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레어의 몰락, 노동당 10년도 저무나
-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의 쓸쓸한 사임 이후 조기 총선 실시 여론 거세져
▣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꼭 10년이다. 강산도 변한다는 세월이니, 사람인들 다를 수 없다. 40대 중반의 나이에도 장난기마저 서린 앳된 얼굴로 ‘밤비’(아기사슴)란 애칭으로 불렸던, ‘185년 만의 최연소 총리’도 세월의 힘을 이기지는 못했다. 세 차례 선거를 치르는 사이 흑단처럼 빛나던 머리칼엔 잿빛이 내려앉았고, 이마에도 어느새 깊은 주름이 파였다. 5월10일 오전 짤막한 각료회의를 마친 뒤 노동당수직(따라서 총리직) 사임을 공식 발표하기 위해 지역구인 잉글랜드 북동부 세지필드로 향하는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의 얼굴에선 쓸쓸함이 묻어났다.
△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가 5월10일 자신의 지역구인 잉글랜드 북동부 세지필드의 노동당 클럽에서 고별 연설을 하던 중 잠시 상념에 잠겨 있다. 그는 이날 “오는 6월27일 사임서를 제출할 것”이라고 밝혔다.(사진/ AP PHOTO/ POOL PHIL NOBLE)
개구쟁이 기타리스트에서 사회주의자로
‘앤서니 찰스 린턴 블레어’는 1953년 5월6일 스코틀랜드 에든버러에서 태어났다. 청소년 시절 ‘록스타’를 꿈꾸기도 했던 그는, 밤늦게 학교 기숙사로 숨어들기 위해 사다리를 타고 담벼락을 넘다 ‘밤손님’으로 오해를 받아 경찰에 체포됐을 정도로 개구쟁이였다. 옥스퍼드대 법대에 진학한 뒤에도 ‘어글리 루머스’(추문)란 록밴드에서 보컬 겸 기타리스트로 활약했다니, 성년이 된 뒤에도 어린 시절의 ‘꿈’에 대한 미련은 남아 있었던 모양이다.
1975년 대학 졸업 직후 노동당에 입당한 그는 1983년 자신이 유년시절을 보낸 더럼 인근의 세지필드에서 노동당 후보로 하원의원 선거에 출마했다. 새롭게 조정된 선거구인 탓에 치열한 당내 경선 과정을 피할 수 있었던 그는, 당시 선거에서 노동당의 전국적 참패 속에서도 전통적 노동당 텃밭인 세지필드에서 무난히 당선됐다. 1983년 7월6일 하원의원으로 의회에서 행한 첫 연설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사회주의자다. 그저 지적 환상을 부추기는 독서 편력을 통해 사회주의자가 된 것은 아니다. …나는 사회주의가 가장 합리적인 동시에 이성적일 수 있는 체계라고 믿는다. 사회주의는 대결이 아닌 협력을, 두려움이 아닌 우애를, 그리고 평등을 앞세우기 때문이다.”
서른 살의 나이에 하원에 진출한 이후 ‘정치인 블레어’는 마거릿 대처가 이끄는 보수당의 기세에 눌려 노동당이 기나긴 침체기에 빠져 있었음에도 거침없이 출세가도를 내달렸다. 의회 진출 초기부터 일찌감치 닐 키녹이 이끄는 당내 ‘개혁파’에 가담한 블레어는 1987년 총선 직후 예비내각 무역산업부 대변인으로 발탁되면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이어 1989년엔 예비내각 고용장관에 임명됐고, 1990년 노동당 전당대회에선 당의 향후 정책 노선을 밝히는 연설자의 일원으로 나설 정도로 떠오르는 스타가 됐다.
