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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요평론가 이백천(한국포크싱어연합회 고문)
1933년 3월 13일 황해도 출생.
1964-70년 TBC TV(동양방송)에서 PD겸 MC로 재직.
1970년 이후 88올림픽 및 대전엑스포 문화축전 전문위원, KBS 시청자위원
2005년 명지대학교 사회교육원 노래지도학과 강의
한국포크싱어연합회 상임 고문
서울대, 미8군, 색소폰과 차차차

대 중음악평론가 이백천의 회고록을 3회에 걸쳐 싣는다. 그는 1950년대 말부터 현재까지 한국 가요 역사의 산증인이자, 일세를 풍미한 포크음악의 이론적 스승이었다. 가수 조영남은 그에게 “통기타 군단의 담임선생님” 이라는 닉네임을 붙여줬다.<

내 가 태어난 곳은 황해도 배천. 강화만으로 흘러드는 예성강 하구에서 약간 북쪽에 있는 소읍이다. 개성에서 서쪽 해주로 가자면 약 30km쯤 되는 지점인데, 지도에서 보면 바로 38도선 아래에 있으며 배천온천으로 알려진 곳이다. 이곳에서 태어났다 해서 내 이름은 백천이 됐다. 한자로 ‘白川’이지만 지명으로 부를 때는 ‘배천’이 된다. 1933년 3월13일 새벽. 의사 이종완과 부인 이완배의 차남이었다.
누 군가 내 사주를 보고 예(藝)와 문(文), 역마(驛馬)와 도규(刀圭)가 있다고 했다. 예는 음악, 문은 글, 역마는 매스컴, 도규는 의사가 되어 칼로 환자를 수술할 팔자라는 뜻이다. 따지고 보면 음악평론도 음악에 칼을 대는 것이니 사주가 아주 빗나가지는 않은 셈이다.
세 살 때 집안은 조금 더 북쪽, 황해도 신계(新溪)로 이사를 했다. 집 앞쪽은 잡화상점, 뒤쪽은 병원이었다. 어머니의 바로 아랫동생인 영배 삼촌이 그때 결혼을 하고 잡화점을 했다. 삼촌의 방에 몰래 들어가 외숙모의 경대 위에 있는 분갑을 열어 냄새를 맡곤 했는데, 숨막힐 듯하면서도 환각적인 그 냄새가 나의 첫 후각적 성체험이 되었다. 그곳에서 처음 쌍날개 비행기를 보고 다가왔다가 멀어지는 소리도 들었다. 처음으로 소리에 집중한 순간이었다. 그때 내 별명이 ‘군수영감’. 뒷짐을 지고 느슨느슨 걷는 폼이 그랬던 모양이다.
만 여섯 살에 소학교에 입학했고, 그해 3학기(당시는 3학기제)에 우리집은 다시 전라도 이리(지금의 익산)로 이사를 했다. 물자가 귀해지기 시작한 시기(1940년)라 내가 신을 것이 여자 운동화밖에 없었지만 그것이 싫어 그냥 맨발로 학교에 갔던 기억도 있다. 일요일이면 목상리에서 큰 규모로 농사를 짓는 큰집에 가 사촌들과 어울려 논에서 우렁도 캐고 개울에서 미역도 감았다. 그때쯤 아버지가 라디오를 가져오셨다. 처음으로 음악을 들었다. 다이얼을 돌려 채널을 찾는 일이 신기했다. 음악소리가 너무도 깨끗하고 곱게 들렸다.
3 학년 때에는 다시 서울 노량진 본동으로 이사했다. 한강교의 아치가 너무 웅장해 산처럼 높게 느꼈다. 한강교 남단 바로 옆에 제법 큰 요정이 있었는데 이름은 용봉정(龍鳳亭), 그 뒤 계곡에 우리가 살 집이 있었다. 학교는 흑석동의 은로국민학교였다.
전 학하고 얼마 후부터 조회 내용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길어진 교장의 훈시, 동경을 향한 궁성요배(宮城遙拜), 교육칙어(敎育勅語) 낭독, 대열행진연습, 사열. 여기저기 나붙은 문자도 어수선했다. 국어상용(일본어상용)에 성씨개명, 공출, 징용, 징병, 귀축미영(鬼畜美英), 결사대, 가미카제 특공대(神風特攻隊) 등이었다.
아 버지는 李자를 둘로 나눠 목자(木子)라는 성을 만드셨다. ‘기노코’가 창씨개명한 새 성이었다 ‘카미카제’ ‘옥쇄(玉碎)’라는 단어가 자주 들려올 즈음 미군 비행기 B29가 한강교 위를 천천히 지나가기 시작했다. 그러할 무렵 졸업기가 되었고 중학교 입학시험을 치렀다. 일차 경복중학 낙방, 이차 중앙중학 합격. 이때가 1945년 4월이었다. 그리고 종전과 해방. 한동안 전차가 다니더니 전력사정으로 운행중단이 되고 역마차가 교통수단이 되었다. 지나가는 트럭이 속도를 늦추면 가방 먼저 던져넣고 올라타던 시절이었다.
전 쟁이 끝나자 상도동으로 다시 이사를 했다. 전철을 타려면 노량진까지 고개를 넘어 다녀야 했다. 때로는 전기사정으로 전차가 오지 않아 종로 계동 중앙중학교까지 걸어다닌 적도 있었다. 한강다리 건너 용산, 삼각지, 남영동, 서울역, 남대문을 돌아, 을지로, 종로2가 교동국민학교앞 지나, 계동 휘문중학 지나고 대동중학, 그리고 맨 끝 언덕 위의 학교. “흘러흘러 흘러서 쉬임이 없는…” 이렇게 시작하는 교가의 중앙중학교까지 걸어서 두 시간 거리였다.
1 학년, 넉 달 반 동안은 아직 일제치하였다. 어느 날 맨발로 조회 앞줄에 섰는데 선생이 다가와 학교에 올 때는 신발을 신고 와야 한다고 했다. 신발은 있었다. 발바닥 모양의 나무쪽 위에 고무로 띠를 두른 슬리퍼 같은 나무신발. 그것을 학교에 신고 갈 수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한강을 건널 때 강물에 던져버렸다.
“너 무서운 아이구나!”
소 문난 호랑이 유경상 선생의 영어시간이었다. 흑판에 필기체의 대문자 ‘I’를 써놓고 읽으라고 했다. 처음에는 ‘J’ 같아서 “제이”라고 했다. “나니?(무엇이라고?)” 무섭게 질책이 날아왔다. “아이데스!(‘아이’ 입니다!)”라고 수정했다. “나와!”라는 호통에 앞으로 나간 나는 종아리를 내밀어야 했다. 회초리로 힘껏 종아리를 치며 “아이까? 제이까?(아이냐? 제이냐?) 아이까? 제이까?”를 반복했다. 종아리에는 뻘건 줄이 죽죽 생기고, 그 날 이후 나의 별명은 ‘제이상’이 되고 말았다.
난 고(南鄕) 선생의 국어(일본어) 시간이었다. 키가 작아서 맨 앞줄 책상에 앉은 나는 교과서 밑에 소설책을 깔고 몰래 읽고 있었다. 그것을 본 선생이 지금 무엇을 읽고 있느냐고 호통을 쳤다. “소설입니다”라고 똑바로 얼굴을 들고 대답을 하니 잠시 후 하시는 말씀이 이랬다. “기미와 오소로시이 다마고다!(너는 무서운 아이구나!)”
맨발 등교, 제이상, 오소로시이 다마고…. 사춘기의 꿈이라던가 설레임은 전혀 없던 시절이었지만 그렇다고 꼭 암울하다거나 불행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해 방 되던 해 가을, 아버지는 생명보험사의 의사직을 접고 서울대 의대 생리학 교실의 무급조교가 되셨다. 그때 아버지는 40세. 가족은 어머니와 3남4녀. 막내동생은 두 살이었다. 상도동 숭실대 정문 맞은편에 아버지가 사두었던 야산 4000평이 있었다. 어머니가 농부로 나섰고 주말이면 아버지, 형 그리고 내가 도왔다. 콩, 마늘, 옥수수, 감자, 고구마, 참외, 수박, 토마토에 벼농사까지 조금 지었다.
집 에서 밭까지는 약 2km. 나의 담당은 주로 운송이었다. 재와 인분을 버무린 비료를 리어카로 운반하는 일, 하교후 수확물을 거둬 어머니와 같이 돌아오는 것도 내 일이었다. 쌀, 보리를 제외한 모든 부식을 자급자족했다. 물주고 거름주기, 봄에는 고랑 파고 씨뿌리고 여름에는 잡초 뽑고 가을에는 새를 쫓았다.
형 은 의대를 다니고 있어서 환자 볼 손이 거칠어진다고 일을 피하는 편이었고 누이는 하루 종일 밭에서 사시는 어머니 대신 가사를 맡았고, 두 살 밑의 여동생은 누이의 보조, 네 살 아래 남동생은 아직 국민학교 학생이라 노동력이 되지 않았다. 그런 어느 날 밭에서 아버지가 나에게 물으셨다. 옷도 주고 책도 주고, 먹여주고 재워도 주는 관립철도학교에 가는 것이 어떠냐는, 다시 말해 기관사가 될 생각이 없느냐는 것이었다. 장남은 의사, 차남은 기관사…. 나는 고개를 저었다.
이 때(1946년)쯤 학교공부와 밭일 외에 새 일과가 생겼다. 친구 김영대의 권유로 학교 밴드부원이 된 것이다. 연습실은 본관 4층에 있었고 수업이 끝난 후에 모여 연습을 했다. 나의 악기는 가장 사람의 소리와 가깝다는 알토 색소폰이었다. 밤에 집에서 명곡집을 펴놓고 악기를 연주하면 동네 개들이 따라 짖었다. 아주 좋은 연주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해군군악학교 시절
우 리 악대는 시가행진에도 참여하고 경연대회에도 나가고 정동라디오 방송에 출연도 했다. 동네 여학생 중 누구의 얼굴이 곱고 누구의 다리와 걸음걸이가 반듯한지 관심을 갖기 시작한 무렵이었다. 여기에 또 한 가지 일과가 더해졌다. 아버지가 내게 영어를 가르치기 시작한 것이다. 3년 동안 매일 밤 7남매 중 나에게만 한 시간씩 영어를 지도하셨다. 진도는 하루에 교과서 두 페이지씩이었다. 2학년 때에 3학년 과정을 끝냈고 3학년 때에는 4, 5학년용 교과서를 끝냈다. ‘영어3위일체’라는 책의 해석, 문법, 작문까지도 끝낼 수 있었다.
아 버지는 무급조교 기간이 끝나고 강사, 조교수로 올라선 다음에도 7남매의 학비를 대는 것이 힘에 부치셨는지 집에서 밤에만 여는 의원을 운영했다. 밤에 환자도 받고 왕진도 다니셨다. 살림은 조금 나아졌지만 어머니는 계속 밭일을 하셨고 나도 변함없이 운송담당이었다.
그 러던 어느날 6·25 사변이 일어났다. 6월28일 새벽 엄청난 굉음과 함께 한강교 여섯 개의 아치 중 세 개가 폭파로 강물에 박혔다. 우리집은 강의 남쪽이라 피란에 여유가 있을 줄 알았는데 하룻밤 밭에서 밤을 새고 아침이 되니 어느새 상도동에도 인민군이 들어와 있었다. 병원에 출근하던 형과 간호원이던 누이는 직장과 함께 피란을 했지만 집에 있던 부모님과 동생 넷, 그리고 나는 고구마 감자로 연명하며 9월28일 수복 때까지 버텼다. 그리고 그해 12월5일 해군군악학교 3기생 모병시험에 합격했다. 53명의 동기생과 함께 이틀간 기차를 타고 진해 해군신병훈련소에 도착해 해군 신병 19기가 되었다. 그때 내 나이 만 17년 9개월이었다.
신 병훈련소에 들어가서 처음 들은 소리는 “서울 깍쟁이들 왔나, 잘 왔다”였다. 해군은 군기가 셌다. 특히 군악병에 대해서는 훈련조교들이 “이놈들 잘 걸렸다”는 듯이 마구 휘둘렀다. 어느날 훈련소의 대형 목욕탕에서 우리들은 서로의 엉덩이를 보고 놀랐다. 모두가 푸른색이었던 것이다.
신 병훈련소를 거쳐 군악학교에 가니 1기 선배들이 우리들을 눈 빠지게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매일 군기를 잡았다. 구보, 원산폭격, 몽둥이 찜질, 토끼뜀 등 모든 방법을 사용했다. 우리들 3기생은 2기생보다 학력이 높은 편이어서 질투 섞인 기합도 많았다. 청소, 악기 손질, 복장검사, 집합 속도 등 잡힐 꼬투리는 항상 널려 있었다.
