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라오셔야 할 것 같습니다. 시간이 많이 남지 않은 것 같습니다."
민영이의 메시지에 정신이 멍멍해지고 감당할 수 없는 순간이 되어버렸습니다. TV 토론 중 무슨 말을 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주체할 수 없는, 걷잡을 수 없는 심정이 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참아야 한다, 의연하고자 했지만 마음이 먼저 울기
시작했습니다. 오직 서울로 가야 한다는 생각밖에는 들지 않았습니다.
창하가 울먹이며 "형, 이상해. 의사들이 가족들을 대기하래. 어제밤 사이에 갑자기 안 좋아 지셨어" 하고 전화했을 때만
해도, 할 수 있는 것을 다 하라고 대답할 뿐 이리도 빠르게 현실이 될 것이라 믿지 않았던 일이었습니다. 혹시나 모를까봐 켜놓았던
스마트폰이 원망스러웠습니다.
1988년 저는 감옥에 있는 동안 아버지를 잃었습니다. 임종을 함께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은 저에게서 오랫동안 떠나질
않았습니다. 그해 가을 감옥에서 나와 좌표를 잃고 방황하던 저를 김성환(현 서울 노원구청장) 형이 재근 형수를 통해 근래 출소한
'근태 형'에게로 소개했습니다.
굳이 혼자 가라 해서 서울 수유리 어디 광산슈퍼를 돌아 찾아간 집이었습니다. 제 얘기를 들은 후 첫 마디를 잊을 수 없습니다.
"선배들이 잘못해서 후배들을 고생시켜 미안하다."
나이 차도 제법 나는데 왜 당신이 형인지 알게 되는 순간이었습니다. 당신의 위로를 잊을 수 없습니다. 1987년을 온전히
감옥에서 보냈던 당신은 차분하게 1987년 대선 패배의 책임을 지고 가고 있었으며 누구를 원망하거나 미워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묵묵히 자신의 삶으로 역사를 다시 감당해나가고 계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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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8년 6월 30일 김천교도소 앞에서 석방의 기쁨에 만세를 외치는 김근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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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사료관 |
김근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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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래져가는 그의 마지막 얼굴... 나는 절망했다
조금은 더 버티실 것 같다고 해 많은 사람들을 돌려보내드린 뒤였습니다. 새벽 어스름에 중환자실 모퉁이 의자에서 뒤숭숭한 마음을 붙잡고 있는데, 기다리지 않은 소식이 왔습니다. 우리가 기다린 기적은 아니었습니다.
두 배 세 배 지금보다 깊은 암흑의 시대를 강철 같은 웃음으로 날려버렸던 재근 형수는 몸을 가누지 못하고 깊이
울었고, 그리고 고문을 폭로하고, 수사관의 정강이를 차고, 민가협을 만드느라 밖을 돌았던 엄마를 챙기던 병준이, 병민이가 그 순한
울음을 토해냈습니다.
혈색이 사라지며 파래져가는 얼굴에 저는 절망했습니다. 우리들 '근태 형'의 맑은 웃음을 이제 더는 못 보는 것일까요? 생떼 같은 저 아이들을 두고 선배님, 어디로 그리 바삐 가십니까?
정신을 차려야 했습니다. 당신을 잘 보내드리는 일도 저희들이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동민이게도 인사드리라 했고 상명이도, 효경 선배도, 기헌이도, 은영이도, 종걸이 형도 당신을 배웅하기 시작했습니다.
형수님께, 병준이와 병민이에게 이제 그만 보내드리자고, 잘 보내드리자고 했습니다. 누님께서는 우리 좋은 얘기만 하자며 고통
없는 세상에서 편안하라고 고별하셨습니다. 그러나 형수님의 말씀처럼 우리 모두는 아직 당신을 보낼 준비가 되지 않았습니다. 잘
가시라, 우리가 잘 하겠다 했지만 당신을 지켜주지 못해 죄송했기 때문입니다.
