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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는 죽마고우 시인 친구가 있다. 청주시에 산다. 그러나 그는 더 이상 죽마(竹馬)를 탈 수 없다. 키 1m85cm, 체중 80㎏의 커다란 덩치는 지금도 여전하다. 고향인 지방도시에서 시를 씁네, 문학을 합네 하며 함께 몰려다니던 친구 중 가장 체격이 좋았다. ROTC 포병장교로 전방 고지를 이 잡듯 누비던 패기만만한 청년이었다. 이제 그의 큰 키는 높이가 아닌 길이로서만 의미가 있다. 실한 체중은 주변 사람들의 수발에 방해가 되는 짐으로 전락했다.

며칠 전 그 황원교(50) 시인으로부터 책 한 권이 배달돼 왔다. 산문집 『굼벵이의 노래』였다. 표지에 ‘한 전신마비 시인이 세상을 향해 부르는 희망의 노래’라는 설명이 달려 있었다. 황 시인은 20년 전인 1989년 3월 26일 뜻밖의 교통사고를 당했다. 친지가 몰던 승용차가 국도를 벗어나 8m 아래 개울로 떨어졌다. 하필이면 차가 암반에 떨어지는 바람에 천장에 머리를 세게 찧었다. 결혼식을 일주일 앞둔 날이었다.

약혼녀를 포함해 일행 3명은 타박상에 그쳤다. 황 시인만 경추 4, 5번 사이 척수가 손상됐다. 병원에서 깨어 보니 목 아래로는 아무것도 없는 듯한, 가슴·양손·허리·다리가 모두 날아가 버린 느낌이 들었다. 간호사들이 바늘로 여기저기 찔러댔지만 전혀 아프지 않았다.

 합병증으로 몇 차례 사경을 헤맨 후 자기 처지를 객관적으로 헤아리게 됐다. 약혼녀에게 떠나라고 했다. 울고불며 난리치다가 차츰 현실을 받아들이는 기색이었다. 황 시인은 나와 통화하면서 “지금 생각해도 보내길 잘했다”고 말했다. 긴 투병 생활이 시작됐다. 그냥 굶어 죽으려고 가족들이 떠먹이는 밥을 거부하기도 했다. ‘한쪽 손만이라도 쓸 수 있는 시간이 단 5분만 주어진다면 지체없이 스스로 사달을 내고 싶었던’ 순간이 부지기수였다. 95년에는 아들을 극진히 간호하던 모친이 시간 날 때마다 접던 종이학 수천 개를 남겨놓고 뇌출혈로 세상을 떴다. 자책감과 후회로 오랫동안 통곡했다. ‘미친 듯이 가자! 두 다리로 걸을 수 없다면 온몸으로 굼벵이처럼 기어서 가고, 그것도 안 되면 굴러서라도 가자! 그렇게라도 길 끝에 가서 어떤 모습의 내가 있는지 꼭 만나보아야 하지 않겠는가’(『굼벵이의 노래』 57쪽)라고 결심했다.

다니던 성당에서 나온 자원봉사자의 도움으로 컴퓨터를 배웠다. 마우스 스틱을 구해 입에 물었다. 한 자 한 자 자판을 노크하다 보니 처음엔 분당 5~6타를 치기도 힘들었다(지금은 60타를 친다). 그렇게 시를 쓰기 시작해서 96년 충청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됐다. 그동안 『빈집 지키기』(2001년),『혼자 있는 시간』(2006년) 등 시집 두 권을 냈다. 2007년 11월에는 휠체어를 타고 모 방송사의 퀴즈 프로그램에 출전해 ‘퀴즈 영웅’ 직전까지 올라가기도 했다. 컴퓨터를 가르쳐주던 여성 자원봉사자는 6년 더 봉사활동을 하다 수녀가 되려던 꿈을 포기하고 2001년 그의 아내가 되었다. 유승선(43)씨다.

 어제 새해 첫 아침에 황 시인은 지난 10년간의 습관대로 유언장을 꺼내 고쳐 썼다. 주변 처리와 나머지 장기 기증의사 확인(안구 기증 서약은 이미 마쳤다), 은혜 입은 이들에 대한 감사 표시가 주 내용이라 했다. “살아갈수록 고마운 분들이 점점 늘어서 유언장 분량도 매년 많아진다”고 말했다. 그는 세상 어디에도 결코 시시한 사람도, 삶도 없다고 굳게 믿는다. 주변의 사람, 풍경, 소리, 시간 하나하나가 전부 소중하다고 느낀다.

황 시인의 올해 꿈은 퀴즈대회에 나가 1등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신문을 열심히 읽고 있다. 1등 하면 상금으로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가서 유럽 각국을 돌아다니고 싶다. “살아 숨쉬고 있다는 것 자체가 축복인데, 사람들은 자꾸 이 진리를 잊는다”고 그는 말했다. “절대 포기하지 말아야 해. 꿈을 잊지 말고, 희망을 버리지 말아야 해”라고 내게도 외쳤다.

노재현 시시각각
중앙일보 2009.1.1
http://article.joins.com/article/article.asp?ctg=20&Total_ID=3441794

Posted by wizys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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