5분만에 끝난 아버지의 면회
1·4 후퇴 때 식구들은 이리로 피란을 했다 그 와중에 아버지가 진해 신병훈련소로 불쑥 면회를 오셨다. 훈련중 잠시 시간을 얻어 연병장 풀밭에서 면회를 했다. 아버지는 앉으시자마자 “요새 책 보냐”고 하셨다. 입대할 때 딱 두 권 지참한 책이 있었다. 일본 안파(岩波)문고 출판의 서양철학사 상하권. 마침 한 권이 훈련복 뒷주머니에 들어 있었다. 그것을 꺼냈더니 웃으셨다. 부자간에 별로 더 나눌 얘기가 없었다. 형은 6사단의 군의관으로 강원도에 있었고 가족은 이리에 있으며 그곳에서 조그마한 의원을 차렸다는 말씀이셨다. 면회는 5분도 걸리지 않았다. 가시면서 또 한마디 하셨다. “공부해라.”
신 병훈련 2개월, 군악학교 교육기간 1년6개월에 해군 일등수병이 되었고 바로 부산 본부군악대에 배속됐다. 그때는 가족도 부산에 와 있어 형만 빼고는 주말에 모두 만날 수가 있었다. 입대하고 2년이 지났을 무렵 옛친구들을 만났다. 모두 대학생이었다. 등록이 어떻고 수강신청이 어떻고 학점이 어쨌다는 얘기들을 하고 있었다.
어 느 날 나는 아버지께 꼭 대학에 가야 하느냐고 물었다. 안 가는 것보다는 가는 게 좋지 않겠느냐고 하셨다. 부산에 전시연합대학(서울대학)이 있었고 아버지가 그곳에 재직하고 계셨다. 대학입시를 준비했다. 아직 제대는 멀었지만 시험은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원서를 내기 전에 한 번 더 아버지와 상의를 했다. “의대에 넣을까요” 했더니 “의사가 뭐 좋으냐”고 하시며 “네가 좋아하는 걸 해라. 음악 좋아하니 음대를 가라”는 말씀을 하셨다.
교 수 자제에게는 재직학과에 한해서 배려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나는 문리대 영문과에 응시해서 합격했다. 3년8개월의 복무기간 동안 짧은 휴가를 받아서 시험을 치르는 등 어렵게 학점을 따고 있었다. 1954년 8월 만기제대했을 때의 나이는 스물 하나, 학교는 2학년 2학기를 맞고 있었다.
제 대 후 ‘이제는 편히 대학에 다닐 수 있겠구나’ 생각하고 있는데 아버지가 갑자기 연구교환교수로 독일에 가시게 되었다. 대학에서 월급이 나왔지만 의원 수입이 없어진 만큼 생활은 더 어려워졌다. 나는 돈을 벌어야 했다. 군악대 동기들과 악단을 결성하기로 했다. ‘에이톤(A. Tone)’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바로 미8군 클럽에서 연주를 시작했다.
우 리 악단에는 외부에서 붙인 별명이 있었다. ‘오단장, 십감독’. 동기생들이니 모두 동격이었고 누가 더 잘나고 못날 수가 없었다. 악단장은 순번제였으며 전부 두 가지 이상의 악기를 다뤘다. 나중에 이화여고 교사를 지내고 서울대 작곡과 교수가 된 김정길말고도 편곡하는 친구가 여럿이었다. 김정태, 김형찬, 김영대, 김성진, 이문용 외에 나중에 입단한 육군군악대 출신의 허린승(외대 러시아어과), 맹원식(전 워커힐악단장), 안건마(테너색소폰, 재미 목사), 정성조(서울고, 서울음대, KBS 악단장)등 모두가 능숙한 편곡자 겸 연주자들이었다.
콜라·양색시·‘딕시 랜드’
낮 에는 동숭동 문리대 캠퍼스, 저녁에는 용산 밴드 사무실에서 우리를 픽업하러 오는 미군 트럭을 기다렸다. 가는 곳은 날마다 달랐다. 용산 부근일 수도 있고 파주, 의정부, 동두천, 부평, 오산, 평택이 될 수도 있었다. 먼 곳에 갈 때면 식사가 제공되었다. 보통 세 스테이지를 했는데 휴식 때마다 오렌지 주스나 콜라를 웨이트리스가 날라왔다. 클럽 안 풍경은 어디든 비슷했다. 백인, 흑인 병사들에 짙은 화장의 아가씨들. 이미 결혼한 한·미 커플은 걸어서 부대로 들어올 수 있었지만 파트너인 한국 여성들은 동내에서 트럭에 실려 부대로 들어왔다. 때로는 부대 앞에 무리 지어 있다가 지나가는 GI의 팔짱을 끼고 들어오기도 했다.
우 리들의 연주곡목은 주로 글랜 밀러 스타일의 스윙이었다. 블루스, 탱고, 트위스트, 차차차, 맘보에 지터벅(지루박)과 당시 유행하는 팝도 연주했다. 클럽 안은 흑인, 백인이 은연중에 구분되는 분위기였다. ‘옐로 로즈 오브 텍사스’를 연주할 때는 남부출신 백인들이 일어나서 환호를, ‘딕시랜드’를 연주하면 흑·백의 북부출신이 일어나 기세를 올렸다. 이역만리 낯선 땅, 삭막한 막사 주변이었지만 댄스파티나 플로어 쇼가 있는 날만은 축제였다.
저 녁 8시부터 11시경까지 연주를 하고는 악기를 챙겨 트럭의자에 앉아 서울로 돌아왔다. 운전사가 한 사람씩 집 앞에 내려주었는데 서울의 북쪽에서 돌아올 때는 내가 마지막이었다. 시간은 새벽 한 시나 두 시. 전력이 달려 제한 송전을 하던 시절이어서 집에 들어가 책상 앞에 앉으면 석유등이나 촛불을 켜야 했다. 여름날이면 나방이 몰려들었다. 낮에는 캠퍼스, 밤에는 돈벌이 연주를 했으니 그 공부가 실할 수가 없었다.
시 인교수 송욱 선생의 리포트 과제가 있었다. 문리대 본관 앞에는 정원이 있었고 가로지르는 오솔길 가에는 벤치가 있었다. 어느 날 오후, 마침 앞을 지나는 선생께 리포트를 내고는 동기인 유종호(문학평론가), 신우식(전 서울신문사장)과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잠시 후 선생께서 연구실에서 나와 우리 앞을 지나시다 멈추었다.
“학생이지, 아까 리포트를 낸 사람이.”
어조가 심상찮아 천천히 일어섰다.
“이거 안 돼요. 점수 못 줘요. 자신의 생각이 없잖아요.”
그 말만 남기고 선생은 가버리셨다. 유종호가 옆에서 혼잣말을 했다.
“남의 글, 남의 생각이라 안 되면, 그러는 자기는 남과 무관인가?”
송 욱 선생에 관해 잊을 수 없는 장면은 또 있다. ‘T.S. Eliot’와 ‘W.H. Auden’에 대한 강의를 들을 때였다. 선생은 ‘T.S. Eliot’에 대해 출제한다고 하셨다. 그러나 시험시간 흑판에 쓰신 것은 ‘W.H. Auden’이었다. 학생 중 몇이 항의했지만 선생은 “내가 강의한 건데 그때 학생은 뭘 하고 있었지?”라고 말씀하셨다. 쥐어짜면 몇 줄은 써냈겠지만 그게 내 생각일 수는 없었다. 처음으로 답안지를 안 내고 그냥 나와버렸다.
‘나의 생각’을 찾아서
후에 내가 동양방송(TBC) PD로 재직하던 시절이었다. 영문과 동기인 김규 상무실에서 호출이 왔다. 클래식을 즐겨 듣던 선생이 FM 라디오에 출연차 오셨다가 제자의 방에 들른 것이었다.
“이군. TV에 나오는 거 봤어. 요즘 어때.”
나는 역습의 기회라 생각하고 선생께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생각나세요? 자기 생각 안 썼다고 점수 안 주신 것. 제가 그 후로 얼마나 혼났는지 모르실 겁니다. 내 생각이 뭔지 찾느라구요.”
“내가 언제 그랬지? 그랬을 리가 없어. 안 그랬어.”
우리 세 사람은 같이 웃었다.
서 울대 병원, 선생의 장례식에 제자들이 모였다. 조준학, 백승길, 김규, 신우식, 유종호. 우리들은 아주 검소한 유족을 보았다. 장례식 내내 사람들은 말소리가 작았고 서로 눈으로 대화했다. 그날 정적의 고요를 느끼며 우리는 흩어졌다. 송선생을 회상할 때마다 나는 그 기억의 선명함에 놀란다. 선생께서 가르쳐준 ‘나의 생각’은 지금까지 내가 하는 모든 일에 기본이 되고 있다.
대 학 시절 내가 가까이 지낸 이는 한철모(방송인)와 백승길(작고, 전 한국박물관협회장)이었다. 어릴 때부터 몸이 불편했던 한철모는 자신과 같이 걸을 때도 보폭을 줄이지 않던 나를 오히려 좋아했다. 그의 집에 간 일이 있다. 책상 위에는 아주 두툼하고 큰 영한사전이 놓여 있었다. 다른 책은 별로 없었다. 다른 누군가가 해설한 책은 읽고 싶지 않다던 한철모는 음성이 아주 맑고 생각이 뚜렷했으며 웃음이 많았다.
백 승길의 집은 남영동. 방향이 맞아 자주 어울렸다. 깨끗한 말씨와 냉정한 성격을 가져 아이스박스라는 별명으로 불리던 여학생과 가까이 지냈지만 맺어지지는 않았다. 졸업 후 ‘코리아타임스’ 기자를 거쳐 평생을 미술평론과 유네스코, 박물관 관계의 일을 한 이 친구를 통해 나는 많은 사람을 만났다. 한국문화를 외국에 알리는 일에 평생을 바친 그는 몇 해 전 작고했다.
동 급생 중에는 4명의 여학생이 있었는데 그 중 한 명이 설순봉(번역문학가)이다. 누군가가 지은 별명이 ‘하나님의 딸’이었다. 약간 고개를 숙이고 책을 껴안고는 조용한 발걸음으로 캠퍼스를 걸었다. 설순봉 하나만을 놓고 본다면 대학이 아니라 수도원이었다. 누구도 그녀에게 쉽게 말을 붙이기 어려웠다. 그런 설순봉이 영문과 1년 후배와 결혼했는데 낭군의 이름은 김우창(문학평론가, 고대대학원장)이다.
졸 업이 다가왔다. 과 주임이면서 총장이었던 권중희 교수가 우리를 모아놓고 말씀을 하셨다. “영문과 졸업이지만 여러분은 아직 작가도 평론가도 아니며 이제 겨우 사전 가지고 영문을 깨치는 것을 배웠을 뿐이다. 전공은 졸업하고 천천히 정해야 할 것이다.”
몇 번의 시험포기가 있어 5년을 채우고 1958년 한 해 아래 친구들과 졸업을 했다. 이상회(전 국회의원, 신문협회이사)와 위에 거명된 김우창의 클래스였다.
“Show must go on!”
또 다시 아버지와 상의했다. “대학원에 가볼까요” 했더니 “연구실 생활이 뭐 좋은 줄 아느냐”고 하셨다. 아버지의 생리학 연구실에는 깨끗치 않은 플라스크, 등잔, 액체를 담은 푸른 병들, 녹슨 수도꼭지, 바랜 논문집, 의학서적 등이 있었다. 사주에 문(文)이 있다고 했으니 잠시 공부길을 찾을까도 했지만 죽으라고 책만 파고들 입장도 아니니 분수에 맞게 살자 싶어 文에서 藝로 방향을 틀었다.
원 효로 선린상고 들어서는 길목에 ‘한국연예연합회’라는 회사가 있었다. 약 50여 개의 단체들을 관장하는 연합회사였다. 사장 안찬옥, 전무 이완영(중학 1년 선배), 상무 김영순(서울치대 출신, 명 트럼페터에 노래도 일품, 이해연씨의 남편이자 길옥윤씨의 선배이기도 했다). 30여 밴드와 20여 플로어 쇼단체가 소속되어 있었는데 모든 단체는 미군의 스페셜 오피스에서 넉 달에 한 번씩 실시하는 오디션을 거쳐야 했다. S.A(스페셜 A), A, B, C로 등급이 나뉘고 D는 드롭(낙제)이었다.
나 는 연합회를 찾아가서 나를 써달라고 했다. 월급은 일하는 것을 보고 주라고 했다. 제작부가 만들어지고 레코드실도 생겼다. 나는 업무부의 제작 스태프가 됐다. 음악실장은 서울음대 출신의 박선길(가수 박정운의 아버지). 제작부에는 두 사람이 있었는데 흑인 여성 미세스 화이트가 주로 발음을 봐주었고 나는 통역을 겸하며 제작 전반에 끼여 들었다. 제법 큰 구내식당이 예비 오디션 장소로 사용됐다. 연합회 스태프와 해당단체 오너들이 어울려 기록하고, 지적하고, 수정했다. 의상, 안무, 음악, 영어발음, 구성, 쇼맨십, 표정, 스테이지 매너 등을 체크했다. 본 오디션의 결과가 좋아야 좋은 연예인을 영입할 수 있었고, 그래야 일도 많고 수입도 많아지니 모두들 진지하고 열심이었다. 당시의 경제사정으로 볼 때 연예인들의 달러 수입은 적은 것이 아니었다.
