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이미지
세상에 떠도는 수많은 느낌과 아이디어! 같은 느낌, 비슷한 생각.... 어때요? wizysl

카테고리

전체보기 (5128)
ysl* 아이디어 (346)
ysl* 사람들 (552)
ysl* ndns 내돈내산 (134)
ysl* 맛 (278)
ysl* 건강 (34)
ysl*sports (9)
ysl* 컨텐츠 (1827)
ysl* 트래블 (543)
ysl* 랭킹 (221)
ysl* 하드웨어 (377)
ysl*mobile (316)
맥HW (93)
맥SW (198)
맥Korea (81)
ysl*admin (10)
Total
Today
Yesterday

달력

« » 2024.5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태그목록

최근에 올라온 글

'ysl* 사람들'에 해당되는 글 552건

  1. 2006.10.07 스탠포드 법대 교수 Lawrence Lessig 1
  2. 2006.10.06 26년의 강풀
  3. 2006.10.01 세스 고딘
  4. 2006.06.23 스티브 잡스와 애플 컴퓨터사
  5. 2005.10.25 피아노맨 1
  6. 2005.10.23 취미가 김세랑 1
  7. 2005.10.22 너는 내 운명 박진표 감독 1
  8. 2005.09.29 고 정운영 선생 2005-9.24 타계
  9. 2005.05.08 육영수 여사
  10. 2004.07.15 김광석 4
  11. 2004.05.20 이은주
  12. 2003.11.02 영화사집 이유진 대표
http://www.lessig.org/

 

사용자 삽입 이미지

와이어드 지에 자주 소개되는 스탠포드 대학 법대 교수님. 경력이 화려한데...

최근에는 저작권 문제에 대해서 creative commons 라는 개념을 내세우고 있다.

와이어드 지에 실려있던 CC 오디오 시디를 기억하는가?


[참고자료]

* Page name: Lawrence Lessig
* Author: Wikipedia contributors
* Publisher: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 Date of last revision: 2 June 2008 11:16 UTC
* Date retrieved: 9 June 2008 13:37 UTC
* Permanent link: http://en.wikipedia.org/w/index.php?title=Lawrence_Lessig&oldid=216601940
* Page Version ID: 216601940

'ysl* 사람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태호 - 대학 신입생에게  (0) 2007.02.16
도종환 - 어릴때 내 꿈은  (0) 2007.02.16
랜도의 월터 랜도  (0) 2007.01.26
Robert Falcon Scott  (0) 2007.01.16
만화가 프랭크 밀러  (0) 2006.10.07
26년의 강풀  (0) 2006.10.06
세스 고딘  (0) 2006.10.01
스티브 잡스와 애플 컴퓨터사  (0) 2006.06.23
피아노맨  (1) 2005.10.25
취미가 김세랑  (1) 2005.10.23
Posted by wizysl
, |

26년의 강풀

ysl* 사람들 / 2006. 10. 6. 11:27
사용자 삽입 이미지

http://cartoon.media.daum.net/group1/kangfull26/200604/03/m_daum/v12244899.html

강풀이라는 작가. 그냥 엽기 만화 그리는 작가인 줄 알았다.
26년 이라는 작품보고 생각을 바꿨다.
그에게 영향을 준 박재동 화백의 그 만화 한 편은 또 어떻고?

사용자 삽입 이미지

'ysl* 사람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도종환 - 어릴때 내 꿈은  (0) 2007.02.16
랜도의 월터 랜도  (0) 2007.01.26
Robert Falcon Scott  (0) 2007.01.16
만화가 프랭크 밀러  (0) 2006.10.07
스탠포드 법대 교수 Lawrence Lessig  (1) 2006.10.07
세스 고딘  (0) 2006.10.01
스티브 잡스와 애플 컴퓨터사  (0) 2006.06.23
피아노맨  (1) 2005.10.25
취미가 김세랑  (1) 2005.10.23
너는 내 운명 박진표 감독  (1) 2005.10.22
Posted by wizysl
, |

세스 고딘

ysl* 사람들 / 2006. 10. 1. 12:10

purple cow 이야기를 들어본 적 있는가?
 
마케팅이란 과연 무엇일까 하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다른 사람들이 하지 않은 것을 하면 된다는 것으로 집약된다.
다들 품질로 승부할때는 섹시한 컨셉 광고로 차별화하고,
모든 제품들이 광고에 돈을 쏟아부을때
광고를 하지 않기로 하여 차별화하라는 식이다.
 
그의 책을 읽으면 수다스럽지만 들으면 재미있는 이야기꾼과
같이 맥주 한잔을 마시는 기분이 든다.
 
그의 홈페이지 www.sethgodin.com 에 있는 그에대한 소개이다.

http://www.sethgodin.com/
 

[자기소개]
SETH GODIN is a bestselling author, entrepreneur and agent of change.
Godin is author of six books that have been bestsellers around the world and changed the way people think about marketing, change and work.
 
Permission Marketing was an Amazon.com Top 100 bestseller for a year, a Fortune Best Business Book and it spent four months on the Business Week bestseller list. It also appeared on the New York Times business book bestseller list.
 
Unleashing the Ideavirus is the most popular ebook ever written. More than 1,000,000 people downloaded the digital version of this book about how ideas spread. Featured in USA Today, The New York Times, The Industry Standard and Wired Online, Ideavirus hit #4 on the Amazon Japan bestseller list, and #5 in the USA.
 
The Big Red Fez, Godin's take on web design, was the #1 ebook (worldwide) on Amazon for almost a year before it was published in paperback in 2002. The Miami Herald called it one of the best business books of the year.
 
Survival is Not Enough has made bestseller lists in Germany, the UK and the United States. With a foreword by Charles Darwin, this breakthrough book redefines what change means to anyone who works for a living. Tom Peters called it a, "landmark." The book was first excerpted in Fast Company, where Godin is a contributing editor.
 