그 발표는 정말 하기가 어려웠고 하기도 싫었습니다. 고문 없는 세상에서 편히 쉬시라 했지만 원망이 솟구쳤습니다. 병의 진전을
알렸을 때 선숙 누나는 그렇게 서럽게 울 수가 없었답니다. 회한 같은 것이었을 겁니다. 여느 드라마와 비교할 수 없는 참혹한
오버랩이 스쳐갔을 겁니다.
누군가 입을 열고 손가락을 들어 김근태를 비틀었을 때 저는 고통스러웠습니다. 피눈물을 삼켰을 당신은 참 무던히도 참았습니다.
잔인한 시선과 비겁한 칼날이 당신의 마음을 갉아먹고 정신을 파괴하고 있을 때 저는 우리는 당신을 지켜내지 못했습니다.
얼마나 외로웠을까? 오직 마지막까지도 당신을 지켜낸 것은 당신의 영혼과 정신이었습니다. 재근 형수님 이었습니다. 마지막 투병기간 동안 굳어가는 정신과 딱딱해지는 몸을 두고도 재근 형수는 절대로 낙망하지 않았습니다.
예비경선을 하던 날, 재근 형수는 선배님의 손을 부여잡고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하며 앞 소절을 부르면 근태 형이
"으으으, 으으으"로 뒷 소절을 불렀다며 또 일주일 전의 희망을 얘기했습니다. "일어나실 거야. 형수 걱정하지 마" 하고 그저
큰소리 한 번 치고는 서둘러 병원을 나왔습니다.
중환자실에서, 당신의 그 모습을 거기서 보며 차마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왜 당신이 그토록 지독한 싸움을 해야 하는지,
불쌍해서 미칠 것 같았습니다. 당신과 형수가 그렇게 싸우고 있는데 같이 울고 있을 수도 없었습니다. 마음 속에 무상함이 밀려들어
한동안 가라앉아 있었습니다.
'민주주의자 김근태'... 어떤 수식도 필요없는 까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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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 김근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이 64세로 별세한 가운데, 30일 오후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서
신영복 성공회대 석좌교수가 '민주주의자 김근태의 구'라고 직접 쓴 명정을 취재기자들에게 공개하고 있다. 명정은 장사 지낼 때
고인의 관직과 이름 등을 기재하고 관 위에 씌워서 묻는 붉은 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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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성호 |
김근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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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보다 인간의 존엄을 위해 싸웠고, 인간에 대한 깊은 예의를 지켰던 한 사람이 가고 있습니다. 평화로운 사람, 정의로운 사람, 지혜로운 사람이고자 했던 그가 이제 우리 곁을 떠나려고 합니다.
우리 모두가 제 안의 것을 과장하고 포장하려고 할 때 그는 놀라운 성찰과 절제로 자신을 지켜냈습니다. 스스로를 먼저 부족했다고 했고 상처보다 충분한 보상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그는 무엇보다 순정의 사람이었습니다. 속절없이 정직과 진실의 세계를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아내에게도 딸에게도 아들에게도 끔찍한 사랑이 많은 좋은 남편 좋은 아빠 였습니다.
우리가 그에게 마음으로부터 빚지고 있는 것은 어쩌면 더 근원적인 것인지도 모릅니다. 이제 생각해 보면 '누가 김근태에게 돌을
던질 수 있단 말입니까'는 단순하게 그가 치열하게 한 시대를 살았고, 민주화운동을 했고 고문을 당했고 감옥에 갔다는 것에 있지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가 현실의 세계에서 이상과 희망을 부정할 때마다 그는 항상 민주주의로 구성된 새로운 세계를 꿈꾸었습니다. 정직, 진실,
희망의 가치는 그 안에서 항상 인간의 철학으로 거듭나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자꾸 포기하면서 살았고 그는 더욱 더 깊은
해답을 찾기 위해 살았던 것이 아닐까요?
'만약 우리에게 김근태가 없었다면' 하는 가정을 해 봅니다. 우리는 그로 인해 가장 치열하면서도 가장 인간적이었던 한 시대와
세계를 만날 수 있었던 것 아닐까요? 그것이 한 사람 안에서 공존할 수 있었다는 것은 저는 기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지옥 같은
압박을 견뎌내는 인간의 존엄와 정의, 인간 본성의 파괴를 딛고 맞서 나오는 선량한 웃음.