기회는 예기치 않게 찾아왔다. 1992년 총선에서 ‘개혁파’의 거두 키녹이 지역구 선거에서 패하면서 예비내각 내무장관직에서 물러났다. 그는 존 스미스가 이끄는 노동당 예비내각 내무장관에 전격 기용됐고, ‘좌파 정당은 범죄에 단호하게 대처하지 않는다’란 통념에 맞서 강력한 사회정책을 내놓는 데 앞장섰다. “범죄엔 단호하게 대처하지만, 범죄의 원인엔 더욱 단호하게 대처한다”는 게 당시 그가 내세운 구호였다.
단번에 당 대표·압도적 총선 승리 ‘기염’
△ 1997년 5월 ‘보수당 집권 18년’에 종지부를 찍고 노동당을 승리로 이끈 토니 블레어 총리가 지지자들에게 둘러싸인 채 격정적인 연설을 하고 있다.
1994년 존 스미스 노동당수의 급작스런 죽음은 야심찬 젊은 정치인 블레어에게 또 다른 기회의 장을 열어줬다. 당대표 선거에 나선 그는 존 프레스콧·마거릿 베켓 등 저명한 중진들을 제치고 노동당의 영수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그해 노동당 전당대회 연설에서 그는 노동당 헌장 제4조의 개정 뜻을 밝혔다. 헌장 4조는 ‘생산 및 교환수단의 공동 소유’를 규정하고 있는 노동당의 핵심 조항으로, 노동당 국유화 정책의 뼈대였다. 당 지도부 안팎의 반발에도 이 조항은 1995년 4월 열린 특별 당대회에서 ‘노동당은 민주적 사회주의를 기치로 내건다’는 문구로 바뀌었다. 이른바 ‘제3의 길’의 서막이 오른 셈이다.
당의 전권을 장악한 직후부터 그는 집권을 위해선 노동당이 ‘낡은 통념’을 벗어던지고, ‘유능하고 현대적’인 이미지로 탈바꿈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 결과가 이른바 ‘새 노동당’ 전략이다.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1996년 노동당 전당대회에서 행한 연설이다. 당시 연설에서 그는 “노동당의 3대 정책 우선순위는 첫째도 교육이요, 둘째도 교육이요, 셋째도 교육”이라는 유명한 발언을 남긴다. 민생정치의 중요성을 강조한 게다. 평당원을 중심으로 이런 움직임에 대한 당내 반발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블레어의 변신 전략은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리고 ‘블레어 체제’ 아래서 치러지는 첫 총선이 다가왔다. 당시 선거에서 노동당은 젊은 블레어 당수의 사진과 함께 ‘새로운 노동당, 영국 국민은 더 좋은 정부를 가질 자격이 있다’란 구호를 써넣은 포스터를 내걸었다. 유럽연합과의 관계 설정 문제를 두고 내분에 휩싸인 존 메이저 총리가 이끈 보수당은 새롭게 탈바꿈한 노동당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블레어가 이끄는 노동당은 18년의 좌절을 딛고 압도적 승리를 거두며 정권을 탈환하는 데 성공했고, 44살의 블레어는 1997년 5월2일 총리에 취임했다. 정치에 입문한 지 불과 13년여 만의 일이다.
이라크 침공을 ‘잘못’으로 인정 안 해
“저는 오는 6월27일 엘리자베스 여왕께 총리직 사임서를 제출할 계획입니다. …총리가 됐을 때 저는 영국의 미래에 대한 희망을 품고 있었습니다. 이제 저는 이 나라의 미래에 대해 더 큰 희망을 품고 자리에서 물러납니다.” 5월10일 정오 무렵(현지 시각) 세지필드의 트림던 노동당 클럽 연단에 선 블레어 총리는 장내를 가득 메운 100여 지역구 열성 당원을 상대로 15분 남짓 나직한 목소리로 고별 연설을 했다. 2001년과 2005년 잇따라 총선에서 승리를 거둔 그가 트림던 클럽에 나타날 때마다 당원들은 “한 번 더”를 목청껏 외쳤지만, 이날은 차분한 박수와 조용한 환호뿐이었다. 다만 일부 여성 당원들이 그의 연설 도중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찍어냈을 뿐이다. 영국 언론들은 이날 연설을 “감성적이고 대단히 개인적”이었다고 평했다.
