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한국, 한국인, 한국민족에 대해서 줄기차게 컬럼을 써오던 고 이규태 님이 생각났다.
▲ 고 이규태 고문
조선일보 이규태(李圭泰·73) 전 논설고문이 2006년 2월 25일 오후 4시쯤 지병인 폐암으로 삼성서울병원에서 별세했다. 이 전 고문은 1983년 3월 1일자 조선일보에 ‘이규태 코너’를 연재하기 시작, 지난 23일자 신문에 독자들에게 보내는 고별사를 싣기까지 모두 6702회를 썼다. 이는 한국 언론사상 최장기 연재기사 집필 기록이다.
이 전 고문은 1933년 전북 장수에서 태어나 전주사범과 연세대 화학공학과를 졸업했다. 1959년 조선일보 기자(수습 2기)로 입사해서 문화부·사회부 기자, 사회부 차장, 초대 주월특파원, 문화부장, 조사부장, 주간조선 주간, 사회부장, 편집부국장, 논설위원, 논설위원실장, 주필, 논설고문 등을 역임한 후 2004년 8월 31일 퇴임했다.
이 전 고문은 1968년 ‘개화백경(開化百景)’을 60회 동안 연재한 것을 시작으로 ‘한국인의 의식구조’ ‘이규태 코너’ 등 37개의 대형 연재물을 조선일보에 집필했다. 또 ‘개화백경’ ‘서민한국사’ ‘한국인의 의식구조’ ‘이규태 한국학에세이’ ‘신열하일기’ ‘이규태 코너’ 등 120여 권의 저서를 남겼으며, 한국신문상·서울시문화상·연세언론인상·삼성언론상 등을 수상했다.
유족으로는 부인 전방자 여사와 이사부(스포츠조선 엔터테인먼트부 부장대우) 사로(한국지질자원연구원 지질자원정보센터장) 사우(유학 중) 등 3남이 있다. 빈소는 삼성서울병원 영안실에 마련됐으며, 영결식은 28일 오전 8시30분. 연락처는 25일은 (02) 3410-6901, 26일 정오부터 (02) 3410-6914.
이선민기자 smlee@chosun.com
입력 : 2006.02.25 17:46 21' / 수정 : 2006.02.25 22:02 29'
=== 조선일보 이규태 코너 마지막회 ===
아, 이제는 그만 글을 마쳐야겠습니다
평생 글 쓴 행복한 삶…
이규태 코너 24년 <6702·마지막회>
글로 먹고 사는 놈에게 항상 무언가를 쓸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것은 행운이었습니다.
1983년 3월 1일. 이처럼 오랫동안 코너가 계속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당시 방우영 사장께서 ‘李圭泰 코너’란 이름과 함께 분량과 지면의 위치까지 정해주시며 시작하라고 했던 이 글이 벌써 6701회를 기록했습니다. 3·1절을 맞아 3·1선언 현장인 명월관의 내력을 쓴 ‘이완용의 집 고목’에서 시작해 얼마 전 ‘책찜질 이야기’까지 햇수로 24년이 흘렀습니다. 컴퓨터로 계산하니 오늘(2월18일 기준)로 8391일이나 됩니다. 중년이던 나이는 이젠 칠순을 지난 늙은이가 됐고, 강산은 두 번 반이 바뀌었습니다.
그동안 많은 변화가 우리 주위에 있었습니다. 어린 시절 종이를 처음 보고는 너무 신기해 잠을 이룰 수 없었던 소년은 이젠 컴퓨터로 집에 앉아 글을 쓰고, 자판만 몇 번 두드리는 것으로 신문 활자가 되는 말 그대로 ‘격변의 시대’를 보냈습니다. ‘李圭泰 코너’의 상징인 저의 코너 캐리커처만 봐도 그 변화를 알 수 있습니다. 글의 성격과 맞춘다고 해서 곰방대를 물었다가 어른들로부터 호되게 혼이 난 뒤 원고지에 연필로 글을 쓰는 것으로 바뀌었다가 지금은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고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많고 빠른 변화가 지금까지 칼럼을 쓸 수 있게 해 준 원동력이었습니다. 매일매일 바뀌는 것들을 변하지 않는 과거를 통해 재조명함으로써 미래를 보고자 했던 것입니다.
