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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다시피 '인문학의 위기'는 500년도 더 된 얘기이다. 고·중세에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학문들 사이에 이렇다 할 구분이 없었기 때문에 과학기술의 혁명과 인문학의 등장은 때를 같이 한다. 무협지의 플롯을 빌려 비유하자면, 현대 인문학은 동문수학하던 사형 중 하나인 과학이 어느 날 출중한 실력을 앞세워 기술이라는 추종 세력을 규합하고 종국에는 새로운 문파를 형성하여 독립함에 따라, 어느새 몰락 직전에 처한 문중을 충직하게 지키는 어딘지 우직한 제자와 흡사하다. (인문학의 정의, 역사, 위상 등에 대해서는 한국학술협의회에서 발간한 <지식의 지평> 제2호 특집 "인문정신과 인문학" 참조.) 하지만 이들에게도 희망이 있다. 비록 과학기술이 다방면에서 탁월하지만 모든 면에서 그러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또다시 무협지에 비유하자면, 과학기술은 외공에는 출중한 반면 내공에는 서툴다. 인문학자들이 부단히 인성과 교양, 규범과 실천, 이해와 해석을 전문 분야로 내세우는 데에도 나름 절절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물론 이에 더해 경쟁력이 약한 분야에서의 격차도 줄이려고 애써야 한다. 그래서 나온 것이 인문학의 '과학화' 바람이다. 실증주의의 등장과 인문학의 학문분화도 과학화의 일환이다. 문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문학이 여전히 위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데 있다. 과연 위기 극복이 가능한가? 위기 극복을 위해 해야 할 일은 무엇이고, 하지 말아야 할 일은 무엇인가? 먼저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생각해보자. 그 이유와 경과가 어찌되었든 과학기술은 모든 면에서 지배적이다. 해마다 시집이 베스트셀러 목록에 오르는 몇 안 되는 나라인 우리나라에서도 연구재단 연구비 중 인문학이 차지하는 비율은 10%에 불과하다. 이 같은 격차가 지식의 양과 질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우둔하다. 일종의 '음모설', 즉 위기의 원인을 시장과 자본 탓으로 돌리는 입장도 마찬가지이다. 과학기술과 자본주의는 같은 부모의 자식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과학기술과 인문학을 학문적으로 '대등'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사사한 스승이 같으니 제자들의 실력도 비슷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비록 완전치 않을지는 몰라도 과학이 현재 가용한 지식체계 중 가장 신뢰할만하다는 사실만큼은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인문학이 하지 말아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일도 과학기술을 예사롭게 여기는 것이다. 이미 언급했듯이 아직 특정 분야에서 인문학의 '비교우위'를 주장하는 것은 가능한 일이다. 특히 문학의 경우, 학문의 영역에서 축출되지 않는 한 남다른 경쟁력을 갖고 있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인문학이 특정 분야에 대한 독점적 영유권을 주장하면 곤란하다. 흔히 과학기술을 자연과 짝지우고 가치나 인성을 인문학 고유의 영역인 것처럼 말하지만, 그것은 인문학자들 사이에서나 통하는 그들만의 약속에 불과하다. 이미 '인문'에 관심 있는 과학자들이 인문학자의 '독단과 전횡'에 반기를 들고 '제3의 문화'(The Third Culture) 건립에 나선지 오래다. 이제 '인문학의 성역'조차 안전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아마 이 상황에서 인문학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그들보다 더 잘하는 것뿐일 것이다. 반면 하지 말아야 하는 일은 지금처럼 "사람은 인문학 소관이다"라고 강변하는 일이다. 아무 소용없을 뿐만 아니라, 애처롭고 무기력해보이기 때문이다. ('제3의 문화'를 위해서는 웹 사이트 Edge(http://www.edge.org/) 참조.) 이제 인문학이 해야 하는 일 두 가지를 생각해보자. 합종연횡(合從連衡)이라는 말이 있다. 알다시피, 중국 전국시대에 소진(蘇秦)이 제창한 합종설(合從說)과 장의(張儀)가 제안한 연횡설(連衡說)을 합쳐 대국에 맞서 소국이 취할 수 있는 군사, 외교정책이나 정치적 전략을 통칭할 때 사용한다. 구체적으로 합종은 한위조연초제(韓魏趙燕楚齊)의 여섯 나라가 군사동맹을 맺어서 진(秦)나라에 맞서는 방법을 의미하고, 연횡은 위의 여섯 나라가 진나라와 화해하고 복종하는 정책을 이른다. 