“1997년은 모든 과거의 편린을 일거에 날려버린 새로운 시작의 순간이었습니다. 당연히 (앞으로) 총리로서 제 업적에 대한 평가가 있을 것입니다. 결국 그 평가는 여러분의 몫입니다.” 〈BBC방송〉이 생중계한 이날 연설에서 블레어 총리는 “10년 전에 가졌던 기대치가 너무 높았을 수도 있다”면서도, “당시 품었던 기대를 모두 충족하지는 못했지만, 여러분 자신의 생활수준을 돌이켜보면 10년 전에 비해 분명 나아졌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블레어 총리는 또 “이제 영국은 다른 나라를 뒤쫓는 국가가 아니라, 세계를 이끌어가는 국가가 됐다”며 “이를 입증하기 위해 굳이 통계 수치를 들이댈 필요도 없다”고 말했다. 그는 최저임금 인상과 유급휴가 확대, 고용창출과 실업축소, 범죄율 감소와 경제성장, 의료·교육 서비스 향상 등을 거론했고, 아프리카 빈곤 퇴치 사업과 지구 온난화 대처, 세계화 정책 등도 ‘성과’로 언급했다. 그는 “마음 깊숙이 여러분도 영국이 지구상에서 가장 위대한 국가라고 여길 것”이라며 “영국 총리로 재직할 수 있었던 것은 영광이었다”는 ‘고백’도 빼놓지 않았다. 떠들썩하지 않은 박수가 이어졌다.
자신의 정치생명을 갉아먹은 이라크 침공에 대한 언급도 잊지 않았다. 블레어 총리는 “우리를 위협하는 테러범들은 세계 도처에 있으며, 우리가 포기하더라도 그들은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며 “이는 의지와 신념에 대한 시험이며, 여기서 물러설 수는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이라크 침공이 ‘강력한 역풍’을 만났음을 시인했지만, 끝내 ‘잘못’을 인정하지는 않았다. 그저 “총리로서 무엇이 영국에 올바른 일인지를 생각했고, 옳다고 믿는 것만 실행에 옮겼다”고만 강조했다. 이날 그의 연설이 진행되는 동안 트림던 클럽 들머리에선 일부 지구당원들이 반전 구호가 적힌 피켓을 들고 시위를 벌였다.
이라크 침공한 ‘부시의 푸들’ 놀림도
지난 10년 집권 기간에 그가 남긴 ‘유산’에 대해 영국민들은 어떻게 평가하고 있을까? 그가 10년 전 ‘다우닝가 10번지’ 총리공관에 입성한 날에 맞춰 <인디펜던트>가 내놓은 여론조사 결과에 그 실마리가 담겨 있다. 이 신문이 여론조사 전문기관 ‘커뮤니케이트리서치’에 맡겨 실시한 조사 결과를 보면, 응답자의 압도적 다수인 69%가 블레어 총리 재임 기간에 가장 기억에 남는 일로 ‘이라크 침공’을 꼽았다. 두 번째로 꼽힌 것은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과의 관계(9%)였다. 이라크 침공과 함께 블레어 총리는 ‘부시의 푸들’이란 놀림을 받기 시작했다.
핏빛 역사로 점철됐던 북아일랜드 분쟁을 해결하고, 자치정부 출범의 기초를 쌓은 것으로 평가받는 ‘굿프라이데이 평화협정’을 꼽은 응답자는 전체의 6%에 그쳤다. 블레어 총리가 고별사에서 최대의 업적 가운데 하나로 꼽은 ‘공공 서비스 개선’을 높게 평가한 이들은 단 2%에 불과했고, 세 차례 선거에서 연거푸 집권에 성공한 ‘승리의 기록’을 기억하는 이들은 단 1%에 그쳤다. 10년 전 총리공관의 젊은 새 주인을 열광과 환호로 맞이한 영국민들은 떠나는 그의 뒷모습에 차가운 시선을 보내고 있는 게다. 한때 83%까지 치솟았던 그에 대한 지지율은 이제 20% 남짓에 불과하고, <데일리텔레프래프>가 5월5일 내놓은 여론조사 결과 응답자의 24%만이 그의 재임 기간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를 내놨다.
