을 한잔 청한 이씨, 그런데 받아 든 한 사발의 막걸리를 나무 주위에 두루 뿌린다. “칼날이 들어가면 얼마나 아프겠어.
술이라도 한잔 해야지.” 처음부터 톱을 대는 게 아니다. 벨 부분의 탈피 작업이 우선이다. 도끼로 타닥타닥 껍질을 벗겨내는
동작이 여간 재빠르지 않다. 이내 소나무의 속살이 드러난다. 나무는 쓰러뜨릴 방향이 따로 있다. 다른 소나무가 있는 쪽은
피한다. 그래야 베는 나무도, 이웃 나무도 덜 다친다. 톱이 들어가는 각도를 조절해 나무가 쓰러질 방향을 조절하는 걸 ‘방을
뜬다’고 한다. 경험 풍부한 장인의 손엔 그 감각이 배어 있다. 바람 부는 방향도 계산에 넣는다. 여기서 벌목꾼의 실력이 판가름
난다. 잘 자란 나무는 대개 비탈에 서 있어 작업은 그만큼 어렵다. 이씨가 마주한 나무도 그랬다.
이씨가 나무에
기댄다. 넘어지지 않기 위함이다. 윙~ 엔진톱이 돌며 톱밥이 눈이 되어 날린다. 나무 주위에도, 이씨의 머리와 어깨 위에도
톱밥이 수북이 쌓인다. 빙 둘러가며 톱질을 하는 중간중간 이씨는 고개를 들어 나무 위를 본다. 나무가 넘어갈 방향을 가늠하기
위해서다. 솔잎이 미세하게 흔들리더니 이내 ‘뚜욱’ 소리가 난다. 곧 넘어간다는 신호다. “비켜요! 아님 죽어.” 주위의
일꾼들이 외쳐댄다. ‘쩍’ 하는 소리가 공중을 가르더니 삽시간에 나무가 쓰러진다. 허공으로 치솟아 날던 나무가 턱 하며
떨어진다. 그루터기에서 맵싸한 향기가 피어오른다. 성공이다.
살아 백 년, 죽어 천 년
이날 넘어간 세 그루 모두 110살이 갓 넘었다. 소나무로선 한창이다. 나무를 어느새 ‘애들’이라고 부르는 이씨가 담배를 한 대 물었다.
“
나무한텐 미안해요. 그래도 ‘내가 널 좋은 곳으로 보내주마’라는 생각으로 하죠. 여기에서 백 년을 살았으니 죽어 천 년을 더
살아라라고 빌지요. 애들이 조금이라도 덜 다치도록 항상 신경 쓰고요.” 달가운 일은 아니었다. 나무를 벤다는 게 꺼림칙했다.
“즐거운 일은 아니에요. 뜻이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거지.”
나무 많은 명주군 사기막에서 나무와 놀며 자란 이씨,
자신도 모르는 새 나무 베는 일을 하기 시작했다. 나무 덕에 자식 셋 공부시키고 가정 건사하며 살아왔으니 나무는 그의 삶이고
밥이다. 첩첩산중에서 멧돼지를 만나 목숨을 잃을 뻔한 적도 있다. 슬쩍 가리는 왼손을 보니 약지가 구부러졌고 검지 손톱은
새까맣다. 미끄러진 톱날에 다친 흔적이다. “작업하다 보면 흔한 실수”라며 그가 멋쩍게 웃었다. “항상 조심해야지. 내공이
있어야 해요.”
일을 끝내고 소주 한잔 걸치던 이씨, “그래도 좋은 곳으로 가니 다행”이라는 말을 되뇌었다.
“내 손이 간 나무가 숭례문에 올라간다고 생각해 봐요. 저도, 얘들도 영광도 이런 영광이 없지. 숭례문이 다시 잘 일어났으면 좋겠어요. 그럼 얘들도 영원히 사는 거니까.”
삼척=전수진 기자
전국의 소나무가 모인다
숭
례문 같은 큰 문화재에 쓸 만한 소나무를 찾기는 쉽지 않다. 높은 산의 7부 능선 이상에서나 간간이 볼 수 있다. 오랫동안 많이
베어낸 탓이다. 목재 중에서 최상은 적송이다. 그중에서도 최고의 나무들이 자라는 지역은 백두대간 줄기의 금강산에서 울진·봉화
지역까지다. 바람 세고 눈 많은 곳이다. 여기의 소나무는 다른 데 것보다 줄기가 곧고, 마디가 길고, 나이테가 좁고, 속도
붉다. 생육 조건이 좋지 않아 더디게 자라지만 그만큼 재질이 단단하다.