비유가 적합할지 모르지만, 인문학이 해야 하는 일 중 하나는 합종하여 과학기술과 '경합'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핵심은 과학기술이 아닌 다른 분야와 힘을 합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연횡'하여 과학기술과 공존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일은 (유사)과학 분야와 연계하는 것이다. (인문학 진흥을 위한 종합적이고 구체적인 대책에 대해서는 김여수 등이 작성한 <경제인문사회연구회> "인문정책연구총서 2005-03" 참조.) 먼저 '합종'하는 방법에 대해 생각해보자. 아직 인문학이 과학기술에 비해 비교우위에 있는 분야가 있다면 아마도 '사랑', '행복', '자유', '정의', '의미' 등과 같은 가치에 대한 논의일 것이다. 그러나 이미 언급했듯이 이 상태로 가다가는 조만간 가치에 대한 논의에서조차 과학기술에 뒤쳐질 것이 뻔하다. 가용한 대항 전략 중 하나는 예술과 체육 등 과학기술이 아닌 분야와 '합종'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인문적 탐구의 결과를 예술로 승화시키거나 신체단련을 통해 인문을 탐구하는 융복합적 접근을 시도하는 것이다. 사실 인문주간 사업을 포함한 상당수의 인문학 진흥정책이 이미 이러한 발상에 착안하여 추진되고 있다. '인문학의 위기'에 대한 근원적인 대책일 수는 없겠지만, 한시적으로나마 유효한 것은 분명하다. 다음은 '연횡'하는 방안이다. 인문학이 과학기술에 비해 학문적 경쟁력이 떨어지는 이유는 누적 발전이 어렵고 과학기술과 상충하는 결과를 배태하는 경우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인문학 분야는 학문적 특성상 누적 발전을 도모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과학기술과의 상충을 피하는 일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 특히 유사과학 분야라고 말할 수 있는 사회과학 분야와 '소통'하는 일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일례로 1920년대 옥스퍼드대학이 창안하여 이제 어엿한 전공교육과정으로 정착한 '철학, 정치, 경제 융합전공'(Philosophy, Politics and Economics Degree; 약칭 'PPE')은 이러한 방안이 지닌 경쟁력을 잘 보여준다. 개중에는 아예 더 나아가 인문학과 자연과학과 융합해서 다루어보려는 시도도 있다. 장한나가 택해서 유명해진 하버드 대학 학부의 부전공 과정인 "마음, 뇌, 행동"(Mind, Brain, Behavior; 약칭 'MBB')이 대표적인 예이다. PPE와 MBB 모두 인문학이 과학 또는 유사과학 분야와 연계함으로써 공영할 수 있도록 한다는 점에서 고무적이나, 길게 보면 자칫 과학기술에 포섭될 수 있다는 점에서 위험한 전략인 것도 사실이다. 과연 인문학의 위기는 극복 가능한가? 알다시피 합종연횡에도 불구하고 진나라는 6국을 멸망시킨 후 중국을 통일했다. 누구도 장담할 수 없겠지만, 종국에는 과학기술이 기반하고 있는 지식체계가 이제까지 인문학이 담당해왔던 영역을 완전히 '잠식'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그러나 개탄하기에 앞서 그로 인해 발생하는 득과 실을 인류 복리의 관점에서 냉철하게 따져보아야 한다. 특히 지금 당장 인문학도에게 유리한 일이 향후 인류에게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두어야 한다. 하지만 다행히도 지금 우리가 인문학도로서 해야 하는 일이 무엇인지 가늠하는 일은 그렇게 복잡하지 않다. 우선 현실을 직시하고 당장에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한편, 그에 더해 과거 과학이 그러했듯이 주류 담론의 맹점과 한계를 노정하고 이를 발판 삼아 '인문학 혁명'을 일으킬 학문적 대안을 암중모색해야 한다. 인문학이 상아탑에 안주하거나 알량한 텃밭 고수의 덫에 빠지면 안 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더 이상 아무도 인정하지 않는 종가에 남아 전통제례를 고집하는 일은 무의미하다. 도리어 이제까지는 상대하지 않았던 사람에게 다가가서 그들과 연대할 방법을 모색하고 때로는 과감하게 자신을 버려야만 새것을 창출할 수 있다. 그래서 체험이든, 실천이든, 연합이든 시비하기보다는 무엇이라도 함께하는 것이 중요하다. 인문주간을 맞아 전국 인문학도들의 거침없는 행보가 난장처럼 펼쳐지길 기대해본다.

[참고자료]
한국연구재단 e-알리미
http://webzine.nrf.re.kr/epage_1109_2/html/epage1.html
Posted by wizys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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