Purple Cow, was a New York Times and Wall Street Journal bestseller. It's all about how companies can transform themselves by becoming remarkable.
 
 http://www.amazon.com/gp/reader/159184021X/ref=sib_dp_top_fc/102-9589313-2432940?ie=UTF8&p=S001#reader-link
 
Free Prize Inside, was an Amazon Top 50 bestseller and a New York Times business bestseller. It describes how every single person in your organization is in the marketing department... and shows you how to make something happen.
 
Just out, All Marketers are Liars has already made the Amazon Top 100 and has inspired its own blog. Find out more at www.allmarketersareliars.com.
 
Seth is a renowned speaker as well. He was recently chosen as one of 21 Speakers for the Next Century by Successful Meetings and is consistently rated among the very best speakers by the audiences he addresses.
Seth was founder and CEO of Yoyodyne, the industryIs leading interactive direct marketing company, which Yahoo! acquired in late 1998.
He holds an MBA from Stanford, and was called "the Ultimate Entrepreneur for the Information Age" by Business Week. [출처 - 세스고딘 홈페이지]

'ysl* 사람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랜도의 월터 랜도  (0) 2007.01.26
Robert Falcon Scott  (0) 2007.01.16
만화가 프랭크 밀러  (0) 2006.10.07
스탠포드 법대 교수 Lawrence Lessig  (1) 2006.10.07
26년의 강풀  (0) 2006.10.06
스티브 잡스와 애플 컴퓨터사  (0) 2006.06.23
피아노맨  (1) 2005.10.25
취미가 김세랑  (1) 2005.10.23
너는 내 운명 박진표 감독  (1) 2005.10.22
고 정운영 선생 2005-9.24 타계  (0) 2005.09.29
Posted by wizysl
, |


'ysl* 사람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Robert Falcon Scott  (0) 2007.01.16
만화가 프랭크 밀러  (0) 2006.10.07
스탠포드 법대 교수 Lawrence Lessig  (1) 2006.10.07
26년의 강풀  (0) 2006.10.06
세스 고딘  (0) 2006.10.01
피아노맨  (1) 2005.10.25
취미가 김세랑  (1) 2005.10.23
너는 내 운명 박진표 감독  (1) 2005.10.22
고 정운영 선생 2005-9.24 타계  (0) 2005.09.29
육영수 여사  (0) 2005.05.08
Posted by wizysl
, |

피아노맨

ysl* 사람들 / 2005. 10. 25. 19:43

사용자 삽입 이미지


피아노맨은 매킨토시 관련 컬럼이나 그림등을 그려온 컬럼니스트. 그의 블로그를 이세랑님 블로그에서 우연히 찾았다. 그동안 매킨토시 커뮤니티에서 본 많은 외국 소스글들이 그의 블로그 www.qts.co.kr 에 잘 소개되어 있었다.

 ... 그러나 잠깐 읽기 시작했던 그의 블로그를 난 새벽 네시까지 읽고 말았다. 2005년 초에 가영이라는 네살난 딸과 함께 혼자 계시는 어머님 집으로 옮겨야 했던 그의 이야기는 한번도 만난적 없는 매킨토시 애호가의 개인적 애환으로 남의 일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알비레오 사이트에 의하면 2000년에는 부산 MBC에 근무하며 개인적으로 공작단 사이트를 운영하며 영화들을 온라인으로 스트림하더니 지금은 ING 생명에서 보험 세일즈를 하고 있다. 자격시험에 울고 웃는 딸아이의 아버지. 멀리서나마 피아노맨을 위해서 화이팅을 외쳐주고 싶다.

최근에는 어느 개인병원 사무국장으로 일하시는 듯.


'ysl* 사람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만화가 프랭크 밀러  (0) 2006.10.07
스탠포드 법대 교수 Lawrence Lessig  (1) 2006.10.07
26년의 강풀  (0) 2006.10.06
세스 고딘  (0) 2006.10.01
스티브 잡스와 애플 컴퓨터사  (0) 2006.06.23
취미가 김세랑  (1) 2005.10.23
너는 내 운명 박진표 감독  (1) 2005.10.22
고 정운영 선생 2005-9.24 타계  (0) 2005.09.29
육영수 여사  (0) 2005.05.08
김광석  (4) 2004.07.15
Posted by wizysl
, |

취미가 김세랑

ysl* 사람들 / 2005. 10. 23. 19:47
중학교때 곱게 모아오던 모델아트와 호비재팬을 읽으며 난 나이가 들면 이런 책을 한국에도 만들어 팔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때 만들었던 "꾸미기"라는 개인잡지는 타미야 제품 설명서와 여러 관련 잡지들의 번역과 편집에 불과했지만 손수 그림을 그리고, 색칠을 하고...

나이들어도 잡지 만드는 일을 하지는 못했지만, 이제는 이런저런 웹페이지 운영하는 일이 어쩌면 잡지 만드는 일 비슷하다고 느끼고 있다.

그런데 90년에 나와 비슷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잡지를 나보다 먼저 내고 말았다. 내가 미국에서 밀리터리 모델러 잡지를 사보고 있을때 누군가는 한국에서 "호비스트"라는 잡지를 출간해 낸 것이다. 가끔 사 읽어 본 잡지속의 "모형제작 편력"은 바로 동시대 모형 애호가들 누구나의 이야기와도 오버랩 되는 것이었다.

