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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석

ysl* 사람들 / 2004. 7. 15. 23:50



김광석 - 한국포크음악의 대들보. 경희중학교 - 대광고등학교를 거쳐 명지대학교 입학. 80년대 노래패 '노래를 찾는 사람들'의 창단멤버로 음악을 시작, 노래를 통한 사회운동으로 민주화운동에 참여.  동물원 활동과 자신의 1,2집을 통해 사랑받았다. 대학로 학전소극장을 통해 소극장 라이브 콘서트가 자리를 잡아가는데 많은 기여를 하였고 모던포크의 라이브 가수로서 자리를 확고히 다졌다. 


주간한국에 실린 김광석 약력. [상,]


[추억의 LP 여행] 김광석(下)
소극장 라이브 문화 부활에 혼신
홀연히 세상 등진 후 더욱 빚나

매 해마다 음반 발표와 소극장 라이브 공연을 병행하며 관객과의 직접적인 교감에 전력을 쏟은 김광석은 95년 8월, 마침내 대학로 학전 소극장에서 1,000회 기념 공연이라는 금자탑을 이뤘다. 기념으로 2개월 간 전국 투어를 돌았다. 워낙 많은 공연을 했던지라 ' 또 공연을 하느냐'는 의미로 ‘ 또 해’라는 별명이 생겨났을 정도. 11월에는 미국 팬실베니아 대학 , 뉴욕 맨하탄 머킨 콘서트홀에서 공연을 했다. 그의 공연은 20대 여성층은 물론 30대 남성 직장인까지 몰려들어 항상 만원을 이뤘던 흥행보증 수표였다. 그로 인해 대학로를 중심으로 한 소극장 공연 문화가 정착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검소했던 그는 음반과 공연 수입으로 홍대 앞에 4층 짜리 건물을 소유하는 경제적인 자립을 이루었다.

96년 1월 6일, ' 가수 김광석, 또 자살 가요계 충격'이란 기사가 눈에 박혔다. 팬들은 경악했다. 새벽 4시 30분께 마포구 서교동의 원음빌딩 4층 자택 거실 계단에서 그는 숨진 채로 발견됐다. 당시 부인 서씨는 " 남편과 함께 자정부터 새벽 3시까지 맥주 4병을 나눠 마신 뒤 혼자 잠자리에 들었는데 거실에 인기척이 없어 나가보니 남편이 옥상으로 연결되는 16계단 중 8번째 계단에서 굵은 전기 줄에 목을 매단 채 숨져 있었다"고 경찰에 진술했다. 팬들의 가슴에 맑은 웃음과 노래를 심어놓고 그는 서른 둘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등졌다. 그의 죽음에는 많은 의문이 뒤따랐다. 캐나다 유학문제 고민, 음악에 대한 강한 집착에서 발생한 조울증, 여자 문제, 심지어는 타살설까지 온갖 추측이 난무했다.