하나의 칼럼을 완성하기 위해 저로서는 모든 노력을 다했습니다. 요즘 와서는 격일, 또는 3일에 한 번씩 연재했지만 20년간은 휴간일 빼놓고는 매일같이 글을 써야 했기 때문에 마치 마라톤을 달리는 선수와도 같은 입장이었습니다. 잘 뛰는 선수야 2시간 좀 넘는 레이스이지만 저에게는 24년이라는 긴 여정이었습니다. 이제는 골인 지점에 다다른 것 같습니다. 30년 아니 50년, 7000회 아니 1만회를 넘기고 싶지만 그건 과욕이라고 생각합니다. 많은 후배들에게 기회를 넘겨야 할 때가 됐습니다. 이제 욕심이라고는 ‘李圭泰 코너’보다 훨씬 뛰어난 코너가 독자들의 마음과 머리를 적셔드렸으면 하는 것입니다.
‘李圭泰 코너’를 마치면서 코너를 지시한 방우영 명예회장님과 늙은이의 글을 버리지 않은 방상훈 사장님, 그리고 이젠 저의 트레이드 마크가 돼버린 코너 캐리커처를 그린 김도원 화백, 또 활자로 찍던 시절 악필의 원고를 채자해준 문선부원과, 자판이 서툴러 뒤죽박죽인 원고를 꼼꼼히 봐준 교열부원 등 모든 조선일보 식구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그러나 누구보다 독자 여러분께 제 늙은 몸을 구부려 큰절을 올립니다. ‘李圭泰 코너’가 6701회까지 이어올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독자 여러분의 성원과 사랑 덕분이었다는 것을 제가 어떻게 잊겠습니까.
감사합니다.
--마지막 이규태 코너는 투병 중인 필자의 구술에 의해 작성되었습니다.
입력 : 2006.02.22 18:54 21' / 수정 : 2006.02.22 18:56 03'
[참고자료]
• 22년11개월10일만에 끝나는 이규태 코너
"평생 글 행복한 삶…아, 이제는 그만" [06/02/22 18:54]
• 고 이규태 기자는 누구인가? [06/02/25 17:50]
• 전두환 전 대통령도 백담사에 이규태 책을 가져가 [06/02/25 17:55]
• "이규태, 그는 천상 기자였다" [06/02/25 19:42]
• 마르지 않는 샘 '이규태 코너'의 비밀 [06/02/25 20:03]
• 도올 김용옥도 미 유학중 "'이규태 한국학' 즐겨 읽었다" 고백 [06/02/25 20:05]
▲ 고 이규태 고문
조선일보 이규태(李圭泰·73) 전 논설고문이 2006년 2월 25일 오후 4시쯤 지병인 폐암으로 삼성서울병원에서 별세했다. 이 전 고문은 1983년 3월 1일자 조선일보에 ‘이규태 코너’를 연재하기 시작, 지난 23일자 신문에 독자들에게 보내는 고별사를 싣기까지 모두 6702회를 썼다. 이는 한국 언론사상 최장기 연재기사 집필 기록이다.
이 전 고문은 1933년 전북 장수에서 태어나 전주사범과 연세대 화학공학과를 졸업했다. 1959년 조선일보 기자(수습 2기)로 입사해서 문화부·사회부 기자, 사회부 차장, 초대 주월특파원, 문화부장, 조사부장, 주간조선 주간, 사회부장, 편집부국장, 논설위원, 논설위원실장, 주필, 논설고문 등을 역임한 후 2004년 8월 31일 퇴임했다.
이 전 고문은 1968년 ‘개화백경(開化百景)’을 60회 동안 연재한 것을 시작으로 ‘한국인의 의식구조’ ‘이규태 코너’ 등 37개의 대형 연재물을 조선일보에 집필했다. 또 ‘개화백경’ ‘서민한국사’ ‘한국인의 의식구조’ ‘이규태 한국학에세이’ ‘신열하일기’ ‘이규태 코너’ 등 120여 권의 저서를 남겼으며, 한국신문상·서울시문화상·연세언론인상·삼성언론상 등을 수상했다.
유족으로는 부인 전방자 여사와 이사부(스포츠조선 엔터테인먼트부 부장대우) 사로(한국지질자원연구원 지질자원정보센터장) 사우(유학 중) 등 3남이 있다. 빈소는 삼성서울병원 영안실에 마련됐으며, 영결식은 28일 오전 8시30분. 연락처는 25일은 (02) 3410-6901, 26일 정오부터 (02) 3410-6914.