나무 베기 가장 좋은 때는 잎이 다 지고 난
뒤의 가을이다. 목재로 쓸 만한 소나무를 찾기 쉬운 때라서다. 베어낸 나무 운반은 지금이야 힘 좋은 헬기가 있다지만, 길 험했던
예전엔 보통 일이 아니었다. 백두대간 서쪽에서는 한강이나 낙동강 줄기까지 옮겨 강물에 띄워 날랐고, 동쪽에서는 바다까지
끌어냈다. 함경도와 울릉도의 소나무까지 바다를 돌아 서울로 갔다. 제재소로 옮긴 나무는 껍질을 벗겨 말린다. 2, 3년은 말려야
목재로 쓸 수 있다.
나
무는 생김과 크기 굵기에 따라 쓰임새가 달라진다. 곧고 굵은 나무만 좋은 게 아니라는 말이다. 한옥의 지붕과 처마의 유려한 선은
굽은 소나무에서 나온다. 수입 소나무는 재질이 들쭉날쭉하다. 더운 지방에서 자란 나무는 나이테 간격이 3㎝가 되는 것도 있다.
이런 나무는 물러 오래가지 못한다. ‘살아 천년, 죽어 천년’이라는 소나무다. 실제 소나무의 자연수명은 300년 정도로 본다.
재
미난 이야기가 하나 있다. 속리산 정이품송의 나이 얘기다. 이 나무엔, 1464년 세조가 법주사로 행차할 때 어가(御駕)가
걸리지 않게 가지를 들었다는 전설이 서려 있다. 늙어 가지가 처질 정도면 그때 나이 이미 150년은 됐을 거고, 그렇다면 지금
700살은 먹었다는 말인데, 이게 가능하냐는 거다. 그러고 보면 웬만한 마을마다 하나씩은 있는 500년 넘은 나무들과 거기에
붙어 있는 전설들도 마찬가지겠다. 나무 전문가 고규홍씨는 사람들이 오래된 나무를 지키려고 전설을 만들어 퍼뜨렸을 거라고 본다.
전설 속에 자연보호의 순기능이 들어 있는 셈이다.
숭례문 복구에 쓰라고 많은 이들이 소나무를 내놨다. 이 중 12곳의 167그루가 최종 선별됐다. 불에 타버린 목재의 절반쯤 되는 양이다. 강릉·영월·평창·영덕·봉화·보령·서천·태안의 나무들이다. 서울 남산의 소나무도 있다.
전국의 소나무가 모이는 건데, 숭례문은 역시 ‘나라의 문’이다.
강릉=안충기 기자
지금 숭례문 복구팀원들은 …
재고, 나누고, 붙이고 … 하루 해가 짧다
경
복궁 고궁박물관 주차장 앞에서 한참을 서성댔다. 한쪽에 공사장인가 싶은 가건물들이 있다. 입구로 들어가니 크고 작은 컨테이너
건물 다섯 개가 있다. 어수선해 보이지만 숭례문 복구의 또 다른 현장이다. 건물 세 개에 불에 타고 남은 부자재들이 보관돼
있다. 현재 이들을 분류하고, 측정하고, 다시 붙이는 작업이 한창이다. 내년 2월까지 끝낼 예정이다. 추운 날씨에도 손길이 바쁜
이유다.
보관 컨테이너를 여니 불탄 목재들이 보인다. 5월에 이곳으로 옮겨 살충·살균을 위한 ‘훈증 처리’를
마쳤다. 바닥 한쪽엔 플라스틱 용기가 가지런히 놓여 있다. 그 속에 돌 조각들이 있다. 장갑을 낀 두 사람이 그것들을 조심스레
옮기고 스티커를 붙이고 있다. 깨진 숭례문 잡상(雜像·지붕 위 동물 석조)이란다. 본래 모습을 알 수 없을 만큼 심하게 깨진
것도 있고, 형태가 살아있는 것도 있다.
숭례문의 잡상은 모두 67개였다. 잡상 한 세트가 2층 지붕엔 8개,
1층엔 9개다. 동서남북에 각각 위치하기 때문에 총 68개지만, 이 중 1개는 화재 전 없어진 상태였다. 현재 분류작업이
80%쯤 끝나 50개는 짝을 맞춰놨다. ‘조각 맞추기’를 하고 있는 안송이(22)씨와 김지영(22)씨는 한국전통문화학교에서
보존과학을 전공하는 학생들이다. 졸업을 앞두고 문화재 보존 전문업체 C&T 소속으로 현장실습에 나섰다.