우리는 더 이상 누구에게도 이 이름을 붙이지 못할 것입니다. 영구결번 같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민주주의자 김근태'! 우리가 더 어떤 수식어도 어떤 수사도 붙이지 않은 이유입니다.
유언을 하지 못한 그가 우리에게 남긴 것들
그는 유언을 남기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우리에게 선각자로서 실천가로서 많은 것을 남겼습니다.그는 수십 번을 잡혀갔지만
철권통치시대에도 사무실을 구해 간판을 내걸고 대중운동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실천해낸 사람입니다. 역사는 민청련을 그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는 실형을 받았지만 고문을 받고도 철인 같은 기억력을 갖고 증거를 지켜 재판의 결과를 뒤집을 수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
준 사람입니다. 세계의 양심세력이 그것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는 누구도 사용할 것으로 판단하지 못하던 '모두진술'을 처음으로 수인의 권리로 요구해 법정에서 처음 사용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모두진술을 한 권리를 갖고 있습니다.그는 모두가 조직동원, 금권정치에 갇혀 있을 때 국민경선제를 주장해 관철시켜
정당정치의 새로운 이정표를 세웠습니다. 우리는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헌법 조항을 조금 더 정확하게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그는 한 걸음 앞서 시대를 통찰하고 대안을 제시했습니다. 분양가 원가 공개, 국민연금 투자 등에서 그의 원칙은
현실에서 증명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양극화와 신자유주의 시대에 맞서는 김근태의 깃발은 많은 것을 웅변하고 있습니다. 'FTA를
하려거든 나를 밟고 가라'는 그의 절박했던 외침을 꼭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가 2012년을 앞두고 하고 싶었던 마지막 말은 '분노하라, 투표하라'였습니다.
"2012년에 두 번의 기회가 있다. 참여하자. 참여하는 사람들이 권력을 만들고 세상의 방향을 정할 것이다."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는 멋진 지도자를 꿈꾸지 않았습니다. 그는 영혼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진실의 눈으로 세계를
정확히 바라보고 정확한 해답을 찾고자 했습니다. 투사가 되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정치가가 되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그것이 필요한
것이었기 때문에 한 사람입니다.
자신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생명과 걸고 싸워야 했으며 타인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생명을 걸고 싸웠습니다. 그것이 다르지
않았습니다. 스스로에게 무한히 정직했던 한 인간, 김근태 진실과 정의가 비로소 그 안에서 하나의 몸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당신을 가슴에 담습니다... '혁명가 김근태'
그는 언제나 시대가 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이상과 일생을 그 안에 두었습니다. 정의롭지 않은 세상과 타협하지 않았고, 정직하지 않은 세상과 타협하지 못했습니다.
그를 만나본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기억할 것입니다. 자신이 먼저 말하기보다 누가 되었든 먼저 말을 듣고 의견을 구했던 사람입니다. 개인보다는 조직을, 부분보다는 전체를, 명망보다는 신의를, 민주주의자 김근태가 앞세운 정치였습니다.
빠르기보다 바르기를 추구했던 생각의 사람 김근태를 보냅니다. 고맙습니다, 형! 선배들의 고백도 이어집니다. 민주와 진보의 길에서 만인의 선배였던 만인의 형이었던 근태 형, 잘 가세요.
그래도 이 말은 꼭 하고 싶었습니다. 사랑했다고 존경했다고 감사했다고 잊지 않겠다고 당신을 가슴에 담는다고 역사의 심장에 묻는다고 그 끝에 당신은 혁명가였다고.
김근태와 함께 동시대를 살았던 모든 분들께 한 말씀만 더 드립니다. 김근태와 함께 고스란히 고난의 한 시대를 살았던 인재근, 김병준, 김병민을 꼭 기억해 주십시오. 그들은 우리의 가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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