본 오디션에서 나의 역할은 미국인 심사원들의 지적사항을 듣고 기록해 해당 단체장에게 전하는 것이었다. 각각 다른 전문분야를 담당하는 심사원들의 지적은 다양하고 치밀했다. 곡의 해석, 발음, 표정, 몸짓, 의상, 구성의 다양성과 진행의 스피드, 그리고 공연의 흥과 재미까지도 심사의 대상이 되었다. 일을 하면서 쇼의 근간은 Speed(경쾌한 진행속도), Fun(재미), Variety(변화, 다양성)라는 것을 배웠고 ‘Show must go on!’이라는 구절도 익힐 수 있었다.
오 디션을 통과하기 위해서 각 단체는 항상 새 레퍼토리를 준비해야 했다. 매달 미 국방성에서 발간하는 뮤직 폴리오가 각 클럽에 전송되었는데 그 안에 ‘스타크 어레인지먼트(Stock Arrange-ment)’라는 것이 있었다. 여기에는 일류 편곡자의 손으로 매만져진 미국 본토 히트 연주곡의 파트별 악보가 들어 있었다.
이봉조부터 패티김까지
당 시 기억나는 연주인으로는 이봉조, 최창권, 김강섭, 엄토미, 송민영, 여대영, 김인배, 정서봉, 김희갑, 박성원 등이 있다. 이때쯤 이름을 ‘Knights of Melody’(A.Tone의 후신)로 바꾼 우리 악단은 여전히 큰 인기를 끌고 있었다. 미국 국무성에서 주한미군 위문단을 편성해 서울로 보내면, 주한 미군 연예 담당자는 그들이 첫날밤을 우리가 출연하는 E.D.F.E클럽( 을지로 6가 극동 미공병단 본부인 E.D.F.E(Engineering District of Far East)에 있던 장교 클럽)에서 보내도록 스케줄을 짰다. 먼길 온 것을 환영하는 뜻에서, 그리고 한국에도 이만한 악단이 있다는 자랑의 뜻에서였다.
당 시 8군 무대에서 노래한 가수는 최희준, 프랭키손, 곽순옥, 로라 성, 현미, 한명숙, 이금희, 이춘희, 모니카 유, 여대영씨 부인인 소프라노 봉혜숙, 소프라노 이영숙, 미국 가기 전의 어린 윤복희, 패티김, 김씨스터즈 그리고 막내들인 이씨스터즈 들는데, 모두 쟁쟁한 실력을 갖고 있었다. 우리 악단에도 전속 가수가 있었다. 손시향(서울농대), 박형준(외대 스페인어과), 정숙자(이대 법대), 이석(왕실의 후손/외대 스페인어과), 유주용(서울문리대 물리학과) 등이었다.
1958 년 제대하고 1964년 이른봄까지, 낮에는 학교 공부 혹은 연합회 일에 매달리고, 밤에는 E.D.F.E클럽에서 연주를 했다. 역대 공병단장의 인계사항으로 매년 바뀌는 클럽 서전들은 우리를 전속으로 써야 했다. 미8군 사령본부 클럽의 ‘다운 비이츠’ 악단과 우리 ‘나이츠 오브 멜로디’ 악단은 늘 S.A등급이었고, 매니저 없이도 일자리 걱정은 안 했다. 당시 우리 악단이 받는 월 보수는 1200달러로 1인당 100달러가 넘었는데, 대학등록금의 서너 배에 가까운 금액이었다. 밤낮으로 바쁜 일과였지만 경제적으로는 풍족했다. 연예회사의 월급과 악단의 수입으로 나는 학생귀족이었다. 내 학비 충당하고 집의 생활비와 동생들의 학비에도 도움을 줄 수 있었다.

1962 년 ‘나이츠 오브 멜로디’는 미군무대를 떠나 다운타운 악단이 됐다. ‘민들레’라고 악단 이름을 바꾸고 우리 음악으로 레퍼토리도 넓혔다. 퇴계로의 문라이트클럽에 출연하면서 이대강당, 서울대문리대 강당, 드라마센터에서 공연도 했다. 여러 차례 KBS TV에 출연하기도 했다. 이 시기부터 나는 연주를 하며 악단의 사회를 겸하기 시작했다
스타들의 스무살…혹은 살아남고 혹은 사라지고
히피 문화가 세계를 휩쓸던 1960년대.춥고 배고픈 이 땅에도 청년문화가 꽃피었다.
그 중심에 섰던 ‘쎄시봉’과 ‘청개구리집’멤버들. 한국 쇼비즈니스 생성기에 혹은 별이 되고 혹은 사라져간 재기와 순수의 청춘, 그 짧은 기록.

1958 년 나는 5년 간의 대학시절에 종지부를 찍고 딴따라 세계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그때 나이 만 25세. 이 해에 기억나는 일은 보신각 바로 옆자리의 HLKZ-TV에 내가 몸담은 민들레 악단이 출연한 것이다. 그 자리에서 황문평(대중음악평론가) 선배와 연극연출가 이기하씨를 처음 만났다. 이때쯤 우리 악단은 ‘타향살이’의 고복수씨 은퇴기념 호남순회공연에도 참가했다. 황금심, 남인수, 이난영씨 등 여러 원로가수들과 함께했는데, 지금도 기억이 생생한 두 장면이 있다.
첫 째는 물 끼얹은 듯 조용했던 객석의 ‘숙연함’이다. 어떻게 청중의 소리 듣는 분위기가 그토록 조용할 수가 있을까. 고복수씨의 은퇴공연, 이제는 더 이상 정든 그 목소리를 들을 수 없다는 것이 그리도 가슴 아팠던 것일까. 극장 안은 객석의 응시와 경청으로 공연 내내 숙연했다.
두 번째는 우리가 여관에서 극장으로, 극장에서 여관으로 이동할 때 당시 스타들의 걸음걸이다. 지방도시 길가 건물들이 그리 높지 않았기 때문일까. 길 한가운데를 횡렬로 걸어가는 그들의 걸음걸이는 난쟁이 나라의 걸리버나 도시를 짓밟고 가는 ‘용가리’ 바로 그것이었다. 조금 뒤떨어져서 따라가는데 그들은 길가의 전주보다 더 높아 보였다.
남인수, 현인, 루이 암스트롱
서서히, 그러나 지체없이 50년대는 지나가고 60년대가 시작됐다.
1960 년 4·19 의거로 이승만 대통령은 하야하고 미국으로 떠났다. 그리고 1961년 5·16 쿠테타가 일어나던 그 해 12월 문화방송 라디오가 개국했고 같은 달 KBS TV도 개국했다. 1963년 동아방송 라디오국 개국, 이듬해 봄 라디오서울(동양방송) 개국, 그리고 그 해 12월4일에는 TBC TV(동양방송)가 개국했다.
새 술은 새 포대에 담아야 한다던가, 잇단 민간 상업방송 개국으로 우리 시청각 환경은 크게 바뀌었다. 클래식, 가곡, 국악 위주로 방송하며 품위를 중시하던 KBS 주변에서 민방들이 새 리듬과 창법의 음악들을 전파하기 시작한다.
1961 년 루이 암스트롱이 워커힐 개관기념 공연을 위해 방한했다. 그는 “레이디스 앤드 젠틀멘”이라는 인사 대신에 “Hello Folks!” 라고 했다. 트럼펫도 불고 노래도 불렀다. ‘블루베리 힐’ ‘헬로 달리’ 등. 쉰 소리에 서민적인 미소, 눈이 무섭게 컸고 볼과 입술이 두툼했다. 나는 대학 때부터 구독하던 재즈 격주간지 ‘다운 비츠(Down Beats)’를 통해 그를 잘 알고 있었다. 무대가 끝나고 나는 그와 둘이서 짧은 얘기를 나눌 수 있었다.
전통 재즈를 좋아한다고 들었는데 맞느냐 했더니 그렇지 않다는 대답이었다. 쿨, 모던, 프로그레시브 모두 좋아하며 음악이면 가리지 않고 좋아한다고 했다. 늘 다음 순간의 소리를 생각하는 것이 음악 아니겠냐고도 했다.
1962 년 6월26일 오후 2시 남인수가 폐결핵으로 숨을 거두었다. ‘애수의 소야곡’ ‘가거라 38선’ ‘이별의 부산 정거장’ ‘산유화’ ‘청춘고백’ 등을 남겼다. 푸른 하늘보다 더 푸르게 하늘로 메아리치던 그 낭랑한 소리가 사라졌다. 눈부신 소리였다. 고복수 은퇴공연 무대에서 반주를 하던 내가 가장 좋아한 곡은 ‘청춘고백’이었다. 장례는 연예인협회장으로 치러졌는데 우리 악대가 행렬의 앞에 섰다. 필동에서 종로로 접어들고 다시 화신백화점을 끼고 조계사로 들어섰다. 나는 악단 맨 앞자리에서 대고(큰북)를 쳤다. 종로 길은 그렇게도 넓었고 연도에 늘어선 애도객들의 눈은 허공을 보고있는 것 같았다. 좋은 날씨였다.
한 국일보 문화부 이명원 기자가 가수평을 매주 8매씩 써달라고 부탁했다. ‘한많은 미아리 고개’를 부른 이해연씨의 남편이자 길옥윤씨의 서울치대 선배이며 흥업주식회사 상무였고 트럼페터 겸 가수였던 김영순씨가 나를 추천했다. 주로 미8군 출신 가수에 대해 썼다. 최희준, 유주용, 위키 리, 박형준, 현미, 한명숙, 이금희, 박재란 그리고 현인 선생에 대해서도 평을 했다.
그 리고 얼마 후 현인 선생을 뵙게 되었다. “이백천씨, 미리 좀 알려주지 않고…”라며 섭섭해하시는 것이었다. ‘베사메 무초’가 여자 이름이 아니라는 사실과 선생의 굵고 진한 바이브레이션에 대해 결례를 각오하고 한마디했던 것이 서운했던 것이다. 당시 내 나이가 30세도 안되었을 때였다. 그때 결심을 했다. 앞으로 20년 간은 아무것도 안 쓰겠다고. 그리고 당사자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말은 하지 말자고. 나중에서야 ‘비평은 올바른 칭찬’이 되어야만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때의 기사로 이명원씨는 내게 새 칭호를 주었다.
‘데이트 위드 쁘띠 리’
이제 쎄시봉 시절로 이야기를 옮겨도 될 것 같다.
1964 년 4월 중순의 어느 날 오후. 나는 무교동의 음악감상실 쎄시봉에 들어섰다. KBS 라디오의 일요일 아침 프로그램 ‘선데이 리퀘스트’에 사용할 음반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구성대본을 맡았는데 레코드실에 내가 원하는 음반이 거의 없었다. 팝송 레코드가 어느 정도 있기는 했지만 오래된 것들이었고 최신곡은 찾을 수가 없었다. 예산 부족으로 그 많은 신곡들을 때맞춰 구입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당시 프로그램의 담당 프로듀서도 없이 외부의 객인 나 혼자 라디오의 한 시간을 책임져야 했던 까닭이 있었다. 새 민방 TV(동양방송)가 곧 발족하는데 마침 대학 동기 김규가 그 프로젝트의 중심 인물이었다. 내가 그에게 쇼파트에 내가 있어야하지 않겠느냐고 자청했더니 그는, 방송 일은 처음이니 TV로 직행하기보다 우선 라디오를 경험해 보는 편이 좋겠다며 구성작가 자리를 잡아놓은 것이었다.
쎄 시봉의 주인 ‘이선생님’을 만났다. 길게 말할 필요도 없이 이선생은 기꺼이 도와주겠다고 승낙하셨다. 원하던 일을 쉽게 해결하고 커피를 마시며 실내를 둘러봤다. 플로어에 약 150석, 계단 몇 개를 올라가는 반층 위에 80석이 더 있었다. 위층의 안쪽에는 레코드가 빽빽이 들어찬 DJ 박스가 있었다. 실내 네 귀퉁이에 높이 걸린 네 개의 스피커에서는 부드럽고도 힘찬 사운드가 울려나왔다. 알 마티노의 ‘아이 러브 유 모어 앤 모어 에브리데이’, 짐 리브스의 ‘아디오스 아미고’, 최희준의 ‘맨발의 청춘’, 폴 앤 폴라의 ‘영 러버스’….
찾 아간 시간이 오후 두 시쯤이었다. 음악은 싱싱했지만 감상실 안의 풍경은 좀 달랐다. 소곤거리는 친구들, 허공을 쳐다보는 친구, 책 보는 친구 옆에서 도시락을 먹는 손님도 있었다. 머리를 붙이고 나란히 앉아 있는 남녀, 테이블을 옮겨다니는 친구….