조기 총선 둘러싼 만만치 않은 상황
차기 총선은 오는 2010년에야 치러질 예정임에도, 블레어 총리의 사임 발표를 전후로 조기 총선론이 고개를 드는 것도 이 때문이다. 〈BBC방송〉이 지난 4월27~29일 영국 성인 1001명을 상대로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 응답자의 압도적 다수인 73%가 블레어 총리 사임 직후 조기 총선을 실시해야 한다고 답했다. 원내 제3당인 자유민주당의 멘자이스 캠벨 당수는 블레어 총리가 고별 연설을 한 직후 엘리자베스 여왕에게 의회 해산과 조기 총선을 요청하는 서한을 보내 “차기 총리로 누가 적합한지 영국민이 직접 선택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촉구했다. 데이비드 캐머런 보수당수도 이미 지난달 “차기 노동당수는 영국 총리직을 승계할 권한이 없다”며 “블레어 총리가 물러난다면 총선을 앞당겨 실시해야 한다”고 강조한 바 았다.
차기 노동당수로 유력한 고든 브라운 현 내무장관은 “전례가 없다”며 조기 총선 주장을 일축하고 있지만, 상황은 그리 만만치 않다. 주간 <옵서버>가 5월7일 내놓은 정당 지지도 조사 결과를 보면 △보수당 38% △노동당 31% △자유민주당 20%로 나타났다. 총선이 앞당겨 치러진다면, 노동당은 정권을 내줘야 할 판이다. 바야흐로 한 시대가 저물고 있다.
[자료 출처]
한겨레21
http://h21.hani.co.kr/section-021019000/2007/05/021019000200705170660017.html
-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의 쓸쓸한 사임 이후 조기 총선 실시 여론 거세져
▣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꼭 10년이다. 강산도 변한다는 세월이니, 사람인들 다를 수 없다. 40대 중반의 나이에도 장난기마저 서린 앳된 얼굴로 ‘밤비’(아기사슴)란 애칭으로 불렸던, ‘185년 만의 최연소 총리’도 세월의 힘을 이기지는 못했다. 세 차례 선거를 치르는 사이 흑단처럼 빛나던 머리칼엔 잿빛이 내려앉았고, 이마에도 어느새 깊은 주름이 파였다. 5월10일 오전 짤막한 각료회의를 마친 뒤 노동당수직(따라서 총리직) 사임을 공식 발표하기 위해 지역구인 잉글랜드 북동부 세지필드로 향하는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의 얼굴에선 쓸쓸함이 묻어났다.
△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가 5월10일 자신의 지역구인 잉글랜드 북동부 세지필드의 노동당 클럽에서 고별 연설을 하던 중 잠시 상념에 잠겨 있다. 그는 이날 “오는 6월27일 사임서를 제출할 것”이라고 밝혔다.(사진/ AP PHOTO/ POOL PHIL NOBLE)
개구쟁이 기타리스트에서 사회주의자로
‘앤서니 찰스 린턴 블레어’는 1953년 5월6일 스코틀랜드 에든버러에서 태어났다. 청소년 시절 ‘록스타’를 꿈꾸기도 했던 그는, 밤늦게 학교 기숙사로 숨어들기 위해 사다리를 타고 담벼락을 넘다 ‘밤손님’으로 오해를 받아 경찰에 체포됐을 정도로 개구쟁이였다. 옥스퍼드대 법대에 진학한 뒤에도 ‘어글리 루머스’(추문)란 록밴드에서 보컬 겸 기타리스트로 활약했다니, 성년이 된 뒤에도 어린 시절의 ‘꿈’에 대한 미련은 남아 있었던 모양이다.
