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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장집칼럼]‘노동 없는 민주주의’의 감춰진 상처
최장집 | 고려대 명예교수

평소 나는 ‘노동 없는 민주주의’를 민주화 이후 한국 정치의 중요 특징으로 생각했다. 민주주의는 정치참여와 결사의 자유에 힘입어 사회 여러 세력과 집단들이 정당의 형태로 조직되고, 이들이 제도화된 정치과정 내에서 갈등을 해결하려 경쟁적으로 노력하는 것을 중심 내용으로 한다. 그래야 사회경제적으로 약한 사회집단으로서 노동자들과 소외세력들이 그들 스스로의 요구와 이익을 정치과정에 투입하고 이를 통해 취약한 삶의 조건을 개선하는 효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노동을 대표하는 정당이 존재한다면 그것이 비록 작은 정당이라 해도 전체 정당체제에 미치는 영향은 실로 큰 것이 될 수 있다.

반대로 노동이 민주주의의 정치과정으로 들어와 집단적 주체로서 역할을 못한다면, 정치 전반에 걸쳐 심대하게 부정적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민주화에도 불구하고 한국 정치가 권위주의 시대와 다를 바 없는 구태를 탈각하지 못하고 시민들로부터 냉소와 불만의 대상이 되고 있는 가장 큰 원인은 바로 여기서 찾을 수 있다. 며칠 전 신문에서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의 통합이 좌절되고 노회찬, 심상정씨 등이 탈당한 것을 보면서 노동의 정치세력화를 위해 분투노력했던 한국 민주주의의 한 중요한 실험이 사실상 종결된 것은 아닌가 생각했다. 무엇이 잘못되었나? 진보는 무엇이고, 그들은 왜 실패했나?

며칠 전 나는 일용직 건설 노동자들의 인력시장이 열리는 성남시 수진리 고개 일원과 그 인근을 찾아갔다. 세계화가 노동시장의 양극화를 가져온 사실에 대해서는 누구나 알고 있지만, 비정규직 노동자 가운데서도 가장 열악한 한계 계층의 하나로 자리 잡게 된 이들의 문제에는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새벽 4시, 가을 공기가 차가운 그곳 인력 시장은 전국적으로 약 57만 명에 이르는 이들의 삶의 조건과 생활 현실뿐 아니라 한국 민주주의의 감춰진 뒷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일용직 건설노동은 야외 공사가 갖는 여러 가지 어려움은 제쳐두고라도, 잦은 산재와 인명 사고에서 보듯 노동 강도와 위험이 가장 높은 직종의 하나이다. 거기에 날마다 일자리를 구해야 한다는 불안정성의 문제도 덧붙여야겠다. 전국 안 가는 곳이 없는 현장에 도달하는 데 서너 시간도 보통인 먼 이동거리로 인해 그들의 가정생활에서 여가를 갖는 것도 사실상 불가능해 보였다.

그들 대부분은 성남시나 서울 인근의 작은 공동주택이나 지하단칸방에 사는 사람들이다. 일일 노임이 보통 14만원인 형편에도 자식들은 모두 대학에 보냈다는데, 그들의 수입으로는 서울의 유수 대학에 보낼 만큼의 과외와 학원비를 감당할 수 없었고, 그래서 주로 수도권의 지방대학에 다녔다고 한다. 이날 새벽 내가 만났던 사람들 가운데는 길게는 13년이나 중동의 “모래 바람 속에서 모래 섞인 밥 먹으며” 일했고 그 후 일본의 건설 현장에서 일한 경험을 가진 사람이 여럿이었다. 이들이 외국과 국내에서 생존을 위해 사투해온 지난 20여 년 동안, 한국경제는 눈부시게 발전하여 세계의 주요 경제 강국으로 부상했다.

그러나 눈부신 경제성장에 기여한 대표적인 생산자집단이자 30대에서 60대에 이르기까지 넓은 연령층을 가진 일용직 건설노동자들의 생활조건과 삶의 질은 답보상태였거나 더 나빠졌다. 고용기회는 줄었고, 노임은 적어졌고, 주거조건은 나빠졌고, 자식세대의 사회적 상향이동도 열어줄 수 없는 막힌 현실을 대면하게 된 것이다. 지금 그들에게 가장 큰 관심사는, 중국동포들이 중심인 외국인 노동자들의 대거 유입으로 일자리가 줄어드는 문제였다. 자국민의 노동 조건에 대한 고려 없는 정부의 외국인노동자 정책에 대한 그들의 비판은 날카로웠다. 몇 사람은 건설노조가 주관하는 외국인노동자고용정책 반대집회 때문에 수원으로 간다며 먼저 자리를 떴다. 남은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옛날보다 더 살기 어려워졌다고 말한다. 대화 도중 한 사람이 “할 수만 있으면 이민가고 싶어요. 이 나라에서 살기 싫어요”라고 말했을 때, 희망의 상실과 감춰진 분노를 느낄 수 있었다.