음 악은 실내에 가득 차 흐르는데 정작 그 음악을 듣는 쪽은 홍수가 할퀴고 지나간 뒷자리처럼 황량했다. 대개가 스무 살 문턱에 막 올라선 젊은이들. 음악이 좋아 찾아온 학생이 태반이었지만 건달기가 묻어 있는 손님도 적지 않아 보였다. 주인에게 “누군가가 음악 해설도 하고, 영어 가사 풀이도 해주면서 친구처럼 어울려주면 좋지 않겠습니까?” 했더니 “그렇게 해줄 사람이 누가 있을까…” 하신다. “찾으면 있겠죠”라는 나의 대답에 “얘기 꺼낸 사람이 하시죠, 그게 좋지 않겠어요”라고 이선생이 말했다.
다 음 수요일 오후 다섯시. ‘데이트 위드 쁘띠 리’의 예정시간이 되었다. ‘데이트’는 영어, ‘쁘띠’는 불어. 굳이 우리말로 바꾼다면 ‘작은 이가(李)와의 만남’이었다. 일주일 동안 나름대로 광고도 하고, 입구에 포스터도 붙이고 했더니 쎄시봉은 제법 학생들로 가득했다. 그 날 내가 준비한 곡은 루이 암스트롱, 냇 킹 콜, 마할리아 잭슨, 빌리 할리데이, 튜크 엘링턴 악단, 그리고 흑인영가였다. 중앙계단 위쪽, 실내 어디서든 보이는 자리에서 마이크를 잡고 간단한 인사를 마친 후 한 곡씩 진행을 하고 있었다. 아래 플로어 정면의 젊은 친구 네댓 명이 우루루 일어나 출구 쪽으로 가면서 그 중 하나가 나직이 내뱉었다.
“개새끼, 지랄하네.”
그러자 잇달아 여기저기서 학생들이 일어섰고 내 쪽을 흘겨본 뒤 나가버렸다.
쎄시봉, 청춘과 낭만의 절정
털 퍼덕 계단에 주저앉았다. 일부가 빠져나간 쎄시봉에는 침묵만 남았다. 모두의 시선이 굳었고 그 속에서 나는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얼마쯤 지났을까, 그만하자 결심하고 남은 손님들에게 사과했다. 아직 내가 수양이 모자라 여러분들을 불편하게 했다고, 기왕 준비한 음악이니 듣자고 하며 허둥지둥 맺음을 했다. 그렇게 끝내는 시점까지 남아준 손님은 절반 정도.
주 인과 마주앉았다. 얼굴이 벌개져 죄송하다는 말을 했을 것이다. 포스터도 바로 뜯어달라고 했다. 그렇지만 이선생은 생각이 달랐다. “여기가 바로 종로구 우범지대 일번지고, 그리고 중간에 나간 사람도 많지만 그대로 끝까지 남아 들어주었던 학생들도 있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그냥 계속하자는 것이었다. 선생의 부인과 아드님(후에 TBC TV PD가 된 이선권)까지 계속해보자고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쎄시봉 주인 일가의 의견에 선뜻 응할 마음이 아니었다.
집으로 돌아가며 혼자서 자문자답을 해봤다. 내 작은 지식 자랑하려고 그들 앞에 선 것이 아니지 않은가. 어딘가 지쳐 보이는 그들과 동무하고 싶어서 나서지 않았는가. 다음주는 어떻게 할 것인가….

다 음주 같은 시간에 같은 계단 그 자리에서 나는 지난주의 불상사를 그대로 보고하면서 오늘은 여러분의 심부름을 맡은 하인이 되겠다고 말했다. 듣고 싶은 곡이 있으면 손을 들고 신청하라고 했다. 여기저기서 손이 올라왔다. 지난주와는 확연히 달랐다. 그것은 축제의 시작이었다. 마이크의 긴 케이블을 끌고 친구들에게 다가갔다. 대상을 정하고 다가가 신청곡을 물어본다. 신상을 묻는다. 신청곡에 특별한 사연이라도 있는지, 옆자리에 앉은 이는 연인인가 친구인가, 만난 지 얼마나 되었나, 뽀뽀하는 단계는 지났는가.
DJ 박스에서 신청곡 찾는 데 걸리는 시간은 20초 내외, 테이프에 수록된 곡을 찾자면 적어도 l분은 걸린다. DJ의 손이 올라오면 준비가 끝났다는 신호다. 마이크를 들이댈 때 옆에서 다른 친구가 끼여 들 수도 있다. “얘, 지난주에는 다른 여학생이랑 왔어요”. 인터뷰하는 동안만은 실내가 조용했다. 모두 마이크 주변에 시선을 모았다. 마이크가 찾아가는 곳이 객석 안의 작은 무대였다. 곡이 끝나면 무대가 옮겨졌다. 무대마다 흥이 났다. 어느 틈엔가 쎄시봉은 젊은이의 광장이 되고 있었다. 그들은 같은 또래 친구들의 ‘입김’을 서로 여과 없이 받아주고 있었다.
당 시의 쎄시봉 식구들을 소개해야겠다. 주인 이선생과 아름다운 사모님, 아드님 이선권 외에 DJ실 스태프는 조용호(서울대 미대 출신, ‘하얀 손수건’의 우리말 가사를 썼고 TBC TV ‘쇼쇼쇼’의 PD와 국장, m-net의 전무 역임) 구자홍(서울 문리대 철학과, 후에 ‘실험극장’ 멤버, 현재 의정부 예술의전당 관장)이었고, 신청곡에 적힌 사연을 읽어주는 성우로 피세영(영문학자이자 수필가인 피천득 교수의 자제, ‘실험극장’ 멤버, 라디오 DJ, 현재 캐나다 거주)과 이장순(TBC 라디오 성우, 맑은 눈, 맑은 소리, 낭독이 일품이었다. 후에 영화감독과 결혼했고 3년 전 미국에서 작고)씨가 있었다. 쎄시봉에 출입하는 전 스태프는 보수 없이 일했다. 분위기와 음악이 좋아 모인 것뿐이었다.
‘데 이트 위드 쁘띠 리’를 서너 달 진행하다 ‘대학생의 밤’을 시작했다. 피아노와 스포트 라이트를 준비하고 대학생들의 노래마당을 펼쳤다. 피아노는 입구 옆 공간에 놓았다. 피아노 반주는 김강섭(전 KBS 악단장), 김용선(TBC 악단 편곡자 겸 피아니스트)씨가 교대로 맡아주었다. 조명은 단골 손님이 담당했다. 음악감상실에서 라이브 무대를 갖는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마이크가 하나밖에 없어 누가 기타로 노래를 하게되면 옆에서 마이크를 잡고 있어야 했다.
하나둘씩 기타를 들고 모여들기 시작했다. 조영남, 윤형주, 송창식, 이익균, 이장희, 그리고 맏형격인 박상규, 장우(장영기)….
조 영남은 직접 피아노를 치며 노래했다. ‘언더 더 보드워크’ ‘돈 워리’ ‘시 오브 하트브레이크’ ‘고향생각’. 더벅머리에 검은 교복. 얼마나 오래 입고 있었던지, 그것이 대학 교복인지 고등학교 교복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노래 솜씨가 예사롭지 않았다. 오장육부에서 발성이 되는 듯했다. 그가 처음 쎄시봉에서 노래를 부른 그 날의 마지막 곡이었다.
“해애는 저어서 어어두우운데 차아자아오오는 사아람 없어..”
해 질 무렵이었다. 출출할 때 듣는 소리는 마음에 더 깊이 스며드는 것일까. 조영남의 소리는 레코드나 테이프에서 나오는 소리와는 달랐다. 살아서 움직이는 소리였다. 그가 어렸을 때에 본 고향의 황혼 빛이 배어 있는 것 같은 소리였다.
송창식은 기타를 치며 이탈리아 가곡 ‘까라 마마’ ‘셉템버 송’, 자니 마티스의 ‘투엘브스 오브 네버’를 불렀다. 성당 안에 앉은 기분이었다. 기타의 통나무 소리와 클래식 발성이 참 잘 어울렸다.
윤 형주는 바비 다린의 ‘로스트 러브’를 잘 불렀다. 감미롭고 맑은 소리였다. 흑인영가 ‘스칼레트 리본’도 잘 불렀다. 기독교 집안의 자제였고 찬송가가 잘 어울리는 소리를 가진 그가 팝송을 부르면 노래들이 오리지널보다 더 신선하게 들렸다. 무대를 응시하며 그의 노래를 경청하던 학생들의 침묵이 지금도 생각난다.
이 장희는 막내였다. 여드름이 많아 ‘해삼’이라는 별칭이 붙기도 했다. 기타를 치면서 장만영의 시 구절을 읊기도 했는데 그것이 일품이었다. 흙 속에서 올라온 것 같은 부드러운 소리, 그러나 쩌렁쩌렁 울리는 맛도 있었다. 그의 큰 눈동자는 늘 눈물이 글썽했다. 하루는 그가 ‘서니’라는 곡을 진짜 울면서 불렀다. 마이크를 내밀었다. 사연인 즉, 사귀는 아가씨의 이름이 선희였다. 동네 목욕탕집 딸이었는데 왕자와 공주처럼 서로 사랑하는 사이라고 했다. 그런데 그녀가 요즈음 잘 만나주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마음을 달래려고 인천 앞바다 모래 사장에서 한줄 편지를 써 그녀에게 보냈다고 한다.
“아이 저스트 크라이드 바이 더 씨”
그랬더니 그녀가 잘 만나 주더라는 것이다. 우리는 ‘서니’를 앵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 젓가락이 짧구나!”
박 상규, 장영기의 듀엣 ‘코코’는 라틴 곡 ‘콴타나 메라’ ‘베사메 무초’ ‘라밤바’에 팝송 레퍼토리도 다양했다. ‘키프 온 러닝’ ‘딜라일라’ ‘예스터데이’. 박상규의 말에 의하면 장영기는 그 당시 이미 1000곡 가까운 팝송의 가사를 외우고 있었다고 한다. ‘코코’의 노래 중간에는 박상규의 즉흥시도 한몫을 했다. 그 중의 하나. 숨을 고르고 침을 삼킨 다음 천장을 바라보며 한마디를 발한다.
“달아! 빈대떡같이 둥근 달아. 초간장이 있다면 널 찍어 먹을텐데…, (검지와 중지를 치켜들며) 아… 젓가락이 짧구나!”
‘대학생의 밤’이 시발점이 되어 갖가지 프로그램이 생겼다. ‘즉흥 스테이지’ ‘삼행시 백일장’ ‘주간한국’의 ‘성점(星點)감상실’과 ‘신곡감상회’ 그리고 명사초청 강연.
‘즉 흥 스테이지’. 아무라도 좋았다. 나와서 무엇인가를 보여주면 되는 코너였다. 계단 위 기둥 옆의 좁은 공간을 무대로 정했다. 첫날 조금 일찍 쎄시봉에 들어섰다. 학생들은 가득했지만 아무도 신청을 하지 않고 있었다. 신청자가 없다고 그냥 프로그램을 취소할 수는 없었다. 남자 한 사람 나와 달라니까 한 친구가 손을 들며 앞으로 나왔다. 그러나 단상에 남자 하나만 세워놓으니 뭔가 빈 것 같았다. 실내의 모든 여자들이 내 시선을 피했다. 다른 곳을 보고, 남자 친구 등뒤로 숨고…. 내 바로 앞 테이블의 여학생이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나와 눈이 마주쳤다. 다가가 그녀의 손을 잡고 일으켜 남학생 옆에 세웠다.
“일어나 보시겠어요”
“세 발짝만 옮겨 저 남학생 옆에 서 주시겠어요?”
스포트라이트 조명 속에 두 사람이 나란히 선 순간 박수가 터졌다. 계단 상단에 놓인 빈 의자에 둘을 앉혔다. 시놉시스는 그 자리에서 나왔다. 1막 3장.
1장. 둘은 여기서 처음 만났다.
2장. 그들은 결혼했다.
3장. 그로부터 15년 후.
도리스 데이가 부른 ‘케 세라 세라’를 서곡으로 해서 그들이 숨을 가다듬을 여유를 주었다.
“The future’s not ours to see, Que Sera Sera.”
곡이 끝나자 대뜸 남학생이 밑도 끝도 없이 첫 대사를 여학생에게 던졌다.
“야! 너 나 좋아하는구나!”
둘 은 천천히 학교, 취미, 가족 얘기를 나누었다. 한쪽은 마릴린 먼로를 좋아한다고 했고, 다른 한쪽은 유주용을 좋아한다고 했다. 얘기는 막힘없이 흘렀다. 둘은 순발력이 뛰어났다. 2장이 되자 호칭이 바뀌었다. 너에서 ‘당신’으로. 회사출근 상황 연기에선 “뽀뽀해주고 가야지!”가 나왔고, 귀가 늦지 말라고 당부하고….