1975년 대학 졸업 직후 노동당에 입당한 그는 1983년 자신이 유년시절을 보낸 더럼 인근의 세지필드에서 노동당 후보로 하원의원 선거에 출마했다. 새롭게 조정된 선거구인 탓에 치열한 당내 경선 과정을 피할 수 있었던 그는, 당시 선거에서 노동당의 전국적 참패 속에서도 전통적 노동당 텃밭인 세지필드에서 무난히 당선됐다. 1983년 7월6일 하원의원으로 의회에서 행한 첫 연설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사회주의자다. 그저 지적 환상을 부추기는 독서 편력을 통해 사회주의자가 된 것은 아니다. …나는 사회주의가 가장 합리적인 동시에 이성적일 수 있는 체계라고 믿는다. 사회주의는 대결이 아닌 협력을, 두려움이 아닌 우애를, 그리고 평등을 앞세우기 때문이다.”
서른 살의 나이에 하원에 진출한 이후 ‘정치인 블레어’는 마거릿 대처가 이끄는 보수당의 기세에 눌려 노동당이 기나긴 침체기에 빠져 있었음에도 거침없이 출세가도를 내달렸다. 의회 진출 초기부터 일찌감치 닐 키녹이 이끄는 당내 ‘개혁파’에 가담한 블레어는 1987년 총선 직후 예비내각 무역산업부 대변인으로 발탁되면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이어 1989년엔 예비내각 고용장관에 임명됐고, 1990년 노동당 전당대회에선 당의 향후 정책 노선을 밝히는 연설자의 일원으로 나설 정도로 떠오르는 스타가 됐다.
기회는 예기치 않게 찾아왔다. 1992년 총선에서 ‘개혁파’의 거두 키녹이 지역구 선거에서 패하면서 예비내각 내무장관직에서 물러났다. 그는 존 스미스가 이끄는 노동당 예비내각 내무장관에 전격 기용됐고, ‘좌파 정당은 범죄에 단호하게 대처하지 않는다’란 통념에 맞서 강력한 사회정책을 내놓는 데 앞장섰다. “범죄엔 단호하게 대처하지만, 범죄의 원인엔 더욱 단호하게 대처한다”는 게 당시 그가 내세운 구호였다.
단번에 당 대표·압도적 총선 승리 ‘기염’
△ 1997년 5월 ‘보수당 집권 18년’에 종지부를 찍고 노동당을 승리로 이끈 토니 블레어 총리가 지지자들에게 둘러싸인 채 격정적인 연설을 하고 있다.
1994년 존 스미스 노동당수의 급작스런 죽음은 야심찬 젊은 정치인 블레어에게 또 다른 기회의 장을 열어줬다. 당대표 선거에 나선 그는 존 프레스콧·마거릿 베켓 등 저명한 중진들을 제치고 노동당의 영수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그해 노동당 전당대회 연설에서 그는 노동당 헌장 제4조의 개정 뜻을 밝혔다. 헌장 4조는 ‘생산 및 교환수단의 공동 소유’를 규정하고 있는 노동당의 핵심 조항으로, 노동당 국유화 정책의 뼈대였다. 당 지도부 안팎의 반발에도 이 조항은 1995년 4월 열린 특별 당대회에서 ‘노동당은 민주적 사회주의를 기치로 내건다’는 문구로 바뀌었다. 이른바 ‘제3의 길’의 서막이 오른 셈이다.