이들에게서 민주주의는 무엇이었나? 나는 새벽의 인력시장에서 정치와 정당 일반의 부재는 물론이고, 노동자들을 대표하는 진보정당의 부재 역시 실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치권과 시민사회 그리고 여러 운동 단체에서 내세웠던 화려하고 추상적인 진보적 구호들과 담론들이 이 현장에서는 아무 흔적도 갖지 못했다. 이들 노동자들의 존재를 의식한 산업-고용정책, 외국인 노동자정책, 주택정책, 교육정책은 없었다. 지난 20년간 무서운 기세로 밀어닥친 세계화의 물결이 아무런 여과 없이 이들의 삶에 커다란 충격을 가하는 동안, 한국 민주주의는 무엇을 했던 것일까?

최근 안철수, 박원순 현상은 정치권에 몰아닥친 가장 극적인 사건이다. 여러 요인이 다 중요하겠지만, 근본적으로는 노동 없는 민주주의 혹은 실재하는 사회경제적 문제들을 다루지 못했던 한국 정당체제의 무기력함이 가져온 결과가 아닐 수 없다. 그리고 그것의 다른 모습은 바로 여론조사가 지배하는 정치다. 이미 시민, 시민사회라는 포괄적인 말이 정치를 지배하면서 예견된 현상이라고도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 말은 정당정치가 사회적 기초를 갖기 위해 필요한 것, 즉 사회경제적 이해관계를 달리하는 사회집단의 존재와 그들 간의 갈등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부정하는 추상화된 개념으로 위력을 발휘했기 때문이다. 여론조사 결과가 공직 후보 선출을 지배한다면, 정당이란 여론조사 기관 이상 다른 역할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선거관리위원회가 공인된 여론조사 기관을 통해 대표를 선출하고 정부를 구성하면 될 것이다.

나는 한국 민주주의가 이렇게까지 나빠진 중요한 원인의 하나는, 민주화이후 한국 정치와 사회운동이 학생 운동 출신 엘리트들에 의해 지배된 것에 있다고 생각한다. 이 말은 한국 민주화에서 학생운동의 중심적 역할을 부정하려는 데 있지 않다. 그러나 이들이 그 뒤 정치인이 되고 진보 정당을 하고 사회 운동을 주도한 것이 소외된 사회적 약자들에게 어떠한 실체적 혜택을 주었고, 이들을 위한 정치의 세계를 확장하는 데 무엇을 기여했는가 묻지 않을 수 없다.

그에 관한 한 내 대답은 부정적이다. 나는 학생운동의 역사적 역할은 이미 오래전에 끝났어야 했다고 생각한다. 실제의 현실 삶과 유리된 조건에서 의식화되면서 갖게 된 과잉 이념화된 사고방식과 도덕적 우월의식은 그것이 지속되는 시간에 비례해 부정적 효과를 더 크게 가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곳 일용직 인력시장에서 만난 대부분의 노동자들은 대졸자가 아니다. 더욱이 서울의 좋은 대학 출신, 즉 엘리트집단이 아니다. 이 두 집단을 연결하는 접점은 어느 곳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일찍이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동정심을 감정이입(empathy)과 공감(sympathy)의 두 종류로 나누었다. 앞의 것은 스스로 경험하지 않았지만 가치와 이념의 도움으로 다른 사람의 사정에 공감을 갖는 것이고, 뒤의 것은 사실의 구체적인 접촉을 통해 다른 사람의 사정에 동정을 느끼는 것을 지칭한다. 여기에서 인간 행위의 급진성을 불러오는 감정 형태는 앞의 것, 즉 감정이입이다. 현실의 삶에 기초하지 않은 학생운동의 전통이 정치행위나 사회운동을 추동하는 힘으로 과도하게 크게 작용할 때, 진보의 행동정향 역시 그런 형태를 띠게 된다.

그러한 정조와 감정은, 베버의 개념을 빌려 말하면, 강한 신념윤리를 격발하고 추동하는 반면 그것이 가져올 결과에 대한 책임윤리의 부재 내지는 약화를 가져온다. 사실 일용직 건설노동자들이 어떠한 정책을 필요로 하는가 하는 문제는 그들이 처한 조건을 직접 대면할 때 상당 정도는 저절로 드러난다. 그렇지 못했다는 것, 그것 말고 한국 진보정당의 몰락 내지 주변화의 원인을 어디서 찾을 수 있겠는가. 공허한 담론과 추상적 이념의 언어가 지배하는 곳에서 민주주의의 실체적 성과는 만들어질 수 없다. 새벽의 인력시장은 그 어떤 거창한 것이 아닌 이 지극히 단순하고 명백한 진실을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다.

[참고자료]
경향신문 2011.9.26 오피니언 칼럼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109262112215&code=990000
Posted by wizys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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