MC 가 저녁으로 시간을 바꾸었다. 남자가 잠시 눈알을 굴리다가 상대방의 손을 잡으면서 한마디를 한다. “불 끄자”. 정말 실내등이 꺼졌다가 다시 들어왔다. 3장은 여자의 바가지로 시작됐다. 남들은 다 잘사는데 우리는 뭐냐는 것이었다. 이럴 거면 왜 그 날 쎄시봉에서 나를 꼬셨냐고 따지고 들었다. 책임도 못 질 거면서 왜 셋씩이나 애들을 낳게 했느냐 추궁했다. 남자가 여자의 시선을 피하면서 대답했다.
“그 애들 만들 때마다 내가 얼마나 있는 힘 다해서 노력한 줄 자기는 모를 거야!”
그 둘은 실제로 친해져서 자주 같이 모습을 보였다. 한동안 보이다가 그들은 사라졌다. 37년 전의 일이다.
‘성점감상실’과 ‘동백아가씨’
‘즉 흥 스테이지’. 하루는 단골 전유성이 정장에 파란 넥타이를 하고 와서 가위를 준비해달라고 했다. 자기가 솔로 액트를 하겠다는 것이었다. 그의 액트는 5초를 넘기지 않았다. 매고 왔던 새 외제 넥타이를 목 아래 10cm 정도에서 싹둑 잘라냈다. 그리고는 꾸벅 인사를 하고 내려갔다. 그뿐이었다. 부잣집 아들같지 않았던 전유성.
전 위행위예술가 정강자씨도 즉흥 스테이지에 모습을 보였다. 정강자씨는 미술가로 가수 남일해의 누이동생이었다. 음악을 따로 가져와 한판을 벌였다. 흰 망토 같은 의상을 입고 간단한 분장을 하고는 거의 나체로 바디 랭귀지를 보여주었다. 학생들과 같이 보는데 왠지 가슴이 무거웠다. ‘해프닝’ ‘스트리트 퍼포먼스’ 같은 단어들이 주변에 떠돌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그 날의 퍼포먼스는 관중의 역할보다 ‘행위자의 감성 체험’에 더 의미를 두어야 할 것 같았다.
‘삼 행시 백일장’은 누구나 참가할 수 있어서 인기가 좋았다. 재치 넘치는 글들이 많았는데 수작에는 쎄시봉 입장권을 상품으로 주었고 범작은 혹평을 맞고 머리 뒤로 버려졌다. 얼마간 진행을 맡다가 당시 홍익대 학생이던 이상벽에게 바통을 넘겼다. 훗날 이 프로는 CBS 라디오의 정규 프로그램으로 자리를 잡았다.
‘성 점(별의 개수로 평가를 한다는 뜻) 감상실’. 하루는 TBC TV로 정홍택 기자가 찾아왔다. ‘주간한국’이 창간되는데 좋은 아이템이 없겠느냐는 것이었다. 대학 때부터 계속 읽어오던 미국의 재즈 전문 격주지 ‘다운 비츠’에서 본 ‘블라인드 폴드 테스트’를 해보자고 제의했다. 새로 나온 음반을 유명 재즈 뮤지션에게 설명 없이 들려주고 각 파트의 연주자가 누구이며 평가를 한다면 별을 몇 개 줄 것인가 하는 특이한 칼럼이었다. 별 다섯 개에서 별 하나까지 채점을 하고 그 음악에 대한 자기 평을 쓰기 때문에 연주자, 제작자에게는 신경이 쓰이는 페이지였다. 눈을 가리고 한다는 뜻으로 사전 정보가 완전히 배제된 상태에서의 시청(試聽) 소감을 말하는 것이었다.
우 리말 ‘성점감상실’이란 제목으로 연재가 결정됐다. 다운 비츠는 유명 재즈 평론가가 입회한 상태에서의 1인 평이었지만 성점감상실은 쎄시봉에서 공개로 하기로 하고 학생들에게 용지를 돌려 의견과 별 개수를 적도록 했다. 최고점은 별 다섯 개였다. 자신의 평이 주간지에 실린다고 하니 학생들의 참여가 왕성했다.
메 인 게스트로 유명 가수들이 초대되었는데 3주차에 큰 사건이 벌어졌다. 봉봉사중창단이 손님이었고 주어진 곡은 ‘동백아가씨’였다. 봉봉은 이 곡에 평점을 줄 수 없다고 했다. 왜색조라는 이유였다. 기사가 나가고 신문마다 왜색가요 시비의 기사가 올라왔다. 결국 공연윤리위원회에서 이 곡을 금지곡으로 묶고 말았다.
“헤일 수 없이 수많은 밤을 / 이 가슴 도려내는 아픔에 겨워 / 얼마나 울었던가 동백아가씨 / 그리움에 지쳐서, 울다 지쳐서…”
‘성 점감상실’은 1970년대까지 장수했다. 짧은 몇 줄의 의견이었지만 학생들이 시중 잡지에서 평론가의 역할을 한 것은 처음이었다. ‘주간한국’의 정홍택씨와는 ‘신곡합평회’, ‘시인만세’도 같이했다. 쎄시봉은 ‘주간한국’ 전용 젊은이의 광장이었던 셈이다. 신곡합평회는 레코드 제작에 들어가기 전 대학생들의 반응을 알아보는 프로그램이었고, 시인만세는 시인들을 모시고 그분들의 말씀과 자작시 낭송을 듣는 기획이었다. 아마추어 시인들도 참가해서 자작시를 낭송할 수 있었다. 첫 손님으로 서정주 선생을 모셨고 박목월 선생, 박재삼 시인 등 쟁쟁한 분들이 학생들과 자리를 함께했다. 이와는 별도로 ‘명사특강’도 했는데 국회의원 김대중, 정광모씨등 각계 분들이 와주었다.
‘대 학생의 밤’에서 구봉서씨를 초청한 일도 있었다. 방송국에서 구봉서씨를 만나 쎄시봉에 한번 얼굴을 비쳐 달라고 부탁했다. 뭐하는 곳이냐는 반문에 음악감상실인데 대학생들이 모이는 장소라 설명을 하자 막동이 구봉서씨는 “어이쿠, 안 돼요. 나 세상에서 대학생들이 제일 무서워요. 그 친구들 길에서 날 보면 ‘막동이구나’ 하고 막 부르면서 콧방귀 뀌어요. 난 대학생 보면 미리 도망가요. 걔들은 날 사람으로 안 봐요. 사절하겠습니다” 하며 손을 내저었다.
술집에 팔려간 그 여자아이
그 럼에도 끈질기게 매달린 끝에 와주겠다는 확답을 받았다. 약속한 날 나는 학생들과 작전을 짰다. 보초가 길에 나가 기다리다 구봉서씨의 모습이 보이면 알리기로 했다. 그가 실내로 들어서는 순간 전원 기립박수로 그를 맞았다. 무대중앙 좌석에 앉을 때까지 그 박수는 멈추지 않았다. 구봉서씨는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오늘은 아무것도 하시지 말고 같이 있어만 주세요.” 그는 더욱 의아해했다.
학 생들이 차례로 나와 노래를 부르고 개그도 했다. 손님을 위해 모두 일어나 주먹을 흔들며 빨간 마후라도 불렀다. 학생들의 구봉서씨에 대한 감사의 표시였다. 쎄시봉 전체가 무대였고 그 날의 유일한 관객은 구봉서씨 혼자였다. 끝에 가서 마이크를 잡은 구봉서씨는 감격의 답사를 해주었다.
“이럴 줄 몰랐다. 이런 곳이 있는 줄 몰랐고, 대학생들이 이렇게 귀여운 줄도 몰랐다. 꿈을 꾸는 기분이다. 마치 할리우드 영화의 주인공이 된 것만 같다. 정말 고맙다.”
끝난 후에도 입구에서 손을 흔들며 그가 사라질 때까지 기립박수는 이어졌다.
프로가 없던 가을날 밤이었다. 실내에 바깥의 냉랭한 공기가 스며드는 여덟 시쯤 여기저기 자리를 옮겨가며 신청곡을 받고 있는데 한 학생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선생님, 생각나세요? 매일 저 베란다 바로 아래 자리에 혼자 와서 음악 듣던 여자 아이.”
그는 빈자리를 손으로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아까 걔가 나가면서 말했어요. 이젠 쎄시봉에 오지 못하게 됐다고. 부산 술집에 팔려서 간댔어요. 서울역에 빨리 나가야 한다면서 아까 나갔어요.”
그 여자아이가 신청하던 곡은 늘 티미 유로가 부른 ‘허어트(Hurt)’였다. 빈자리에 스포트라이트가 비추어지고 티미 유로의 처절한 가락이 찢어질 듯이 쎄시봉 안을 메아리쳤다. 음악이 계속되는 동안 실내는 조용했다.
서울대생 김종철, ‘여두목’ 윤여정
1964 년에서 1969년까지는 그렇게 흘렀다. 쎄시봉 6년. 조영남이 먼저 매스컴을 타고 이어서 줄줄이 방송에 진출했다. 소위 통기타 1세대들. 모두들 소리의 결이 좋았다. 통기타의 통나무 숨결에 자기 소리를 싣자니 그 소리가 순박할 수밖에 없었다. 객석에서 무대 쪽으로 향하던 젊은이들의 순박한 마음의 바이브레이션도 그들 노래에 큰 작용을 했을 것이다. 훗날 알게 되었지만 쎄시봉 단골 학생 중에는 당시 서울대를 다니던 언론인 김종철군, 홍대생 이두식군(전 미술협회장), 가수가 아니면서 여두목 역할을 한 윤여정양도 있었다.
쎄 시봉 식구들이 자주 가던 장소들이 있다. 주말마다 무리지어 몰려가 라면이며 잼을 바닥내가며 드러눕고 뒹굴던 김성수 신부의 인천 성공회 사제관, 회현동 최영희(연대종교음악과, 짧은 기간 영화배우와 가수로 활동하다 미국 이주)의 집, 며칠씩 그냥 가서 거저 먹고 자고 해도 늘 친절했던 청평 안전유원지의 최사장 일가.
한 번은 겨울에 여럿이 조영남의 고향 삽교에 간 일이 있었다. 송창식, 윤형주, 이장희, 윤여정, 최영희와 서울대 음대 학생이던 전혜숙과 이숙영. 조영남이 어린 시절 살았다는 집에서 본 학창 시절의 앨범 사진, 트럼펫을 불면 동네 소들이 모두 화답을 했다는 나지막한 앞산 언덕, 삽교국민학교의 자그마한 교정. 일행은 온 김에 수덕사를 들러 뒷산 마애불까지 올라갔다. 그리고 내려올 때 있었던 일이다. 계단이 좁아 한사람씩 내려오고 있는데, 갑자기 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 모른다. 후미에서 내려가던 내가 소리를 질렀다. “가까운 사람하고 손을 잡고 내려가자!” 좁은 계단의 왼쪽은 낭떠러지였다. 내가 최영희와 손을 잡자 앞에 가던 조영남과 윤여정도 손을 잡았다. 송창식은 이미 평지에 내려가 있었다. 세 발짝을 움직였을까. “어머!” 소리와 함께 윤여정이 비명을 지르며 위태롭게 조영남에게 매달렸다. 낭떠러지 쪽을 가던 윤여정 발 밑의 돌이 굴러 떨어진 것이었다. 둘이 한 덩어리가 되어 발이 네 개니까 살았지 혼자서 그 돌을 밟았다면 어찌 되었을까.
평 지에 도착한 다음 누군가가 벌받은 것이라고 놀렸다. 올라가기 전 모두들 불당에 들어가 예불을 드렸다. 주지 스님도 특별히 나오셔서 젊은이들 앞날에 좋은 일 있으라고 기원해주셨는데 유독 윤여정만 들어오지 않고 옆문 밖에 서서 법당 안을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불당의 마루바닥이 몹시 차가워 스님이 독경하는 동안 모두들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덜덜 떨고 있어야 했다. 윤여정은 그것이 싫었던 것 같았다.
“PD야, MC야, 청소부야?”

나는 쎄시봉 활동과 더불어 1964년 여름 TBC TV 선발요원으로 입사했다. 1970년 10월 사직서를 제출할 때까지 많은 프로그램을 맡았다.
‘굳 이브닝쇼’는 명사 초대 토크 프로그램이었고 담당 PD는 임창수씨와 나 두 사람이었다. 주말은 쉬는 주5일 평일 프로였는데 임창수씨가 자기는 연출할테니까 당신은 MC를 하라고 지시해왔다. 그는 나보다 다섯 살 정도 연장자였다. 시간은 20분, 앞뒤에 가수의 노래가 붙으니 시그널 시간, 광고시간 제하면 손님과 얘기할 시간은 10분 정도였다. 첫 손님은 이방자 여사였고 미8군 부사령관, 김현옥 서울시장, 외국사절들이 출연했다. 살롱 스타일의 토크 프로그램이었다. 이때만 해도 나는 겁도 없이 진행했던 것 같다. 드라마를 연출하던 허규씨의 말에 의하면 MC가 대학생의 말투로 손님을 대한다는 것이었다.