김세랑. 그가 매킨토시로 팟캐스팅을 하고 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티스토리 블로그에서 따온 자화상

http://serang.tistory.com/


'ysl* 사람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탠포드 법대 교수 Lawrence Lessig  (1) 2006.10.07
26년의 강풀  (0) 2006.10.06
세스 고딘  (0) 2006.10.01
스티브 잡스와 애플 컴퓨터사  (0) 2006.06.23
피아노맨  (1) 2005.10.25
너는 내 운명 박진표 감독  (1) 2005.10.22
고 정운영 선생 2005-9.24 타계  (0) 2005.09.29
육영수 여사  (0) 2005.05.08
김광석  (4) 2004.07.15
이은주  (0) 2004.05.20
Posted by wizysl
, |
사용자 삽입 이미지

예측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당초 에이즈에 걸린 시골 다방 종업원 출신 여자와 농촌 총각의 사랑 이야기를 다루는 영화를 만든다고 했을 때, 충무로 사람들은 이 영화의 흥행이 꽤 어려울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러나 ‘너는 내 운명’은 멜로 영화로 역대 최고 흥행성적을 이미 달성했다. 20일까지 282만명. 이 영화를 만든 사람은 지난 2002년 노인들의 성(性)과 사랑을 다룬 연출 데뷔작 ‘죽어도 좋아’로 일찌감치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던 박진표(39) 감독. 그는 옴니버스 영화 ‘여섯개의 시선’에 포함된 단편 ‘신비한 영어나라’에서 유창한 영어 발음을 위해 혀 수술을 받는 어린이의 모습을 보여줘 충격을 안겨주었다. 이 작품들은 모두 실화를 소재로 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그것이 알고 싶다’ ‘추적 사건과 사람들’ ‘뉴스 따라잡기’ 같은 프로그램에서 10여년간 시사 다큐멘터리 PD 생활을 했던 그는 영화감독에의 오랜 꿈을 이루기 위해 2001년 말 안정된 직장을 버렸다. 그리고 4년이 채 지나지 않은 지금, 충무로는 묻혀진 사회 문제를 파고드는 예리한 눈과 소외된 사람들을 부둥켜안는 따스한 손을 함께 가진 감독 한 명을 갖게 됐다. 그건 한국 영화가 이제껏 소유하지 못했던 종류의 재능이다. (이하 생략)

http://www.chosun.com/se/news/200510/200510210398.html


박진표 감독은 1966년 서울에서 태어났으며 중앙대학교 영화과를 졸업했다. 방송국 PD로 일하다 실화를 바탕으로 노년의 사랑을 그린 장편 영화 <죽어도 좋아>를 만들면서 화제를 불러 일으켰다. <죽어도 좋아>는 제한상영가 등급을 받고 격렬한 논란을 벌인 끝에 개봉했다. 그는 이 영화로 칸느 영화제 비평가 주간에 초청되었으며 제3회 도쿄 필름 엑스 특별 언급상, 제7회 부산영화제 국제 영화 평론가 협회상, 부산 국제 영화제 관객상. 뉴커런츠 특별 언급상 등을 수상했다.

'ysl* 사람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26년의 강풀  (0) 2006.10.06
세스 고딘  (0) 2006.10.01
스티브 잡스와 애플 컴퓨터사  (0) 2006.06.23
피아노맨  (1) 2005.10.25
취미가 김세랑  (1) 2005.10.23
고 정운영 선생 2005-9.24 타계  (0) 2005.09.29
육영수 여사  (0) 2005.05.08
김광석  (4) 2004.07.15
이은주  (0) 2004.05.20
영화사집 이유진 대표  (0) 2003.11.02
Posted by wizysl
, |
중앙일보 독서시론 등에서 책읽는 논설위원, 목청 올리지 않는 주장을 펼치던 분이 신장염으로 타계하였다고 한다. 62세. 프레시언 만은 그분에 대한 추모 꼭지를 만들어 놓았다. 중앙일보에서도 못 보았던 것 같은데...
사용자 삽입 이미지

프레시언에서 하나 옮겨온다.
=========================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의 부활을 위하여
정운영선생 추모 아카데미즘-저널리즘의 조화도



2005-09-25 오후 5:46:01

추 석 며칠 전날 한밤중에 정운영 선생의 전화를 받았는데, 느닷없이 자신의 책들을 내게 맡기겠다는 말씀이셨다. 어림잡아도 2만 권쯤 되는 장서는 선생이 유학 시절부터 모아오신 것으로 그 규모와 범위는 경제학계에서도 아주 유명한 것이었다. 그런데 애지중지하던 그 책들을 내게 맡기시겠다니.

지난 봄에 뵐 때 신장에 이상이 생겨 고생하신다는 말씀은 들었지만, 그냥 잔병치레거니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던 터에 갑자기 그런 말씀을 듣고 불안하기는 했지만, 추석쯤 퇴원할 수 있을 것이니 그 때 다시 의논하자는 말씀을 곧이곧대로 믿고 싶었다. 그러나 추석을 넘기고도 퇴원하지 못하신 선생을 찾아뵈니 힘겹게 단 두 마디 말씀만 하셨다. "돌아가야겠어", "이번 생에서 너와의 인연은 여기까진가봐". 내일쯤 다시 찾아뵈면 더 하실 말씀이 있겠거니 생각했는데, 무엇이 그리 급하셨는지 그만 오늘 아침 훌쩍 떠나버리셨다.

어느덧 나도 50줄에 접어들다 보니 사람이란 결코 단순치만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누구나 자신의 기질에 따라 나름대로 몇 가지 상이한 면모를 갖고 있겠지만, 선생의 경우처럼 아카데미즘과 저널리즘을 조화시킨 경우는 드문 것 같다. 일반 시민들은 <한겨레신문>이나 <중앙일보>에 실린 칼럼이나 선생이 사회를 보던 텔레비전 시사토론을 더 기억할 것이다. 하기야 1850년대의 마르크스에게도 저널리즘이 단지 호구지책만은 아니었다. 그러나 내 생각으로는 아무래도 마르크스나 정 선생이나 모두 경제학자로 기억해야 할 것 같다.

1944 년 아산에서 태어난 선생은 경북중학교와 온양고등학교를 거쳐 서울대학교 상과대학 경제학과에 입학하셨다. 64학번으로 이른바 6·3 세대에 속하는 선생은 <상대신문>을 매개로 학생운동에 투신하셨고, 이 때문에 학부를 '5학년'까지 다니셨다. 석사 과정에 진학하신 후에도 선생은 학생운동을 정리하지 않으셨는데, 그 시절 상대와 문리대 후배들을 아우르는 한국사회연구회(한사)를 조직하신 것은 아주 유명한 일화로 남아 있다. 아직도 노동자운동의 일각을 지키고 있는 김승호 선배는 선생이 아끼시던 한사 성원 중 하나였다.