당의 전권을 장악한 직후부터 그는 집권을 위해선 노동당이 ‘낡은 통념’을 벗어던지고, ‘유능하고 현대적’인 이미지로 탈바꿈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 결과가 이른바 ‘새 노동당’ 전략이다.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1996년 노동당 전당대회에서 행한 연설이다. 당시 연설에서 그는 “노동당의 3대 정책 우선순위는 첫째도 교육이요, 둘째도 교육이요, 셋째도 교육”이라는 유명한 발언을 남긴다. 민생정치의 중요성을 강조한 게다. 평당원을 중심으로 이런 움직임에 대한 당내 반발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블레어의 변신 전략은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리고 ‘블레어 체제’ 아래서 치러지는 첫 총선이 다가왔다. 당시 선거에서 노동당은 젊은 블레어 당수의 사진과 함께 ‘새로운 노동당, 영국 국민은 더 좋은 정부를 가질 자격이 있다’란 구호를 써넣은 포스터를 내걸었다. 유럽연합과의 관계 설정 문제를 두고 내분에 휩싸인 존 메이저 총리가 이끈 보수당은 새롭게 탈바꿈한 노동당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블레어가 이끄는 노동당은 18년의 좌절을 딛고 압도적 승리를 거두며 정권을 탈환하는 데 성공했고, 44살의 블레어는 1997년 5월2일 총리에 취임했다. 정치에 입문한 지 불과 13년여 만의 일이다.
이라크 침공을 ‘잘못’으로 인정 안 해
“저는 오는 6월27일 엘리자베스 여왕께 총리직 사임서를 제출할 계획입니다. …총리가 됐을 때 저는 영국의 미래에 대한 희망을 품고 있었습니다. 이제 저는 이 나라의 미래에 대해 더 큰 희망을 품고 자리에서 물러납니다.” 5월10일 정오 무렵(현지 시각) 세지필드의 트림던 노동당 클럽 연단에 선 블레어 총리는 장내를 가득 메운 100여 지역구 열성 당원을 상대로 15분 남짓 나직한 목소리로 고별 연설을 했다. 2001년과 2005년 잇따라 총선에서 승리를 거둔 그가 트림던 클럽에 나타날 때마다 당원들은 “한 번 더”를 목청껏 외쳤지만, 이날은 차분한 박수와 조용한 환호뿐이었다. 다만 일부 여성 당원들이 그의 연설 도중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찍어냈을 뿐이다. 영국 언론들은 이날 연설을 “감성적이고 대단히 개인적”이었다고 평했다.
“1997년은 모든 과거의 편린을 일거에 날려버린 새로운 시작의 순간이었습니다. 당연히 (앞으로) 총리로서 제 업적에 대한 평가가 있을 것입니다. 결국 그 평가는 여러분의 몫입니다.” 〈BBC방송〉이 생중계한 이날 연설에서 블레어 총리는 “10년 전에 가졌던 기대치가 너무 높았을 수도 있다”면서도, “당시 품었던 기대를 모두 충족하지는 못했지만, 여러분 자신의 생활수준을 돌이켜보면 10년 전에 비해 분명 나아졌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블레어 총리는 또 “이제 영국은 다른 나라를 뒤쫓는 국가가 아니라, 세계를 이끌어가는 국가가 됐다”며 “이를 입증하기 위해 굳이 통계 수치를 들이댈 필요도 없다”고 말했다. 그는 최저임금 인상과 유급휴가 확대, 고용창출과 실업축소, 범죄율 감소와 경제성장, 의료·교육 서비스 향상 등을 거론했고, 아프리카 빈곤 퇴치 사업과 지구 온난화 대처, 세계화 정책 등도 ‘성과’로 언급했다. 그는 “마음 깊숙이 여러분도 영국이 지구상에서 가장 위대한 국가라고 여길 것”이라며 “영국 총리로 재직할 수 있었던 것은 영광이었다”는 ‘고백’도 빼놓지 않았다. 떠들썩하지 않은 박수가 이어졌다.
자신의 정치생명을 갉아먹은 이라크 침공에 대한 언급도 잊지 않았다. 블레어 총리는 “우리를 위협하는 테러범들은 세계 도처에 있으며, 우리가 포기하더라도 그들은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며 “이는 의지와 신념에 대한 시험이며, 여기서 물러설 수는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이라크 침공이 ‘강력한 역풍’을 만났음을 시인했지만, 끝내 ‘잘못’을 인정하지는 않았다. 그저 “총리로서 무엇이 영국에 올바른 일인지를 생각했고, 옳다고 믿는 것만 실행에 옮겼다”고만 강조했다. 이날 그의 연설이 진행되는 동안 트림던 클럽 들머리에선 일부 지구당원들이 반전 구호가 적힌 피켓을 들고 시위를 벌였다.