‘힛 게임쇼’는 연예인들과 명사들의 개인 경쟁게임과 직장대항전을 합친 프로그램이었다. 직장응원단이 출연했고 사회는 김동건, 응원단장은 송해·박시명 두 사람이 맡았다. 송해씨는 판정에 불복하면서 심심찮게 김동건 사회자를 박치기로 들이받아 다운시켰다. 그럴 때마다 폭소가 터졌다. 응원단장은 서로 끊임없이 다투다가도 사회자가 “차렷!” 하고 호령만 하면 반드시 그 앞에서 말단졸병이 되어야 했다. 극단의 무질서와 극단의 군기가 공존하는 방식이었다.
어 느 해이던가 연말 특집에서 MC가 금년의 국내 톱뉴스로 무엇을 꼽겠는가하고 묻자 정광모씨가 지체없이 대답했다. “그야 물론 ‘한비(한국비료) 사건’이죠”. 스튜디오 안의 모든 사람이 다 웃었다. 다음날, 화장실에서 김규 상무와 마주쳤다. 그는 대뜸 “왜 그런 질문을 시켜?” 하고 말했다. 삼성 본부에서 질책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하 루는 게임중에 물통이 넘어져 스튜디오 바닥이 물바다가 됐다. 빨리 누군가 물을 닦아야 했다. 밤 시간의 생방송이라 세트 담당자가 없었다. 자루 달린 물걸레를 구석에서 가져와 내가 바닥을 닦아냈다. 그것이 그대로 방송이 되었고, 어린 조카가 제 아빠에게 “삼촌이 높은 사람인 줄 알았는데, 방송국 청소부야?”하고 물었다고 한다.
‘그림에 노래 싣고’. 피세영이 여자 아나운서와 함께 DJ를 맡고 만화가 신동우씨와 나는 이젤에 스케치북을 올려놓고 음악이 나가는 동안 즉흥그림과 즉흥낙서를 했다. 1년 정도를 계속했는데 언제나 글보다 그림이 좋았다.
‘쇼 파노라마’. 야외녹화가 많았다. 어느 날 정릉 근처 한 수영장에서 녹화를 하는데 MC가 펑크를 냈다. 내가 대타로 들어갔다. 그 날 밤 ‘굳 이브닝쇼’, 심야에 ‘그림에 노래 싣고’까지 하루에 세 번 카메라 앞에 서게 됐다. 지금 같으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그 때는 방송일이라면 무엇이든 가리지 않았다. 플로어 매니저(진행감독), 연출, 대본, 구성, 출연자 섭외, MC, 때로는 부족한 영어로 통역도 했다.
‘골 든벨쇼’. 신곡을 낸 가수들을 무대 뒤에 세워놓고 레코드를 틀었다. 심사위원들이 한 줄로 앉아 의견을 말하고 앞에 놓인 종을 쳤다. 다섯 번이 울리면 만점이었다. 아마추어 심사위원까지 포함해 네 사람이었으니 만점을 받으려면 종이 스무 번 울려야 했는데 전원 만점의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다. 정훈희의 데뷔곡 ‘안개’였다.
조영남의 엽기코믹쇼
‘아 베끄 노래자랑’. 서영춘씨가 사회를 맡았다. 남녀가 혼성팀으로 출연하는 노래경연 프로그램이었는데 항상 출연자가 부족해 길에 나가 행인들을 잡고 애원해야 했다. 어느날 게스트 가수가 펑크를 냈다. 마침 방송국에 찾아온 조영남을 밀어넣었다. 당시 한양대 음대를 장학생으로 다니던 조영남은 출연 후 학교에서 봉변을 당했다. 교수와 학생들이 일제히 비난했던 모양이었다. 조영남은 곧 서울대 음대로 편입했다.
다 람쥐 쳇바퀴 돌 듯 이리저리 뛰는 사이에 훌쩍 5년의 시간이 흘렀다. 아침 일찍 출근해 맡은 일이 끝나면 쎄시봉으로 달려갔다. 기본적으로 방송 일이 우선이었지만 쎄시봉엔 방송보다 중요한 것이 있었다. 싱싱함과 자유로움. 그곳에는 싹을 자라게 하는 기운이 있었다. 누구도 남의 눈치를 보지 않았다. 아무도 잘난 척하거나 못난 척할 수가 없었다. 통기타 1세대들은 그렇게 자생했다. 그들은 쎄시봉을 거쳐 명동 ‘OB’s 캐빈’으로 갔고 다시 방송으로 진입했다.
조 영남이 부른 ‘딜라일라’가 라디오에서 히트했다. 그는 이어 단 한번의 출연으로 시청자를 경악하게 만들었다. 노래의 내용은 변심한 애인이 불꺼진 창안에서 딴 남자와 하나 되는 것을 보고 밖에서 개탄하는 것이었다. 조영남은 TV에서 그 장면을 직접 설정하고 연기했다. 웃통을 벗고, 머리띠 하고, 부엌칼을 치켜들고 침대 쪽으로 다가가며 이렇게 노래 불렀다.
“오 나의 딜라일라 / 왜 날 버리나요 / 애타는 이 가슴 달랠 길 없어 / 복수에 불타는 마음만 가득하네”
납 량특집 프로그램에서는 해변에서 노래하던 그가 물 속으로 들어가 잠수해버린 일도 있었다. 립 싱크였기 때문에 노래는 계속 나가는데 가수는 물 속에서 나오지 않는 어처구니없는 장면이었다. 그런 조영남은 1967년 서울시에서 수여하는 ‘서울시 문화대상’을 탔다.
조영남에 이어 트윈 폴리오가 공전의 히트곡을 내놓았다. ‘하얀 손수건’. 번안곡이었지만 우리말 창작곡으로 생각될 만큼 잘 불렀다. 통기타 음악을 모든 세대가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이다.
한대수, 그의 인생과 노래
그리고 이듬해 한대수가 미국에서 돌아왔다. KBS 레코드실에 근무하던 정은영씨가 한대수를 내게 소개했다. 연대 창설자 집안의 손자고 사진작가이며 미국에서 영시도 발표한 적이 있다는 그가 노래도 잘하니 TV에 세워보라는 것이었다.
장발에 동안이었고 그때 나이가 만 20세. 살짝 경상도 사투리를 썼는데 목소리가 뚜렷했다. 김동건씨가 사회를 보던 ‘명랑백화점’에서 자작 노래를 불렀다.
“장막을 걷어라 / 나의 좁은 눈으로 이 세상을 더 보자 / 창문을 열어라 / 춤추는 산들바람을 한번 또 느껴보자…”
그 의 소리는 여리면서도 카랑카랑했다. 어떻게 들으면 공기를 곧장 찌르는 목소리 같을 때도 있었다. 미국에서 막 돌아온 스무 살 청년이 ‘자신이 만든 노래’를 ‘자신의 소리’로 부른 것이었다. 차림새는 거의 히피에 가까웠고 남의 눈 의식하지 않고 노래를 불러서 듣는 사람은 그저 아연해질 수밖에 없었다. 반말, 명령조의 가사를 외치는 소리로 노래했다.
사 람들은 모르고 있었지만 그는 아주 힘든 역경을 거치며 삶을 이어오다가 그 날 그 자리에 선 것이었다. 한 살 때 부친이 미국으로 유학 가 연락이 끊긴 후 어머니는 기다리다 지쳐 재혼해 집을 나갔다. 이후 할아버지 집에 살다 중학생 시절 미국에 단신으로 건너가 힘들게 아버지와 상봉했지만 아버지는 이미 어떤 백인여성과 결혼해 자식을 둔 ‘남’이었다. 그 집에 오래 머물 수 없었던 그는 고학으로 대학을 다니다가 돌아와 고국의 TV에 출연해 노래를 부른 것이었다.
한 대수의 반향은 컸다. 2주일 후쯤 다시 출연시키려는데 제작국장이 브레이크를 걸었다. 장발은 안 된다는 것이 이유였다. 할 수 없이 그에게 사정을 설명했고 그는 어이가 없다는 듯 나를 쳐다보며 “아니 어떻게 이백천씨가 그런 말을…”하며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그렇게 설명하는 나도 장발이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그는 머리를 빡빡 밀고 출연했다. 그리고는 TV를 아주 떠나버렸다 . 그러나 그 해 말 그와 나는 무대에 같이 섰다. 남산 드라마센타에서 ‘한대수 리사이틀’을 기획한 것이다. 입추의 여지없이 청중이 몰려들었다. ‘행복의 나라’ ‘옥의 슬픔’ ‘과부타령’ ‘마지막 꿈’ ‘여치의 죽음’ 등 창작곡만을 연주하고 불렀다. 특이한 공연이었다. 같이 박수 치고 흥겨워하며 듣는 노래가 아니었다. 청중은 한 소절 한 소절을 음미하며 들어야 했다.
한 대수의 공연에 이어 트윈 폴리오의 은퇴 공연이 같은 장소에서 열렸다. 윤형주의 학업문제가 원인이었기 때문에 은퇴라기보다는 해체였던 셈이다. 단 한 장의 음반을 냈을 뿐이지만 ‘축제의 밤’ ‘하얀 손수건’ ‘에델바이스’ ‘낙엽’ ‘슬픈 운명’ ‘웨딩케이크’ ‘사랑의 기쁨’ 등 거의 전곡이 사랑을 받았다. 이틀에 걸친 공연에 남성은 억지로 찾아서 한두 명이었을까, 거의가 여대생 여고생이었다.
‘청개구리집’ 아이들
미 국에서 우드스탁 페스티벌이 열린 1969년 8월에 우리나라에서는 MBC TV가 개국했고 다음해 청평 안전유원지에서는 기독교방송 주관으로 3일간의 포크 페스티벌이 개최되었다. 통기타 1세대들과 신중현, 히식스, 키보이스 등 한국의 내로라하는 그룹사운드까지 참가한, 당시로서는 큰 규모의 행사였다. 수중에 무대가 설치되고 낮부터 밤늦게까지 공연이 계속됐는데 출연자들은 배를 타고 무대에 올라야 했다. 밤에는 드럼통에 장작을 태워 무대주변을 밝혔다. 별도보고 흐르는 물에 비치는 불빛도 있는 정취 있는 페스티벌이었다.
그 행사가 끝나고 며칠 지나서 충무로 YWCA에서 연락이 왔다. 젊은이들을 위한 노래광장을 열자는 것이었다. 명동 YWCA 안뜰 구석에 큰 버드나무 그늘 아래 단층 건물이 있었다. 물가에 서있는 것이 어울리는 버드나무에서 착안해 ‘청개구리집’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했다. 내 이름이 흰개울(白川)인 것과 내가 그 일을 맡은 것은 우연이 아니었을 것이다.
흔 쾌히 승낙하고 매주 수요일 밤 쎄시봉에서 사용하던 ‘데이트 위드 쁘띠 리’의 이름을 다시 내걸며 시작했다. 바닥엔 푸른 카펫을 깔고 입장하는 사람은 모두 신발을 벗게 했다. 메뉴는 단 한가지 콜라뿐. 셀프서비스 콜라 한잔 값으로 99원을 받고 저녁 7시에 개장했다.
청 개구리집에 한 사람 두 사람씩 나타난 이름들이 화려하다. 서유석, 김민기, 양희은, 방의경, 김도향, 손창철, 은희, 한민, 최안순, 김영세. 여기에 가끔씩 찾아와 어울리던 김세환과 왕년 자니브라더스 멤버이자 현재도 재즈 가수로 활동중인 김준. 김도향과 손창철은 후에 투코리안스를 결성했고 김민기와 김영세는 잠시 ‘도비두’라는 듀엣을 결성해 활동했다.
카 펫만 깔았을 뿐 청개구리집엔 별다른 시설이 없었다. 의자도 테이블도 음향, 조명시설도, 심지어 방석도 없었다. 창고에 카펫만 깔아놓은 모습이었다. 만원이 되면 100명 정도였을까. 콜라를 마시며 잡담하듯이 대화를 하는 것이 시작이었고 아직 손님이 몇 명 되지 않는 상태에서도 기타 치고 노래하는 친구들이 한두 명 있게 마련이었다. 마이크가 없으니 자연스럽게 기타 주위로 모인다.
