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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경제연구소가 삼성을 바꾸지 못하는 이유

이원재

 사람과 세상 2010/03/03 07:03
  http://blog.hani.co.kr/goodeconomy/28706

삼성경제연구소(SERI)에서 일하던 때, 저는 늘 궁금했습니다. 왜 SERI는 삼성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을까요?

SERI는 정말 훌륭한 싱크탱크였습니다.

우선 좋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설립 초기에는 '삼성의 직원'에 가까운, 실무자형 연구자라 많았다고 합니다. 실제로 다른 계열사에서 전배해 온 연구원도 꽤 있었다고 하고요. 그러나 2000년대 이후로는 다릅니다. 웬만한 대학의 교수로도 손색이 없는 연구자들이 이 곳으로 옵니다. 해외 유학파도 상당수이고요.

게다가 재원도 넉넉했습니다. 여느 연구소와는 달리, '먹고 살 것'이 넉넉했다는 이야기지요. 요즘은 재원이 풍족한 재단을 끼고 있는 곳을 빼면, 웬만한 대학 교수들조차 '먹고 살 것'을 위해 외부 프로젝트를 찾느라 여념이 없으시다고 하더군요. SERI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연구원이 먹고 살 것을 걱정하는 일은 없었습니다. 컨설팅 프로젝트에 투입되어서도, 상대적으로 당당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SERI는 많은 혁신적인 일을 해 내고 있었습니다. 고리타분한 연구소 이미지에서 벗어나 시의적절하게 현안에 대한 연구보고서를 생산해 냈습니다. 연구보고서를 쉽게 작성해 홈페이지를 통해 공개했습니다. 'SERICEO'라는 동영상 플랫폼을 개발해 고액의 유료 회원을 모집하는 데도 성공했습니다.

저는 더욱 궁금해졌습니다. 이렇게 훌륭한 싱크탱크가, 왜 삼성의 문제는 해결하지 못하고 있을까?

당시 삼성에서는 사회책임경영을 재정비해 사회와 소통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습니다. 두 개의 핵심적인 문제, 지배구조와 비노조 경영 문제를 어떻게 해야 할 지 심각하게 고민할 법도 했습니다. 사회와의 소통 문제는 삼성에게 매우 심각한 위기를 몰고 올 수 있는 잠재 위험 요소였다는 인식이, 적어도 SERI 내부에는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대로 된 대응이 나오지 못했습니다. 고리타분하지 않고 시의적절하고 쉽고 유능한, 늘 그렇던 싱크탱크가 삼성의 문제에 대해서만큼은 전혀 그렇지 못 했습니다.

결국 이른바 'X파일'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삼성은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고 사태는 일파만파로 커졌습니다. 결국 그 연장선에서 지금의 삼성까지 오게 된 것입니다.

왜 삼성경제연구소는 어찌 보면 일개 기업의 문제인, 삼성의 문제조차 해결하지 못하고 있었을까요?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지요. 독립성이 문제였습니다. 사태를 객관적으로 볼 수 없는데, 제대로 문제를 해결할 가능성은 거의 없지요. 삼성 문제에 이르러서는, SERI 연구원 사이에서는 의견의 다양성과 논쟁이 사라졌습니다. 삼성 수뇌부의 이해관계가 얽힌 문제이니, '생각하는 힘'이 멈춰 버린 것입니다.

최강의 싱크탱크를 갖고 있음에도 '생각하는 힘'을 갖추지 못하고 있던 삼성은 결국 여러 가지 무리수를 두다가 문제를 지금까지 키워 옵니다.

SERI의 문제를 한국사회 전체는 갖고 있지 않을까요? 많이 배우고 똑똑한 사람이 많은 것 같아 보이는데, '생각의 힘'을 갖추고 있는 사회일까요? 독립적으로 객관적인 '생각'을 생산해 사회에 공급하는 사회의 싱크탱크가 충분히 있을까요?

한겨레경제연구소(HERI)가 출범 3주년을 맞아 수행한 한국 싱크탱크 지형도 연구 결과를 보면, 마음이 무거워집니다.

정책에 영향을 절대적으로 많이 끼치는 주요 싱크탱크 독립성은 빵점입니다. 기업연구소와 국책연구소가 그 자리를 독점하고 있습니다. 보수-진보 균형도 완전히 깨어진 상태입니다.

주요 싱크탱크는 기업과 정부의 이해관계만 갖고 있을 뿐, 시민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곳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기업과 정부의 돈을 받아 운영하는 싱크탱크가 기업과 정부의 이해관계에 반하는 객관적 연구결과를 내놓을 수는 없겠지요.

진보적 싱크탱크는 먹고 살기조차 힘듭니다. 모두 영세합니다. 국민 세금 100억원이 투입되는 정당 연구소조차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한나라당의 여의도연구소만 그나마 조금 영향을 끼친다는 응답이 나왔군요.

이 조사 결과를 보면, 한국사회는 생각의 균형이 깨어져 있는 곳입니다. 그래서 '생각하는 힘'을 갖추고 있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생각의 힘'에 기반을 둔 문제 해결도 못하고 있습니다. 싱크탱크는 우리 사회 문제 해결에 기여하고 있지도 못하고, 한국사회에는 사실 이상적 싱크탱크도 없다는 결과가 이런 어두운 현실을 보여줍니다.

아쉽지만 다른 나라, 미국의 싱크탱크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미국 사회에 여러 가지 문제가 있지만, 최소한 '생각의 힘과 균형'이라는 면에서는 우리보다 매우 앞서 있습니다.

워싱턴에는 보수적 싱크탱크 헤리티지와 진보적 싱크탱크 미국진보센터의 논쟁이 살아 있습니다. 브루킹스의 전통과 무게, 그리고 뉴아메리카파운데이션의 생각하는 방법의 혁신이 공존하기도 합니다. 어쨌든 '생각의 힘'이 살아 있고 균형이 있는 사회입니다. 그래서 논쟁도 있고 변화도 있습니다.

우리 사회를 잠깐만 돌아볼까요? 세종시 문제로 언론에는 늘 논쟁이 있는 것처럼 보도됩니다. 텔레비전 토론회에는 항상 논객들이 나와 자기 입장을 강변합니다. 신문마다 전혀 다른 방향의 사설이 매일 쏟아져 나옵니다.

그러나, 정말 우리 사회에 오로지 생각의 힘에 기반을 둔, 제대로 된 논쟁이 있는 것일까요? 아니면 자기 밥그릇을 챙기려는 목소리 높은 이들의 말싸움만 있는 것일까요?

안타깝게도 지금은 후자에 매우 가깝습니다. 말싸움은 논쟁이 아닙니다. 생각의 독립성과 객관성이 충분히 확보되어야만 논쟁이 시작될 수 있습니다.

계획과 통제로 사회를 움직이던 과거에는 우격다짐으로도 사회가 발전할 수 있었을지 모르지만, 사춘기를 벗어나 성인이 되려고 하는 지금은 다릅니다. 한국 사회에도 '생각의 힘'이 필요합니다. 다양한 생각이 나와 논쟁하고, 모두가 주체적으로 자기 생각을 취사 선택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해관계로부터 독립적인 '생각의 탱크'가 다양해지고 균형이 잡혀야만, 우리 사회에 충분한 '생각'이 공급될 것입니다. 지금 우리에게는 독립 민간 싱크탱크가 필요합니다.

by 이원재(트위터 wonjae_lee, 한겨레경제연구소 홈페이지 www.heri.kr)
Posted by wizys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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