1972년 석사 과정을 수료하신 후에 선생은 한국일보사를 거쳐 중앙일보사에 입사하셨는데, 입사 동기생 중 한 분이 나중에 <이론> 동인으로 함께 활동하신 지기 정춘수 선생이었다. 가톨릭 노동사목이나 학생운동과도 관련이 깊었던 선생은 그런 인연으로 벨기에 루뱅대학교에서 장학금을 얻어 유학을 떠나시게 되었다. 유학을 떠나기 직전 피아노 전공의 박양선 여사와 결혼하신 선생은 곧 연년생으로 유경·유신 두 딸을 얻으셨다. 1973년 루뱅에 도착하신 선생은 학부 과정부터 경제학 공부를 새로 시작하여 1981년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의 핵심 중의 핵심인 이윤율 저하를 주제로 박사 학위를 취득하셨다.

학 위를 끝낸 후 루뱅대학교 경제사회연구소에 남을 수도 있었던 선생은 귀국을 결심하셨다. 알다시피 5공 군부독재의 서슬이 시퍼렇던 80년대 초는 너도 나도 도피성 유학을 떠날 때였고 학위를 끝낸 사람은 망명객을 자임하면서 귀국을 꺼릴 때였다.

그러 나 1982년에 선생은 영국에서 학위를 끝낸 김수행 선생과 함께 한신대학교 경상학부 교수로 부임하셨다. 나와의 인연도 그때쯤 시작된 것인데, 1984년에 이영훈·강남훈 두 교수와 함께 교수진의 일원으로 선발된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창설된 한신대 경상학부는 남한에서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의 부활을 상징하는 일대 사건이었다. 그러나 호사다마인가, 1986년 말 학내 민주화 투쟁에 연루되어 김수행·정운영 두 선생이 해임되면서 한신대 경상학부는 실질적으로 해체되고 말았다. 사실 김수행·정운영 두 선생이 한신대에서 해임된 것은 경상학부 교수 10명 전체가 연대로 져야 할 책임을 도맡으신 것이었다.

그 후 김수행 선생은 서울대학교 경제학부 교수로 초빙되어 해임이 오히려 전화위복이 된 셈이었지만, 그런 행운이 없었던 선생은 자의반 타의반으로 저널리즘에 몸을 담게 되었다. 마찬가지로 경제학과 출신인 박현채 선생의 선례에 따라 경제평론가를 자처하신 선생은 1988년 창간 시절부터 1990년대 내내 <한겨레신문> 논설위원을 지내셨다. 그 때의 성과가 바로 1989년부터 매해 한 권씩 묶어낸 <광대의 경제학>, <저 낮은 경제학을 위하여>, <경제학을 위한 변명>인데, 2002년까지 거의 격년에 한 권씩 나온 경제평론집은 모두 8권에 이르렀다. 그리고 2001년에는 이른바 개혁·개방 이후 중국 사회주의의 자본주의적 변질을 고발하는 <중국경제 산책>을 쓰기도 하셨다.

그러나 한신대학교에서 해임된 후에도 선생은 서울대학교와 고려대학교에서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을 강의하셨는데, 강의실은 언제나 열정과 토론으로 후끈 달아오르곤 했다. 1987-89년에는 당시 학생들의 주요 관심사였던 한국사회 성격 논쟁의 이론적인 쟁점을 해명하기 위해 <국가독점자본주의 이론> 4권을 편역하셨다. 이는 1984년에 나온 2권의 편저 <한국자본주의론> 및 <세계자본주의론>의 후속작이라고도 할 수 있다.

게다가 1992-93년에는 마르크스주의의 위기를 마르크스주의의 변화의 계기로 삼자는 동인지 <이론>의 초대 편집위원장으로 현실사회주의의 붕괴 이후 혼란에 빠져 있던 이론 진영의 맏형 역할을 맡기도 하셨다. <노동가치이론 연구>가 출판된 것도 바로 1993년이었는데, 이윤율 저하를 통해 1929년 대공황 이후 미국 자본주의를 분석한 박사 논문을 중심으로 <자본> 전체의 이론적 구조를 설명한 이 책은 아직까지도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의 기본 문헌으로 남아 있다.

1997년 <이론>이 폐간되고 1998년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면서, 게다가 서울대와 고대의 강의도 없어지면서 선생은 부쩍 쓸쓸해하시는 것 같았다. 텔레비전 덕분에 길거리나 산행길에서 아니면 심지어 목욕탕에서도 선생을 알아보고 인사를 건네는 사람들이 많아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그것이 속 모르는 이들 생각처럼 마냥 신나는 일일 수만은 없었던 것이다. 1999년 경기대학교 교수로 임명되기도 하셨지만, 그것도 그리 큰 도움이 되지는 못했다. 그런 중에도 선생은 <노동가치이론 연구>의 후속작을 구상하여 2년 전쯤 원고를 거의 완성하셨다. 그러나 불의의 사고로 결국 출판이 미루어지고 말았는데, 아마 마지막까지도 못내 아쉬워하셨을 것이다.

정운 영 선생에 대한 평가는 물론 역사의 몫으로 남겨두어야만 할 것이다. 그러나 선생처럼 오해를 받아온 분도 그리 흔치만은 않기에 한두 마디 사족을 달고자 한다. 나도 처음에는 몰랐지만, 정운영 선생의 부친은 일제 강점기 대표적인 민족자본의 하나로 꼽히던 조흥은행 창업주의 동생이었다. 아산에서 태어난 선생이 경북중학교를 졸업한 것은 가족이 대구로 피난했던 때문인데, 그러나 일본 유학생 출신의 '한량'이신 부친은 곧 가산을 탕진하셨다.