이라크 침공한 ‘부시의 푸들’ 놀림도
지난 10년 집권 기간에 그가 남긴 ‘유산’에 대해 영국민들은 어떻게 평가하고 있을까? 그가 10년 전 ‘다우닝가 10번지’ 총리공관에 입성한 날에 맞춰 <인디펜던트>가 내놓은 여론조사 결과에 그 실마리가 담겨 있다. 이 신문이 여론조사 전문기관 ‘커뮤니케이트리서치’에 맡겨 실시한 조사 결과를 보면, 응답자의 압도적 다수인 69%가 블레어 총리 재임 기간에 가장 기억에 남는 일로 ‘이라크 침공’을 꼽았다. 두 번째로 꼽힌 것은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과의 관계(9%)였다. 이라크 침공과 함께 블레어 총리는 ‘부시의 푸들’이란 놀림을 받기 시작했다.
핏빛 역사로 점철됐던 북아일랜드 분쟁을 해결하고, 자치정부 출범의 기초를 쌓은 것으로 평가받는 ‘굿프라이데이 평화협정’을 꼽은 응답자는 전체의 6%에 그쳤다. 블레어 총리가 고별사에서 최대의 업적 가운데 하나로 꼽은 ‘공공 서비스 개선’을 높게 평가한 이들은 단 2%에 불과했고, 세 차례 선거에서 연거푸 집권에 성공한 ‘승리의 기록’을 기억하는 이들은 단 1%에 그쳤다. 10년 전 총리공관의 젊은 새 주인을 열광과 환호로 맞이한 영국민들은 떠나는 그의 뒷모습에 차가운 시선을 보내고 있는 게다. 한때 83%까지 치솟았던 그에 대한 지지율은 이제 20% 남짓에 불과하고, <데일리텔레프래프>가 5월5일 내놓은 여론조사 결과 응답자의 24%만이 그의 재임 기간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를 내놨다.
조기 총선 둘러싼 만만치 않은 상황
차기 총선은 오는 2010년에야 치러질 예정임에도, 블레어 총리의 사임 발표를 전후로 조기 총선론이 고개를 드는 것도 이 때문이다. 〈BBC방송〉이 지난 4월27~29일 영국 성인 1001명을 상대로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 응답자의 압도적 다수인 73%가 블레어 총리 사임 직후 조기 총선을 실시해야 한다고 답했다. 원내 제3당인 자유민주당의 멘자이스 캠벨 당수는 블레어 총리가 고별 연설을 한 직후 엘리자베스 여왕에게 의회 해산과 조기 총선을 요청하는 서한을 보내 “차기 총리로 누가 적합한지 영국민이 직접 선택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촉구했다. 데이비드 캐머런 보수당수도 이미 지난달 “차기 노동당수는 영국 총리직을 승계할 권한이 없다”며 “블레어 총리가 물러난다면 총선을 앞당겨 실시해야 한다”고 강조한 바 았다.
차기 노동당수로 유력한 고든 브라운 현 내무장관은 “전례가 없다”며 조기 총선 주장을 일축하고 있지만, 상황은 그리 만만치 않다. 주간 <옵서버>가 5월7일 내놓은 정당 지지도 조사 결과를 보면 △보수당 38% △노동당 31% △자유민주당 20%로 나타났다. 총선이 앞당겨 치러진다면, 노동당은 정권을 내줘야 할 판이다. 바야흐로 한 시대가 저물고 있다.
[자료 출처]
한겨레21
http://h21.hani.co.kr/section-021019000/2007/05/021019000200705170660017.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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