“장난감을 갖고서 그것을 바라보고 얼싸안고 기어이 부셔버리는 / 내일이면 벌써 그를 준 사람조차 잊어버리는 아이처럼 / 오- 아름다운 나의 사람아” (헤르만 헤세의 시, 서유석 곡 : 아름다운 사람)
“학교 앞에 책방은 하나 대포집은 열 / 학교 앞에 책방은 하나 양장점은 열”(파란 많은 세상)
‘아름다운 사람’ ‘파란 많은 세상’을 부른 서유석은 유난히 바다나 산을 좋아해 친구들과 몰려다녔는데 그렇게 여행을 다녀올 때면 자신의 소리에 해조음(海潮音)이나 심산의 솔나무 냄새를 묻혀온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마이크 깨지니 멀리서 불러달라”
김 도향, 손창철은 육군에서 막 제대한 부대 친구였다. 둘 다 성량이 대단했다. 그들은 톰 존스의 ‘키프 온 러닝’ ‘아이 캔트 스탑 러빙유’ 같은 곡을 잘 불렀다. 방안을 쩌렁쩌렁 울리는 소리였다. 그리고 투코리안스의 대표곡 ‘벽오동’을 그곳에서 처음 들었다. G 마이너 하나의 코드로만 진행되는 우리 가락이었다.
“벽오동 심은 뜻은 봉황을 보잣더니 / 어이타 봉-황은 꿈이었다 안 오시뇨” (황진이의 시를 기초로 김도향 작사, 김도향 작곡)
거 의 천지개벽하는 소리였다. 나는 어느날 광화문 지하도를 걷다가 ‘투코리안스’라는 듀엣 이름을 생각해냈다. 그리고 방송에 그들을 소개하기 위해 청개구리집에서 그들의 노래를 테이프에 녹음하고는 그것을 들고 방송 PD들을 찾아 나서게 했다. 1970년 8월이었다. 9월부터 방송출연을 시작한 투코리안스는 한 달간 60여 회의 방송출연을 하게된다. 그들을 안 부른 쇼프로가 없었다. 패티김쇼, 최희준쇼, 쇼쇼쇼, 그랜드쇼…. 물론 그들이 내세운 곡은 ‘벽오동’이었다. 우렁찬 성량 때문에 방송국 오디오 담당자가 마이크 깨진다고 멀리 떨어져서 불러달라고 했던 것이 기억난다.
김도향, 양희은, 방의경, 은희…
양 희은은 경기여고 졸업 후 재수하던 때에 청개구리집에 나타났다. 긴 머리에 청바지 차림이었지만 선머슴아였다. 그녀는 맑고 힘있는 소리를 가지고 있었다. 주디 콜린스의 ‘퍼프’를 잘 불렀고 ‘일곱 송이 수선화’ ‘세노야’ ‘검은 장갑 낀 손’도 불렀다. 당시 미국에서는 존 바에즈가 인기였지만 양희은의 소리는 존 바에즈보다 훨씬 고왔고 노래에 신념이 느껴졌다.
“세노야 / 산과 바다에 우리가 살고…”
세 노야를 부르던 모습은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에 남아 있다. 양희은은 서유석, 김민기, 임문일을 형이라고 부르며 따랐다. 하루는 그녀가 청개구리집에서 자신의 리사이틀을 하겠다고 나섰다. ‘형’들이 도와주었다. 공연하는 날, 경기여고 동창생들이 몰려와 대성황이었다. 공연이 끝나자 그녀는 내게 물었다.
“어땠어요?”
그런데 나의 대답은 그녀가 기다렸던 것이 아니었다.
“너무 흥분한거 아냐? 좀 들떠 보였어.”
그 러자 “나 노래 안 해! 다신 노래 안 해!” 하면서 울음을 터트렸다. 그 바람에 주위 사람들이 그녀를 달래느라고 애를 썼다. 그 날 나는 겨우 열아홉 살의 그녀에게 매몰차게 얘기한 것을 두고두고 후회하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 못하고 있었다.
방의경이라는 이대 미대 학생도 단골중의 한 사람이었다. 둥근 얼굴에 조용한 미소, 따뜻한 마음이 느껴지는 여린 소리. 그녀는 외국곡의 가사를 우리말로 번안하는 일에 빼어난 솜씨를 가지고 있었다.
“꽃잎 끝에 달려 있는 작은 이슬 방울들 / 무엇이 이 숲속에서 으음 이들을 데려갈까…”(메일 해밀턴의 노래에 방의경 작사: 아름다운 것들)
방의경은 ‘불나무’라는 곡도 남겼다.
“오, 그대는 아는가 불꽃송이여 / 무엇이 내게…”
짧은 활동 기간이었지만 가사와 곡으로 족적을 남긴 그녀가 우리 곁을 떠난 것은 아쉬운 일이었다.
‘사 랑해 당신을’은 라나에로스포의 노래로 알려졌지만 처음에는 은희가 혼자 부르던 노래였다. 어느 대학생이 애인을 떠나보내고 술집에서 한숨에 가사를 적었다는 곡이었다. 눈이 크고 아리따운 소녀 은희. 그런 그녀의 소리에는 물러서지 않는 제주도 특유의 강한 기가 숨어 있었다.
“사랑해 당신을 / 정말로 사랑해…”
그녀는 청개구리집에서 한민을 만나 듀엣을 만들었다. 그리고 하루아침에 신데렐라가 되었다. ‘꽃반지 끼고’도 청개구리집에서 부르던 노래였다.
최안순은 원래 한민의 파트너였다. 청개구리 집에 가끔 왔는데 ‘산까치’를 불렀다. 조용하고 내성적인 그녀는 사람들 사이에 앉아 있을 때도 옆 사람과 얘기하는 일이 드물었다.
“산까치야 산까치야 어디로 날아가니 / 네가 울면 우리 님이 오신다는데 / 너마저 울다 저산 넘어 날아가면 / 우리 님은 언제 오나 / 너라도 내 곁에 있어다오”
그녀가 노래를 부르면 청개구리집 옆에 서 있는 버드나무에 까치가 날아올 것만 같았다.
김민기가 ‘친구’를 만든 날
김 민기는 서울대 미대 회화과 1학년이었다. 서유석의 말에 의하면 김민기는 맨발에 고무신을 신고 러닝 셔츠 차림으로 나타났다고 한다. 명동길에서 마주치면 구두닦이로 오해받을 만한 모습이었다는 것이다. 내 기억에는 실내에서 본 그의 인상만 남아있다. 두 무릎을 세우고 그 위에 턱을 고이고 있던 그의 특이한 자세, 점잖게 눈으로 웃으며 다른 사람의 노래를 들어주던 표정. 처음에는 혼자가 아니고 친구 김영세와 ‘도비두(도깨비 두 마리)’라는 듀엣이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파트너는 물러나고 김민기 혼자 노래를 했다. 보브 딜런의 노래들을 주로 불렀는데 중저음의 음색과 기타 솜씨가 예사롭지 않았다. 미국 음악이 부럽지 않다고 느낄 정도였다.
어느 날, 노래 사이에 이야기를 섞어가며 진행을 하는데 가까이 있던 누군가가 이렇게 중얼거렸다.
“제기랄, 영어 안 쓰면 말못하나?”
돌 아보니 김민기였다. 그때 김민기의 나이 스물, 나는 서른일곱. 영어 좀 안다고 자랑삼아 영어를 사용하지는 않았다. 자연스럽게 몇 마디가 들어갔을 것이다. 얼굴이 확 달아오르는 것을 겨우 누르고 넘어갔다. 다음 주였다. 김민기가 노래를 했다. ‘Don’t think twice, it’s alright’라는 보브 딜런의 곡이었다. 아주 잘 부른 노래였다. 내가 한마디했다. “영어 노래말고 뭐 우리말 노래 없을까?”
2주일 정도 지난 후 김민기가 다시 와서 노래를 했다.

“검 푸른 바닷가에 비가 내리면 / 어디가 하늘이고 어디가 뭍이요 / 그 깊은 바다 속에 고요히 잠기면 / 무엇이 산 것이고 무엇이 죽었오 / 눈앞에 떠오르는 친구의 모습 / 흩날리는 꽃잎위에 어른거리오 / 저멀리 들리는 친구의 음성 / 달리는 기차바퀴가 대답하려나”
물가에 친구들과 놀러갔는데 한 친구가 익사를 했단다. 그 일로 만든 노래라고 했다. 뱃속에서 감돌다가 나온 것만 같은 낮은 음성의 노래였다.
그는 청개구리집에서 ‘세노야’도 부르고 ‘아침이슬’도 불렀다. ‘아침이슬’은 김민기가 먼저 불렀지만 ‘친구’보다 박수가 적었다. 그 후 이 곡은 양희은이 불러 세상에 알려졌다
이연실에서 전인권까지… 노래를 위해 삶을 벗다
CM송 열풍부터 청바지 문화의 풍미, 대마초 파동까지.
1970년대를 규정짓는 문화 코드들의 감춰진 이면.
가창력보다 춤·외모가 더 중시되는 요즘 그래도 노래한다. 그 노래에 혼을 쏟는다

달 이 제7궁에 있고 주피터와 마르스가 일직선에 설 때 / 평화는 행성들을 다스리며 사랑은 운명을 돌려놓으리 / 어쿠웨리어스 기(Age of Aquarius)의 동이 트네 / 어쿠웨리어스 어쿠웨리어스 // 화합과 양해 호감과 믿음이 넘쳐나고 / 허위와 비웃음은 이제 없을 것이네 / 모처럼의 삶은 참된 미래를 꿈꾸고// 수정점(水晶占)의 신비한 계시(啓示) 따라 / 마음의 참된 해방 맞으리…’(Fifth Dimension의 1969년작 ‘Age of Aquarius’ 中)
1970 년대로 접어들 무렵. 미국의 젊은이들은 예전의 그들이 아니었다. 장발에, 맨발에, 청바지, 미니스커트, 통기타. 히피들이 집단을 이루어 도시를 누비고, 전원을 찾고, 기존 체제에 반발했다. 월남전 반대와 마약. 그들이 내세운 모토는 화합, 양해, 호감, 그리고 믿음이었다. 감성적이고 반항적인 물병자리(Aquarius)의 물결은 높고 위태롭고 사납기까지 했다. 그 물결은 미국을 넘어 세계를 훑었고 그 여파가 서울에서도 뚜렷이 감지될 정도였다.
어쿠웨리어스 기의 특징은 “천재냐 광기냐”로 표현되기도 했다. 당시 세계 국가원수들의 모임에서 동서를 막론하고 공통의 풀리지 않는 고민이 있었는데 그것은 “젊은이들을 어떻게 대할 것이냐”였다고 한다.
4·19 혁명을 뒤집고 집권한 5·16 주체에 대해 1970년대 젊은이들은 크게 반발했다. 대학에는 정보원과 군대가 배치됐고, 애국가와 최루탄이 한 공간에서 엇갈리며 뒤섞였다. 공연윤리위원회는 금지곡을 양산했고, TV 쇼에서조차 집단으로 흔들고 뛰는 동작을 자제해야 했다.
1970 년 TBC에 사표를 내고 프리랜서가 됐다. 그리 마음먹은 것은 ‘전문가’보다 ‘스페셜리스트’가 되는 것이 나의 앞날에 도움이 되리라는 나름의 예측 때문이었다. 1970년대에 들어섰을 때 내 나이는 37세. 이제 곧 40세가 될 터인데 그때 가 타의로 직장을 그만둬야 하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이 있었다. 아무리 방송국이 좋은 직장일지라도 계급이 올라갈수록 윗분들의 눈치를 더 봐야 할테고, 그래서 ‘내 생각대로’ 일을 할 수 없게 된다면…. 그것은 안 될 일이었다. 적어도 50세까지는 닥치는 대로 일을 하며 기초를 넓게 닦자. 무슨 일이 닥쳐올지 모르지만 그게 어떤 일이라도 내게 맡겨지면 번듯하게 해치울 수 있는 스페셜리스트가 돼야 하지 않겠나. 내가 선택한 스페셜리스트의 길이란 다른 것이 아니었다. ‘젊음과 음악과 라이브 현장’에 파고들어가는 것이었다.
청담스님의 별난 청아성
프 리랜서가 돼 KBS TV와 MBC TV에서 각각 5분쇼와 미니스테이지의 사회를 맡아 하던 때의 얘기다. 당시 나는 청개구리집(YWCA가 운영한 청년마당)의 수요일 담당이었는데 마침 방송일이라, YWCA의 한 여성간사에게 프로그램 앞 부분인 청담스님 소개를 부탁한 뒤 자리를 떴다. 허겁지겁 방송을 끝내고 돌아와보니 이게 웬일인가. 아수라장이었다. 오자미(팥주머니) 놀이를 하는 남녀, 엎드려 팔씨름하는 사람들, 응원하는 친구들…. 한쪽에선 어떤 녀석이 제법 신이 나 기타를 치며 노래를 하고 있었다. 반쯤 팔베개하고 누워 그 노래를 들어주는 쪽도 있고 벽에 기대 앉아 허공을 보는 친구도 있었다.