기울어진 가세를 상징하는 일화로 선생의 '식탐'을 들 수 있겠다. 한창 자랄 나이인 선생은 식은 밥이든 묵은 김치든 눈에 띠는 대로 입에 움켜 넣고 모친의 매를 피해 뒷간으로 달아나셨다고 한다. 선생의 집 여기저기에 사탕이나 과자 그릇이 널려 있는 것을 보고 놀려대곤 하던 나에게 변명 아닌 변명으로 그런 말씀을 하셨을 때 철없이 깔깔 웃었다.

부친과 사별한 후 선생은 모친의 고향인 아산으로 돌아와 온양고등학교를 다니셨다. 그 시절 선생은 1등을 도맡긴 했지만 모범생은 결코 아니었고 오히려 온양역 근처에서 아주 유명하셨을 정도였다고 한다. 아마도 그 때문에 재수를 하셨던 것 같다.

그러나 선생은 경제학과 선배인 신영복 선생을 만나면서 인생의 행로를 크게 바꾸셨다. 그래서 철없을 시절 나는 이문열 씨의 <영웅시대>를 흉내내어 선생을 '회개한 부르주아'라고 놀려대곤 했다.

선 생의 생애에서 가장 논란이 되는 것이 아마 말년에 <한겨레신문>에서 <중앙일보>로 옮기신 일일 것이다. 그러나 <한겨레신문> 논설위원을 사임하신 것은 결코 선생 자신의 선택이 아니었다. 국외자인 내가 자세히 알 수는 없겠지만, 창간 시절부터 복잡했던 <한겨레신문>의 내부사정이 김대중 정부 출범 이후 더욱 악화되었던 것이 무시할 수만은 없는 요인이었다는 생각이다.

왜 하필 <중앙일보>냐는 힐난에 대해서는 적어도 김대중 정부 출범 이후 <한겨레신문>과 <중앙일보>의 차이를 그리 과장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한겨레신문>에 그대로 계셨더라도 선생은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의 신자유주의 정책이나 이른바 386세대의 포퓰리즘적 행태에 대해 비판하셨을 것이다.

물론 50대 말에도 전세집을 구해야만 했던 선생의 경제사정도 무시할 수만은 없다고 본다. <한겨레신문>을 그만두시고 나서 정춘수 선생을 비롯한 몇몇 지기들의 주선으로 <중앙일보>로 옮기시는 과정에서 이런저런 사유들을 짐작하고 있었던 나는 별다른 말씀을 드릴 수 없었고, 김승호 선배도 마찬가지였다.

과거지사 에 대해 가정을 세우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지만, <한겨레신문> 논설위원을 사임하면서 선생이 저널리즘을 아주 떠나실 수도 있었다. 신영복 선생을 중심으로 선생과 나를 성공회대학교 경제학과 교수로 초빙하려는 시도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당시 한신대, 성공회대, 상지대가 이른바 진보대학 네크워크를 구상하던 중이어서 세 대학 사이의 역학구도가 아주 미묘해졌고, 그 때문에 신영복 선생의 시도는 좌절되었다. 그렇지만 않았더라면, 한신대 경상학부에 걸었던 선생이나 나의 꿈이 성공회대 경제학과에서 실현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윤소영/한신대 국제경제학과 교수

=====

정운영은 1944년 충남 아산에서 태어났다. 1964년 서울대학교 상과대학 경제학과에 입학해 1972년 석사 과정을 마치고 〈한국일보〉를 거쳐 〈중앙일보〉에 잠시 몸을 담았다. 1973년 벨기에 루뱅 대학에서 학부 과정부터 경제학 공부를 새로 시작해 1981년 이윤율 저하를 주제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82년 귀국해 한신대학교 경상학부 교수로 재직했으며, 1980년대 말부터 10년 동안 서울대학교와 고려대학교에서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을 강의했다. “나는 인간을 믿는다”로 시작해 “인간의 심장은 왼쪽에 있음을 기억하라”라는 말로 끝마쳤던 그의 강의는 당시 학생들에게 암묵적인 필수과목이었다. ‘때로는 질 줄 알면서도 싸워야 할 때가 있는 법이다’라는 말로 〈이론〉창간을 주도하는 등 진보 운동의 이론적 바탕을 만들었다.
‘MBC 100분 토론’ ‘EBS 정운영의 책으로 읽는 세상’ 등을 진행하며 보여준 날카로운 화술과 르네상스적 지식으로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았으며. 〈한겨레〉〈중앙일보〉의 논설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선보인 그의 칼럼은 칼럼 글쓰기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1996년에는 언론인클럽 언론상(신문칼럼상)을 수상했다.
주요 저작으로 《세계 자본주의론》(1984) 《한국 자본주의론》(1984) 《노동가치이론 연구》(1993) 《자본주의 경제 산책》(2006) 등의 경제학 이론서와 《광대의 경제학》(1989) 《피사의 전망대》(1995) 《레테를 위한 비망록》(1997) 《신세기 랩소디》(2002) 《심장은 왼쪽에 있음을 기억하라》(2006) 등 아홉 권의 칼럼집이 있다.