이선민기자 smlee@chosun.com
입력 : 2006.02.25 17:46 21' / 수정 : 2006.02.25 22:02 29'
=== 조선일보 이규태 코너 마지막회 ===
아, 이제는 그만 글을 마쳐야겠습니다
평생 글 쓴 행복한 삶…
이규태 코너 24년 <6702·마지막회>
글로 먹고 사는 놈에게 항상 무언가를 쓸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것은 행운이었습니다.
1983년 3월 1일. 이처럼 오랫동안 코너가 계속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당시 방우영 사장께서 ‘李圭泰 코너’란 이름과 함께 분량과 지면의 위치까지 정해주시며 시작하라고 했던 이 글이 벌써 6701회를 기록했습니다. 3·1절을 맞아 3·1선언 현장인 명월관의 내력을 쓴 ‘이완용의 집 고목’에서 시작해 얼마 전 ‘책찜질 이야기’까지 햇수로 24년이 흘렀습니다. 컴퓨터로 계산하니 오늘(2월18일 기준)로 8391일이나 됩니다. 중년이던 나이는 이젠 칠순을 지난 늙은이가 됐고, 강산은 두 번 반이 바뀌었습니다.
그동안 많은 변화가 우리 주위에 있었습니다. 어린 시절 종이를 처음 보고는 너무 신기해 잠을 이룰 수 없었던 소년은 이젠 컴퓨터로 집에 앉아 글을 쓰고, 자판만 몇 번 두드리는 것으로 신문 활자가 되는 말 그대로 ‘격변의 시대’를 보냈습니다. ‘李圭泰 코너’의 상징인 저의 코너 캐리커처만 봐도 그 변화를 알 수 있습니다. 글의 성격과 맞춘다고 해서 곰방대를 물었다가 어른들로부터 호되게 혼이 난 뒤 원고지에 연필로 글을 쓰는 것으로 바뀌었다가 지금은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고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많고 빠른 변화가 지금까지 칼럼을 쓸 수 있게 해 준 원동력이었습니다. 매일매일 바뀌는 것들을 변하지 않는 과거를 통해 재조명함으로써 미래를 보고자 했던 것입니다.
하나의 칼럼을 완성하기 위해 저로서는 모든 노력을 다했습니다. 요즘 와서는 격일, 또는 3일에 한 번씩 연재했지만 20년간은 휴간일 빼놓고는 매일같이 글을 써야 했기 때문에 마치 마라톤을 달리는 선수와도 같은 입장이었습니다. 잘 뛰는 선수야 2시간 좀 넘는 레이스이지만 저에게는 24년이라는 긴 여정이었습니다. 이제는 골인 지점에 다다른 것 같습니다. 30년 아니 50년, 7000회 아니 1만회를 넘기고 싶지만 그건 과욕이라고 생각합니다. 많은 후배들에게 기회를 넘겨야 할 때가 됐습니다. 이제 욕심이라고는 ‘李圭泰 코너’보다 훨씬 뛰어난 코너가 독자들의 마음과 머리를 적셔드렸으면 하는 것입니다.
‘李圭泰 코너’를 마치면서 코너를 지시한 방우영 명예회장님과 늙은이의 글을 버리지 않은 방상훈 사장님, 그리고 이젠 저의 트레이드 마크가 돼버린 코너 캐리커처를 그린 김도원 화백, 또 활자로 찍던 시절 악필의 원고를 채자해준 문선부원과, 자판이 서툴러 뒤죽박죽인 원고를 꼼꼼히 봐준 교열부원 등 모든 조선일보 식구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그러나 누구보다 독자 여러분께 제 늙은 몸을 구부려 큰절을 올립니다. ‘李圭泰 코너’가 6701회까지 이어올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독자 여러분의 성원과 사랑 덕분이었다는 것을 제가 어떻게 잊겠습니까.
감사합니다.
--마지막 이규태 코너는 투병 중인 필자의 구술에 의해 작성되었습니다.
입력 : 2006.02.22 18:54 21' / 수정 : 2006.02.22 18:56 03'
[참고자료]
• 22년11개월10일만에 끝나는 이규태 코너
"평생 글 행복한 삶…아, 이제는 그만" [06/02/22 18:54]
• 고 이규태 기자는 누구인가? [06/02/25 17:50]
• 전두환 전 대통령도 백담사에 이규태 책을 가져가 [06/02/25 17:55]
• "이규태, 그는 천상 기자였다" [06/02/25 19:42]
• 마르지 않는 샘 '이규태 코너'의 비밀 [06/02/25 20:03]
• 도올 김용옥도 미 유학중 "'이규태 한국학' 즐겨 읽었다" 고백 [06/02/25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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