더욱이 듀스의 멤버였던 김성재, 서진원에 이어 김광석의 죽음과 ' 서태지의 아이들'의 돌연 은퇴 선언 등이 줄을 이어 벌어지자 조직폭력과 연관설까지 불거져 나왔다. 이에 정확한 사인을 밝히기 위해 김광석의 시신은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서 부검이 이루어졌고 경찰 전담반이 긴급 편성이 되기까지 했다. 이 사건들은 급격하게 비대해진 대중문화 속에서 연예인의 자기관리의 한계에 대해 심각한 사회적 이슈로 떠오르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1월 8일, 서울 대학로 학전 소극장 앞에서 유가족들과 김민기, 백창우, 안치환, 노찾사, 동물원 등 50여명의 동료가수들이 참여한 가운데 노제가 치러졌다. 노래패 ' 노래 마을'의 대표 백창우는 조시를 낭송했다. 벽제에서 화장을 마친 후 팥알 크기의 대형 사리 9과가 나와 화제가 되었던 그의 유골은 서울 서초구 수안사에 안치되었다. 그의 죽음은 새로운 부활이었다. 49제 날엔 60명의 가수가 참여해 연세대 대강당에서 추모콘서트가 열렸고 9월엔 팬클럽 ' 둥근 소리'를 중심으로 그의 유작라이브 CD 앨범 ' 인생 이야기'와 ' 노래 이야기' 등 2장이 발매되는 등 그를 아꼈던 사람들은 그의 죽음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자살 전날 밤늦게까지 함께 음악을 이야기했던 선배 백창우는 김광석의 미발표 곡 ' 부치지 않는 편지 1, 2'를 담은 추모 음반 ' 가객'을 1주기 기념으로 발표를 했다. 이 음반은 음악적인 지평을 넓히고 싶었던 김광석이 노래마을의 리더 백창우와 시인 정호승등과 함께 시와 노래와 접목하는 새로운 음악적 시도가 담긴 ' 노래로 만나는 시' 앨범을 위해 녹음한 최후의 음원이었다. 90년대의 마지막 정통 포크 가수라는 평가에 걸맞게, 그는 때이른 죽음을 예견한 듯 한이 담긴 애절한 목소리는 듣는 이들의 가슴을 적셨다. 이 음반은 10만장이 팔려 나가며 각종 방송 차트에 올라 음악 관계자들을 놀라게 했다. 98년 말, 김민기를 회장으로 하여 선후배 50여명이 모여 추모사업회를 결성해 대학로에 추모비 건립과 신인 포크 가요제 개최를 논의했다. 그 결과 99년 3주기 때는 30여 팀이 참가해 ' 김광석 다시 만나기 - 99포크 페스티벌'을 대학로 학전 블루 소극장에서 개최했다.

2000 년,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에 그의 노래 ' 이등병의 편지'가 다시 한번 그를 추억하게 했다. 이 노래는 입대를 앞둔 대한민국 젊은이들의 공식 주제가가 되었다. 아름다운 멜로디와 가사는 입대를 앞둔 젊은이들과 가족 혹은 친구들을 떠나보내야 하는 모두의 가슴을 울리며 파고 들었다. 2000년 12월에 발매된 추모 음반 ' 김광석 앤솔로지1-다시 꽃씨 되어'. 거칠고 지친 듯한 그의 목소리였지만 분명 희망의 불씨처럼 아련함이 살아 있었다. 생전의 김광석 목소리와 박학기, 안치환, 윤도현, 이소라, 김건모, 강산에, 권진원등 그의 음악 동료와 후배 가수들의 참여로 더빙 제작된 이 음원은 의미 있는 시도였다. 2001년엔 미발표 곡 ' 틈',' 외로운 밤', 애창곡 ' 먼지가 되어'등을 수록한 2장의 앨범이 ' 김광석 클래식'으로 발표가 되어 그를 그리워 하는 팬들의 갈증을 풀어 주었다.


요절가수 김광석은 1990년대에 이르러 힘없이 주저 않은 소극장 라이브 콘서트 문화에 소생의 기름진 자양분을 공급했던 아티스트였다. “ 더 이상 나의 음악을 포크로 보지 말라”던 생전의 그의 고백에도 불구하고 댄스와 발라드음악에 밀려 고사상태에 빠졌던 모던 포크를 되살리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한 그의 음악활동은 의미 있는 작업으로 평가할 만 하다. 그러나 외롭게 벌였던 그의 음악 독립 전쟁은 요절로 인해 완성을 보지 못한 아쉬움을 남는다. 쇠로 만든 ' 도브로'라는 기타를 갖는 것이 꿈이었던 요절 포크가수 김광석. 헤어질 때면 누구에게나 ' 행복하세요'라는 인사말을 남겨주었던 아름다운 심정만큼이나 그의 노래들은 팬들의 가슴에 살아 꿈틀거리고 있다.

[사진출처]
김광석을 추억하는 이들의 작은 모임
http://kimkwangseok.org/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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