-심장은 왼쪽에 있음을 기억하라, 지은이 소개에서

'ysl* 사람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26년의 강풀  (0) 2006.10.06
세스 고딘  (0) 2006.10.01
스티브 잡스와 애플 컴퓨터사  (0) 2006.06.23
피아노맨  (1) 2005.10.25
취미가 김세랑  (1) 2005.10.23
너는 내 운명 박진표 감독  (1) 2005.10.22
육영수 여사  (0) 2005.05.08
김광석  (4) 2004.07.15
이은주  (0) 2004.05.20
영화사집 이유진 대표  (0) 2003.11.02
Posted by wizysl
, |

육영수 여사

ysl* 사람들 / 2005. 5. 8. 20:32

70년대 한국의 어린이들과 당시 대통령 부인이었던 육영수 여사
김숙희 : 퍼가요~♡ (2005.06.12 10:27) 댓글버튼
안영경 : 어! 앞에 있는 얘가 오빠네.ㅋㅋㅋ (2005.07.14 02:07) 댓글버튼

'ysl* 사람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26년의 강풀  (0) 2006.10.06
세스 고딘  (0) 2006.10.01
스티브 잡스와 애플 컴퓨터사  (0) 2006.06.23
피아노맨  (1) 2005.10.25
취미가 김세랑  (1) 2005.10.23
너는 내 운명 박진표 감독  (1) 2005.10.22
고 정운영 선생 2005-9.24 타계  (0) 2005.09.29
김광석  (4) 2004.07.15
이은주  (0) 2004.05.20
영화사집 이유진 대표  (0) 2003.11.02
Posted by wizysl
, |

김광석

ysl* 사람들 / 2004. 7. 15. 23:50



김광석 - 한국포크음악의 대들보. 경희중학교 - 대광고등학교를 거쳐 명지대학교 입학. 80년대 노래패 '노래를 찾는 사람들'의 창단멤버로 음악을 시작, 노래를 통한 사회운동으로 민주화운동에 참여.  동물원 활동과 자신의 1,2집을 통해 사랑받았다. 대학로 학전소극장을 통해 소극장 라이브 콘서트가 자리를 잡아가는데 많은 기여를 하였고 모던포크의 라이브 가수로서 자리를 확고히 다졌다. 


주간한국에 실린 김광석 약력. [상,]


[추억의 LP 여행] 김광석(下)
소극장 라이브 문화 부활에 혼신
홀연히 세상 등진 후 더욱 빚나

매 해마다 음반 발표와 소극장 라이브 공연을 병행하며 관객과의 직접적인 교감에 전력을 쏟은 김광석은 95년 8월, 마침내 대학로 학전 소극장에서 1,000회 기념 공연이라는 금자탑을 이뤘다. 기념으로 2개월 간 전국 투어를 돌았다. 워낙 많은 공연을 했던지라 ' 또 공연을 하느냐'는 의미로 ‘ 또 해’라는 별명이 생겨났을 정도. 11월에는 미국 팬실베니아 대학 , 뉴욕 맨하탄 머킨 콘서트홀에서 공연을 했다. 그의 공연은 20대 여성층은 물론 30대 남성 직장인까지 몰려들어 항상 만원을 이뤘던 흥행보증 수표였다. 그로 인해 대학로를 중심으로 한 소극장 공연 문화가 정착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검소했던 그는 음반과 공연 수입으로 홍대 앞에 4층 짜리 건물을 소유하는 경제적인 자립을 이루었다.

96년 1월 6일, ' 가수 김광석, 또 자살 가요계 충격'이란 기사가 눈에 박혔다. 팬들은 경악했다. 새벽 4시 30분께 마포구 서교동의 원음빌딩 4층 자택 거실 계단에서 그는 숨진 채로 발견됐다. 당시 부인 서씨는 " 남편과 함께 자정부터 새벽 3시까지 맥주 4병을 나눠 마신 뒤 혼자 잠자리에 들었는데 거실에 인기척이 없어 나가보니 남편이 옥상으로 연결되는 16계단 중 8번째 계단에서 굵은 전기 줄에 목을 매단 채 숨져 있었다"고 경찰에 진술했다. 팬들의 가슴에 맑은 웃음과 노래를 심어놓고 그는 서른 둘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등졌다. 그의 죽음에는 많은 의문이 뒤따랐다. 캐나다 유학문제 고민, 음악에 대한 강한 집착에서 발생한 조울증, 여자 문제, 심지어는 타살설까지 온갖 추측이 난무했다.

더욱이 듀스의 멤버였던 김성재, 서진원에 이어 김광석의 죽음과 ' 서태지의 아이들'의 돌연 은퇴 선언 등이 줄을 이어 벌어지자 조직폭력과 연관설까지 불거져 나왔다. 이에 정확한 사인을 밝히기 위해 김광석의 시신은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서 부검이 이루어졌고 경찰 전담반이 긴급 편성이 되기까지 했다. 이 사건들은 급격하게 비대해진 대중문화 속에서 연예인의 자기관리의 한계에 대해 심각한 사회적 이슈로 떠오르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1월 8일, 서울 대학로 학전 소극장 앞에서 유가족들과 김민기, 백창우, 안치환, 노찾사, 동물원 등 50여명의 동료가수들이 참여한 가운데 노제가 치러졌다. 노래패 ' 노래 마을'의 대표 백창우는 조시를 낭송했다. 벽제에서 화장을 마친 후 팥알 크기의 대형 사리 9과가 나와 화제가 되었던 그의 유골은 서울 서초구 수안사에 안치되었다. 그의 죽음은 새로운 부활이었다. 49제 날엔 60명의 가수가 참여해 연세대 대강당에서 추모콘서트가 열렸고 9월엔 팬클럽 ' 둥근 소리'를 중심으로 그의 유작라이브 CD 앨범 ' 인생 이야기'와 ' 노래 이야기' 등 2장이 발매되는 등 그를 아꼈던 사람들은 그의 죽음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자살 전날 밤늦게까지 함께 음악을 이야기했던 선배 백창우는 김광석의 미발표 곡 ' 부치지 않는 편지 1, 2'를 담은 추모 음반 ' 가객'을 1주기 기념으로 발표를 했다. 이 음반은 음악적인 지평을 넓히고 싶었던 김광석이 노래마을의 리더 백창우와 시인 정호승등과 함께 시와 노래와 접목하는 새로운 음악적 시도가 담긴 ' 노래로 만나는 시' 앨범을 위해 녹음한 최후의 음원이었다. 90년대의 마지막 정통 포크 가수라는 평가에 걸맞게, 그는 때이른 죽음을 예견한 듯 한이 담긴 애절한 목소리는 듣는 이들의 가슴을 적셨다. 이 음반은 10만장이 팔려 나가며 각종 방송 차트에 올라 음악 관계자들을 놀라게 했다. 98년 말, 김민기를 회장으로 하여 선후배 50여명이 모여 추모사업회를 결성해 대학로에 추모비 건립과 신인 포크 가요제 개최를 논의했다. 그 결과 99년 3주기 때는 30여 팀이 참가해 ' 김광석 다시 만나기 - 99포크 페스티벌'을 대학로 학전 블루 소극장에서 개최했다.