“잘게 부숴진 조각들의 제자리를 찾기도 까다롭지만, 같은 모양의 잡상이라도 동서남북 위치에 따라 모양이 조금씩 달라 애를 먹어요. 이럴 땐 부분적인 두께나 균열도를 따져봐야죠.”
‘
문화재 복원=나이 지긋한 장인’이라는 막연한 생각 때문인지 그들이 특별해 보였다. 안씨는 아버지가 문화재 보수 일을 하는 덕에
어릴 때부터 박물관을 제집 드나들 듯 했단다. 처음에는 큐레이터가 되려다 진로를 바꿨다. 김씨도 어릴 때부터 역사에 관심이
많았다. 관련된 직업이 교사 등 몇 가지밖에 없어 아쉬워하다 보존과학이라는 분야를 알게 됐다.
이들이 내년 1월
분류작업을 마치면 본격적인 접착이 시작된다. 먼저 손으로 가접합을 하고, 접착 부위에 약품을 발라 경화처리를 한다. 이것이
굳으면 접착제를 붙이는데, 문화재 보존 처리에 쓰이는 접착제의 종류는 수십 가지다. 접착 뒤 남는 파손 부분은 합성수지로 메워
넣는다. 큰 덩어리가 아예 없는 경우엔 ‘성형’이 필요하다. 질감·색감 등을 비슷하게 살려 제작한다. 한 개당 하루쯤 걸릴듯
싶다. C&T의 김영택(31) 과장은 “똑같이 만들 수도 있지만 일부러 그렇게 하지 않는다. 보존은 ‘모작’이 아니기
때문”이라며 “후세가 보존 처리를 할 때 현재의 정보를 알 수 있게 만들어 ‘가역성’을 두는 것이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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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부분에 있던 나무들일까. 불에 타 없어지고 그을렸지만 작은 단서 하나라도 놓칠 수 없다. 나무는 죽어서도 말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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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
관 컨테이너 밖에선 전통방식의 단야(구부러진 못을 펴는 일)가 한창이다. 볏짚으로 만든 작업실에선 벌겋게 달궈진 못이 망치질을
할 때마다 곧게 펴진다. ‘땅땅땅 따땅’ 소리가 명쾌하다. 단야는 단순하지만 내공이 필요한 일이다. 일정한 속도의 풀무질로
바람을 일게 해 참숯을 800도로 달군다. 5분쯤 화로에 넣은 못을 꺼내 모루에 올리고 두들기면 뭉툭한 못도 금세 뾰족해진다.
달구고 두들기고 식히는 일을 몇 번씩 하는 탓에 하루 작업량이 50~70개 정도밖에 안 된다. 제철 전통 장인인 음성 철박물관
이은철(52) 연구원의 이마에 영하의 날씨에도 땀이 흐른다. “속도가 일정해야 불이 좋다”며 옆에서 풀무질을 하는 전수자
이태영(24)씨를 가르치기도 한다. 이씨는 “1961년 보수할 때부터 이미 대량 생산된 못을 썼다”면서 “일본에서는 신사·사찰
보수를 위해 전통 일본식 못을 만드는 제철소가 따로 있다”며 아쉬움을 나타냈다. 단야 작업을 마친 철정은 녹이 슬지 않게 약품
처리를 하고 코팅 작업을 거친다. 얼마나 재활용될지 알 수 없지만 복구에 쓰이지 못한 철정은 ‘숭례문 전시관’에 전시할
계획이다.
이도은 기자
하나 둘 밝혀지는 설계의 비밀들
“
자, 이쪽 끝에서 시작합니다. 사이즈 큰 소리로 불러주세요.” 숭례문 화재 현장에서 실려온 목재들이 보관돼 있는 컨테이너 한쪽
구석, 측량자와 스케치북을 든 젊은이들이 바쁘게 오고 간다. 불탄 부재들의 피해 현황을 조사하고 있는 ‘탄화부재 실측팀’이다.
재활용에 앞서 목재들이 화재로 인해 얼마나 훼손됐는가를 있는 그대로 조사하는 것이 이들의 임무다.
숭례문 화재
현장에서 옮겨진 부재들은 조그만 나무토막까지 합쳐 모두 3000여 점. 실측팀은 이들 부재를 하나하나 분류해 불에 탄 부분의
넓이를 재고, 탄침을 찔러 넣어 탄화도(불에 탄 정도)를 측정한다. 문화재 실측 전문업체인 삼성건축사사무소에서 나온 실측팀은
모두 6명이다. 대부분 건축을 전공하고 문화재 실측에 대한 자격증을 가지고 있다. 추위와 싸워가며 강행군해 온 덕에 한 달이 채
안 되는 동안 전체의 30% 정도를 끝냈다.