2000 년,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에 그의 노래 ' 이등병의 편지'가 다시 한번 그를 추억하게 했다. 이 노래는 입대를 앞둔 대한민국 젊은이들의 공식 주제가가 되었다. 아름다운 멜로디와 가사는 입대를 앞둔 젊은이들과 가족 혹은 친구들을 떠나보내야 하는 모두의 가슴을 울리며 파고 들었다. 2000년 12월에 발매된 추모 음반 ' 김광석 앤솔로지1-다시 꽃씨 되어'. 거칠고 지친 듯한 그의 목소리였지만 분명 희망의 불씨처럼 아련함이 살아 있었다. 생전의 김광석 목소리와 박학기, 안치환, 윤도현, 이소라, 김건모, 강산에, 권진원등 그의 음악 동료와 후배 가수들의 참여로 더빙 제작된 이 음원은 의미 있는 시도였다. 2001년엔 미발표 곡 ' 틈',' 외로운 밤', 애창곡 ' 먼지가 되어'등을 수록한 2장의 앨범이 ' 김광석 클래식'으로 발표가 되어 그를 그리워 하는 팬들의 갈증을 풀어 주었다.


요절가수 김광석은 1990년대에 이르러 힘없이 주저 않은 소극장 라이브 콘서트 문화에 소생의 기름진 자양분을 공급했던 아티스트였다. “ 더 이상 나의 음악을 포크로 보지 말라”던 생전의 그의 고백에도 불구하고 댄스와 발라드음악에 밀려 고사상태에 빠졌던 모던 포크를 되살리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한 그의 음악활동은 의미 있는 작업으로 평가할 만 하다. 그러나 외롭게 벌였던 그의 음악 독립 전쟁은 요절로 인해 완성을 보지 못한 아쉬움을 남는다. 쇠로 만든 ' 도브로'라는 기타를 갖는 것이 꿈이었던 요절 포크가수 김광석. 헤어질 때면 누구에게나 ' 행복하세요'라는 인사말을 남겨주었던 아름다운 심정만큼이나 그의 노래들은 팬들의 가슴에 살아 꿈틀거리고 있다.

[사진출처]
김광석을 추억하는 이들의 작은 모임
http://kimkwangseok.org/


[참고자료]



'ysl* 사람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26년의 강풀  (0) 2006.10.06
세스 고딘  (0) 2006.10.01
스티브 잡스와 애플 컴퓨터사  (0) 2006.06.23
피아노맨  (1) 2005.10.25
취미가 김세랑  (1) 2005.10.23
너는 내 운명 박진표 감독  (1) 2005.10.22
고 정운영 선생 2005-9.24 타계  (0) 2005.09.29
육영수 여사  (0) 2005.05.08
이은주  (0) 2004.05.20
영화사집 이유진 대표  (0) 2003.11.02
Posted by wizysl
, |

이은주

ysl* 사람들 / 2004. 5. 20. 21:17



드라마 불새의 이은주. 이 친구가 20살때 "오 수정"을 찍고, 대학때는 락그룹 싱어였다고? 끼가 넘치는 구나... 부럽다.

이*경 :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배우에염...주연급배우인데도 조연두 마다안하구염..넘 분위기 있어염..^^*(05.20 14:49)
구*은 : 너무 좋아하는 여자입니다!!(06.11 01:42)
이*식 : 2005년 2월 22일 그녀는 떠났다.

=====

‘비운의 여배우’ 이은주 ‘불꽃인생 25년’ 추모열기
[문화일보] 2006-02-21 15:55

(::K-1TV ‘포토 다큐’ 지인들 회고담·추억 소개::) ‘온리 웬 아이 슬립(Only When I Sleep)’이란 노래는 그룹 ‘ 더 코어스(The Corrs)’가 불렀지만, 그 애절함은 전적으로 고( 故) 이은주의 몫이다. 영화 ‘주홍글씨’에서 이은주는 죽음(영 화속 죽음 실제 죽음)이라도 예견한 듯 그렇게 슬픈 눈망울로 담 담하게 그 노래를 불렀다. 이젠 고 이은주가 아니면 ‘Only When I Sleep’의 슬픈 가락을 제대로 음미할 수 있을까.

1년 전 그는 웃음과 눈물의 열정적인 25세의 배우였고, 영화를 사랑하고 영화가 사랑한 이름의 연인이었다. ‘천상(天上)의 배 우’ 이은주에 대한 기억은 기억할수록 눈물샘을 자극하는 한편 의 새드무비였다.

그의 1주기를 맞아 지상파 방송과 케이블 방송이 특집 프로그램 을 마련한다. KBS 1TV ‘포토 다큐’(21일 밤 11시40분)는 불꽃 같은 삶을 뒤로하고 하늘로 돌아간 배우 이은주가 남긴 흔적들을 조명하고, MBC 무비스는 추모특집 영화 ‘오! 수정’(22일 오전 1시)을 방영한다.

‘포토 다큐’는 이은주가 남기고 간 마지막 유품을 방송 최초로 공개하고 그가 이승에 남긴 흔적들을 들춰본다. 그의 삶에 향기 로운 휴식을 줬던 수집품 아로마 향초, 소중한 지인들에게 선물 했던 오르골 장난감, 친구들이 간직하고 있는 친필 편지와 배우 의 꿈을 키우던 학창시절의 사진들, 남다른 음악적 재능이 담긴 재즈음반 등 흔적들 하나하나에서 그의 삶이 다시 태어나는 듯하 다. 그를 기억하는 지인들의 생생한 추억과 회고들도 가슴 뭉클 하게 다가온다. “이은주는 여배우의 시대를 열 수 있었던 아까 운 배우”(영화배우 한석규), “촬영장에서 휴식을 취할 땐 늘 노래를 흥얼거렸다”(〃 이병헌), “애기야~라고 불러주던 언니 의 ?注恬??그립다”(〃 문근영), “그녀는 나의 사진인생 최고의 모델”(사진작가 이보경).

이 프로그램은 유족과 소속사측의 승낙 등 사전 준비에만 두달이 걸릴 정도로 이은주 삶의 구석구석을 파헤쳤다. 특히 인터뷰 자 체를 꺼리는 유명 배우들이 기꺼이 나설 만큼 고인에 대한 추모 열기도 뜨거웠다는 게 제작진의 설명이다.

MBC 무비스가 방영하는 ‘오! 수정’은 이은주의 평면연기가 가 장 돋보이는 수작. 홍상수 감독 작품 중에서 가장 대중적이면서 심리적인 영화로 평가받고 있다.

=== 인터넷에서 퍼온 그녀의 자살 이유. 그녀의 소속사는 나무액터즈.

일년전은 주홍글씨 캐스팅전..
원래 여자 정혜는 김지수가 아니라 이은주 역할이었대여
그런데 여자정혜는 김지수가 주홍글씨는 이은주에게 돌아갔답니다.(참고로 둘은 같은 소속)
책(시나리오)으로 강요했다는 말이 나왔져.
주홍글씨에는 노출신이 많았다더군여
글구 그 돈때문이라는 대목이있는데여.
이것은 확실한것인데 이은주 어머니가 빚이 200억 이었대여
상습적인 도박으로 인하여 그렇게 까지 빚을 지었구
오빠역시도 사업한답시고 이은주의 돈을 썼나봐요
이은주는 연간 한10억 정도 벌었다 하더군여
글구 그 분당집역시도 월세에여. 돈이 없기에 돈이 쪼달린건 사실입니다.
아버지가 어머니와 따로 사는 것을 봐도 어머니의 도박이 쫌 심한것을 알수 있져
오빠와 어머니가 이은주의 죽음을 주홍글씨로 몰아부치자
영화관계자들이 상이 끝나갈때 사실을 밝혔습니다.
확실한 정보입니다.
제 개인적인 견해로는 노출신으로 인한 수치심과 200억의 빚으로..
죽음의 이유는 둘다인것 같슴돠~


=== 2019.7.15 추가

오랫만에 검색해 보니 이은주의 자살 원인으로 감독의 책임을 묻는 청와대 청원이 있다.

상기한 점들을 종합하면, 자연스럽게 감독 ㅇㅇ이 의도적으로 故 이은주 씨를 죽음으로 내몬 것이 아닌가 하는 물음을 하게 됩니다. ....


'ysl* 사람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26년의 강풀  (0) 2006.10.06
세스 고딘  (0) 2006.10.01
스티브 잡스와 애플 컴퓨터사  (0) 2006.06.23
피아노맨  (1) 2005.10.25
취미가 김세랑  (1) 2005.10.23
너는 내 운명 박진표 감독  (1) 2005.10.22
고 정운영 선생 2005-9.24 타계  (0) 2005.09.29
육영수 여사  (0) 2005.05.08
김광석  (4) 2004.07.15
영화사집 이유진 대표  (0) 2003.11.02
Posted by wizysl
, |
2003.11.02. 21:48

뉴욕서 공부할때 뉴욕 여행 왔다는
당찬 여대생을 만난 적이 있었다.
그 여대생에게 뉴욕 구경 시켜주고
한인타운 식당가서 밥도 먹고
그리니치 빌리지에서 커피도 마시고
그리곤 그 여대생은 한국에 돌아갔는데...

오늘 연예가 중계보다가 깜짝 놀랐다.
영화 "스캔들 - 조선남녀상열지사"를 만든 이유진 프로듀서가 바로 그녀다.



당장 이메일 날렸다.
확실히 그녀가 나보다 더 성공한 거 같으니
이제 이 피디가 한턱 내겠지?


===


2013.1.28.


예전 블로그를 옮기며 다시 이유진 대표를 검색해 보았다.

이제는 다음 영화섹션에서 영화 제작자로 나온다.

내가 재미있게 본 <내 아내의 모든 것>(2012)와 <너는 내 운명>(2005)를 제작했다.


이유진 대표 (1968-)
이화여대 교육공학 전공
졸업 후 해태그룹 계열 광고대행사 코래드에서 7년 간 카피라이터, CD(Creative Director)로 근무
1997년 돌연 사표를 내고 영화계에 뛰어들었다.
외사촌 언니(현 오정완 ‘영화사 봄’ 대표)가 프로듀서를 맡은 <정사> 마케팅으로 영화와 인연







[참고자료]

다음 영화

http://movie.daum.net/movieperson/Summary.do?personId=2240&t__nil_main=tabName


스포츠칸 인터뷰 기사 2012.7.22자

http://sports.khan.co.kr/news/sk_index.html?art_id=201207221823003&sec_id=540401

'ysl* 사람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26년의 강풀  (0) 2006.10.06
세스 고딘  (0) 2006.10.01
스티브 잡스와 애플 컴퓨터사  (0) 2006.06.23
피아노맨  (1) 2005.10.25
취미가 김세랑  (1) 2005.10.23
너는 내 운명 박진표 감독  (1) 2005.10.22
고 정운영 선생 2005-9.24 타계  (0) 2005.09.29
육영수 여사  (0) 2005.05.08
김광석  (4) 2004.07.15
이은주  (0) 2004.05.20
Posted by wizysl
, |

최근에 달린 댓글

최근에 받은 트랙백

글 보관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