실측팀은 훼손 정도 파악과 함께 이 부재들의 본래 위치를 알아내는
‘퍼즐 게임’도 해야 한다. “커다란 덩어리들은 모양이나 장식을 보면 어느 부분인지 쉽게 알 수 있죠. 하지만 손상이 심한
부재들의 경우엔 겉모습만으론 쓰임새를 알 수 없어 자료를 일일이 검토해야 합니다.” 한보만 팀장의 설명이다. 다행히 2006년
같은 사무소에서 작성한 숭례문 정밀실측조사 보고서가 큰 도움이 되고 있다. 이번 화재 현장 수습 과정에서 도입된
‘RFID(Radio Frequency Identification)시스템’도 유용하다. ‘RFID’는 부재 하나하나에 전자태그를
붙여 리더기를 갖다 대면 발견 위치와 당시 상태 등을 알 수 있도록 한 시스템이다.
법주사 팔상전, 서울시청 본관
등을 실측했던 베테랑들이지만 불에 탄 문화재를 측량하는 경험은 이번이 처음. 그만큼 새롭고도 의미 있는 도전이다. 실측 과정에서
그동안 추측만 가능했던 숭례문 설계의 비밀이 하나 둘 밝혀지고 있다. 실측팀의 자문을 맡고 있는 한국건축역사학회 류성룡
교수(고려대)는 “겉모습만으론 알 수 없던 숭례문의 맞춤이나 조립 방식 등을 파악하는 기회가 됐다”며 “숭례문과 조선 초기
건축양식에 대한 중요한 자료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영희 기자
사람이든 자재든 최고를 모아라
숭
례문 복구 공사는 2010년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하지만 그전에 준비해야 할 것이 많다. 몸체를 구성하는 나무도 중요하지만
기와·현판·단청 등을 원형 그대로 되살리는 것도 중요한 과제다. 문화재청은 ‘중요무형문화재 등 우리나라 최고 기술자들을 참여시켜
전통 기법과 도구를 사용해 복원한다’는 원칙을 세웠다.
숭례문을 떠받치고 있던 육축(석축)은 다행히 화재에 큰
피해를 보지 않았다. 문제는 화재로 95% 이상 훼손된 기와다. 이번에 파손된 기와들은 대부분 1961년과 97년 수리 과정에서
교체된 공장제 기와들. 숭례문이 세워지던 당시의 기와는 거의 남아 있지 않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이번 복구에서는 전통 기와를
2만 장 이상 주문 제작해 61년 수리 이전의 정취를 되살릴 계획이다.
문제는 전통 기와를 만들 수 있는 기술자나
가마가 거의 남아 있지 않다는 것. 이 분야의 유일한 무형문화재인 한형준 제와장(製瓦匠)은 “기계로 찍어낸 기와에 비해 사람의
손으로 직접 빚은 기와는 가벼우면서도 특유의 멋이 있다”면서 “하지만 전통 기와를 찍어낼 수 있는 가마는 전국에 3개뿐”이라고
어려움을 토로했다. 전남 장흥 등 남쪽 지방에서 구워진 기와가 북쪽으로 올라오면 추위에 동파될 가능성도 있다. 이 같은 사태를
막기 위해 숭례문에 쓰일 전통 기와에 대한 성분 분석 연구가 진행 중이다.
숭례문의 현판은 참화 속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았다. 복원팀은 현판에 밴 물기를 빼고, 부서진 조각들을 수습해 세척하는 작업까지 모두 마쳤다. 끝까지 찾아내지 못한
조각들과 훼손된 테두리 부분을 어떤 나무로 메울 것인지가 숙제다. 문화재청 조상순 학예연구사는 “새 나무를 이용할 경우 뒤틀림이
나타날 수 있어 화재 현장에서 수습된 목재나 전통문화부재보관고에 있는 옛 건축물 목재 중 적절한 것을 찾고 있다”고 말했다.
복
원의 마지막 단계가 될 단청은 2004년 진행된 숭례문 단청 문양 모사 기록을 토대로 되살린다. 단청장(丹靑匠) 홍점석씨 등
전통 문양을 연구해 온 장인들이 적극 참여할 예정이다. 특히 61년 수리 과정에서 단청 문양이 일부 바뀌었다는 기록에 따라 당시
작업에 참여했던 관계자들의 조언 및 고증자료를 검토해 수리 이전의 본래 문양을 찾아 복원하는 것이 목표다.
이영희 기자
[자료출처]
중앙일보 2008.12.26
http://rainbow.joins.com/week/article.asp?ctg=17&Total_ID=34350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