와글와글 바글바글. 초 등학교 교단 높이의 마루에 걸터앉은 청담스님 바로 앞에는 네댓 명의 스님이 다가앉아 있었고, 한쪽 구석에는 시종스님이 법장을 높게 세워든 채 가부좌를 틀고 있었다. 그 옆에 자리한 여성간사에게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으니, 처음에는 학생들이 듣는 척하다가 천천히 분위기가 바뀌면서 이런 지경이 됐다 했다. 시종스님 역시 법장을 안고 조는지 알아보는 기척이 없었다.
청 담스님 앞에 나도 바싹 다가앉아 귀를 기울였다. 말을 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오물오물 억양도 있었다. 그러나 그 음성은 자음이나 모음을 식별할 수 없을 정도로 낮았다.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입 속에서 삭히고 있었다. 경문일까 주문일까. 어두운 조명 탓인지 회색 법의 때문인지 내가 본 것은 청동상(靑銅像)이었다. 아수라장 속에 어떤 따스함이 느껴지는 부동의 조용한 청동상.
시종스님에게 다가가 흔들어 깨운 후 의향을 물었다.
“스님께 시간이 다 되었다고 말씀 드려도 될까요?”
“네 괜찮습니다.”
다시 청담스님에게 가 뚜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스님. 고맙습니다. 긴 시간 같이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실내가 주춤하더니 조용해졌다. 모두의 시선이 스님께로 집중됐다.
“벌써 시간이 다 됐어?”
청개구리들에게 클로징 멘트를 했다.
“스님께서 이제 자리를 뜨십니다. 다들 일어나서 박수로 환송해주십시오.”
잠이 완전히 깬 시종스님이 벌떡 일어나 법장을 받들고 앞장섰고, 청담스님을 부축하듯 여성간사가 뒤따랐다.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면서 세 분이 시야에서 벗어났다. 나의 잔소리가 없을 수 없었다.
“이 다음 여러분이 어른이 되어 청담스님처럼 요청을 받아 젊은이들 앞에 섰을 때, 오늘 같은 일이 벌어진다면 그때 여러분은 어떻게 할 것인가?”
막 열을 올리려는데 만면에 희색이 가득한 간사가 달리듯 돌아와 숨찬 소리로 소식을 전했다. 청담스님은 “오늘처럼 재미있고 즐거운 적이 일찍이 없었다”며 “젊은이들과 더 어울리다 가면 안 되겠느냐, 가고 싶지 않다”고 하는 것을 시종스님이 겨우겨우 차로 모셨다고 했다. 마지막 떠나는 차 속에서도 “꼭 잊지 말고 또 불러야 해” 하고 당부했다는 것이다.
청 개구리집. 1970년대 청년문화의 주역인 김민기, 양희은, 서유석, 투코리안스, 라나에로스포, 방의경, 최안순 등을 배출한 젊은이의 안방. 누구도 허세를 부리지 않았고 체면 세우려 하지 않았으며 서로를 믿었기에 서로에게 관대할 수 있었던 명동 한복판의 청개구리집. 그 날 어쩌면 청담스님도 그 분위기가 좋아 속으로 스님 나름의 가락을 뽑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좌절된 ‘학원 십자군’
내 가 프리랜서가 되었을 때 대학 동기이자 TBC의 상무였던 김규는 이미 회사를 떠나 퇴계로에 ‘선진문화’라는 광고기획사를 차리고 있었다. 동아제약 강신호 사장, 후라이보이 곽규석, 작곡가 길옥윤, 화가 박영일 씨 등이 주주였다. 방을 하나 그냥 내주면서 무엇이든 하라기에 통기타 1세대들, 그러니까 쎄시봉과 청개구리집 멤버들에게 알려 찾아오게 했다. 조영남 송창식 윤형주 이장희, 코코브라더스의 박상규 장영기, 투코리안스의 김도향 손창철, 김민기 임문일 방의경 등.
누 가 먼저 얘기를 꺼냈는지는 기억이 안 나지만 전국대학 순회공연을 기획하자는 의견이 있었다. ‘캠퍼스 크루세이더스(학원 십자군)’라는 이름까지 붙이고 보니 그럴듯했다. 스폰서도 구해야 하고 사회 저명인사의 격려글도 받아야 했다. 네 분을 미리 정해 찾아 나섰다. 누구보다 먼저 조계종 총무원장실로 청담스님을 찾았다. 한자로 여섯 자를 써주었다.
‘화랑혼(花郞魂) 풍류도(風流道)’
“왜 화랑도가 아니고 화랑혼이냐”고 물었다.
“꽃 지듯 젊은 목숨 아낌없이 바치는 것은 ‘도’가 아니고 ‘혼’이라야 맞지. 초개같이 생명 버릴 마음이 서 있고, 그리고 풍류를 아는 것. 우리나라 사람들은 풍류를 즐길 줄 알아. 절뚝발이 가난뱅이도 지게 지고 산으로 나무하러 갈 때 혼자서 흥얼흥얼 풍월을 읊으며 스스로 즐길 줄 알아. 즐기는 것은 ‘도’야. 젊은이들이 혼을 알고 도를 즐긴다면 그보다 더한 것이 어디 있겠나.”
TBC 때부터 얘기 손님으로 종종 모셨던 중앙중학 동창 오병열군의 아버님, 언론계의 대선배, 동서종교철학을 비교 연구하고 강의하던 석천 오종식 선생을 프레스센터로 찾아갔다. 이번에는 한자로 여덟 자였다.
‘師心 使氣(사심사기) 怡神 養性(이신 양성)’
“자 기 마음이 곧 스승이야. 자기마음보다 좋은 스승은 이 세상에 없어. 기를 쓰라고 해. 우주의 기운은 아무리 써도 줄지 않아. 그 기가 다 제것인데 부러울 게 무엇이겠어. 신에게 몽땅 맡기고 의지해. ‘소원하는 모든 것 이루어주셔서 고맙습니다’라고 미리 감사하는 거야. 행여 ‘이루어주시면 고맙겠나이다’ 같은 조건부 기도는 하지 마. 그런 기도 안 받아주셔. 자신이 곧 스승이고, 우주의 기운이 다 내 것이며, 하늘이 내편인데, 그럴 때 사람이라면 무엇을 해야겠어. 살고자 하는 마음을 갖고 있는 자타의 성(性)을 가꾸고 키워내야 하는 것 아니겠어.” 오선생의 설명이었다.
이어 김수환 추기경을 찾았다. 김추기경은 ‘맑은 마음 밝은 사회’라는 글을 한글로 써주었다. 음성이 곱고 밝았다. 그러면서도 쓴 것을 다시 읽을 때, 어딘지 모르게 찌르는 듯한 어조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 머지 두 사람은 해군 군악대 시절 교관인 이교숙 선생과 이대 무용과 육완순 교수였다. 이교숙 선생은 나의 주선으로 ‘동키클럽’이라는 작곡 클래스를 열어, 신중현 씨를 비롯 여러 대중음악 작곡가들에게 현대 화성악과 작곡법을 지도한 사람이다. 그 제자 중 민들레악단 출신의 세 사람, 그러니까 김형찬 맹원식 이덕재가 3년 연속 문화공보부 장관이 주는 음악상을 탔다. 김도향과 최희준, 펄씨스터스의 언니로 광고음악을 하던 김복순씨도 한때 ‘동키클럽’ 멤버였다. 이교숙 선생은 ‘축발전(祝發展)’이라는 세 글자를 써주었다.
마 지막으로 육완순 교수에게 전화를 했다. 당시 육교수는 이대 무용과 학생들을 중심으로 뮤지컬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를 무대에 올려 장안의 화제를 모은 주목의 대상이었다. 캠퍼스 크루세이더스 발족에 뺄 수 없는 것이 젊은이들의 신체적 동작의 아름다움이라는 생각에서 그를 지목한 것이었다.
그 러나 육교수는 “나 그런 것 관심 없어요”라고 똑부러지게 말했다. 대학교수가 젊은 ‘딴따라’와 어울리는 것은 당시로선 금기였다. 천재냐 광기냐. 장발에 어쩌면 마약에 젖어 있을 수도 있는 일부 젊은이들을 가까이 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으리라.
글 은 다 받았으니 다음에 할 일은 스폰서 구하기였다. ‘코카콜라’ 본사를 지목했다. 거기서는 광고대행업체에 알아보라 했다. 전용버스와 운전기사, 기본적 음향장비에 야간공연에 대비한 조명기구만 있으면 우리는 전국 대학을 누비며 대학 내 ‘스타’들과 함께, 식물적(植物的)이 아닌 생동하는 젊음의 축제를 열 심산이었다. 대행업체의 대답은 “내년에나 가서 보자”였다. 결국 야심 찬 계획은 시작도 하기 전에 무산되고 말았다.
음악감상실 ‘르 시랑스’

1971 년 가을 YWCA는 청개구리집에서의 일년 봉사에 대한 감사패와 선물(양복 옷감 한 벌분)을 주었다. 이어 청개구리집은 문을 닫았다. 청개구리들 갈 곳이 마땅치 않았다. 그러나 바로 길이 열렸다. 군악대 동기인 이문용에게서 전갈이 왔다. 빈 공간이 있는데 음악감상실을 하지 않겠냐는 것이었다. 충무로 태극당 앞 삼익피아노 지하실이었다. 이미 바닥에 카펫이 깔려 있고 의자며 탁자들까지 준비돼 있었다. 입구 쪽에는 DJ룸도 있었다. 의자와 탁자를 반쯤 들어내니 중앙에 제법 큰 공간을 마련할 수 있었다. 가운데에 육각으로 된 탁자 겸 의자를 놓았다. 라이브 음악에 대비한 것이었다. 그 앞에 마이크 하나만 놓으면 통기타 가수들이 노래하기에 충분했다. 손님들은 신을 벗고 입실했다.
안쪽 벽면이 제법 컸는데 어떻게 꾸밀까 궁리하다가 평소 가까이 지내던 판화가 배융씨에게 의뢰했다. 배융씨는 검은 우주 그림에 붉은 태양을 두 개 그려 넣었다. 하나는 목성(주피터)이고 또 하나는 화성(마르스)인 셈이었다.
감 상실 이름은 ‘르 시랑스(Le Silence)’로 정했다. 정숙(靜肅)의 의미다. 소리가 있기 전의 정숙, 소리가 있고 난 다음의 정숙. 어차피 소리는 무에서 나와 무로 돌아가는 것. 소리를 듣는다는 것은 정적(靜寂)을 듣는 것이었다.
르 시랑스의 음악은 그러나 조금은 시끄러운 록 사운드가 주류였다. 피프드 디멘션의 ‘Aquarius’, 엘튼 존의 ‘Crocodile Rock’, 아메리카의 ‘A horse with no name’, 스테판 울프의 ‘Born to be wild’. 부드러운 곡들도 있었다. 사이먼 앤드 가펑클의 ‘Bridge over troubled water’, 비틀스의 ‘Let it be’, 로버타 플랙의 ‘Killing me softly with his song’ ‘The first time ever I saw your face’….
외 국음반 수입이 금지되던 때라 대부분의 음반이 해적판이었다. 하지만 듣는 데 지장은 없었다. 르 시랑스의 안식구는 다섯 사람. 막 군에서 제대한 실험극단의 구자흥(현 의정부 예술의전당 관장)과 중부경찰서에서 형사로 25년 근무 후 정년퇴직한 이선생, 나, 그리고 디스크 룸을 맡겠다고 자원하고 나선 록음악 마니아 두 사람이 있었다.
‘백색 마녀’ 이연실
르 시랑스는 레코드 음악이 있고 라이브 노래가 있고 개그꾼들의 재치도 펼쳐지는 곳이었다. 새 목소리들이 나타났다. 이동원, 양병집, 이연실, 최성원(들국화), 이주원(‘내 님의 사랑은’), 윤석화, 채은옥, 어니언스(임창제 이수영), 김정호, 현경과 영애, 여고를 갓 졸업한 김인순…. 어떤 때는 그룹사운드까지 등장했다. 아직 무명 시절이던 조용필의 ‘킴스 트리오’, 서울대생으로 구성된 록그룹 ‘스푸키즈’ 등이 있었다.
개 그맨들도 빼놓을 수 없다. 뽀빠이 이상용, 연대 응원단장에 엘비스 프레슬리 풍으로 노래도 하던 임성훈, 꽃만두 박성원(‘스푸키스’의 사회도 맡았다), 천의무봉에 좌충우돌하던 고영수, 허원, 송영길, ‘꿀딴지’ 멤버였던 최미나(허정무 감독 부인), 그리고 후에 ‘독도는 우리땅’을 발표한 ‘한심이 시리즈’의 정광태. 이 중 이연실은 현재 연락두절이고 김인순과 꽃만두 박성원은 세상을 떴다.
어 느날 이연실이 흰 의상에 눈썹까지도 완전 백색인 채 입술만 진홍빛으로 화장하고 와서는 노래를 하겠다고 했다. 백색의 공포였다. 석고상이 노래하는 것처럼 보였다. 전라도 군산 출신, 홍익대 미대생. 그녀는 기타를 치면서 노래를 했다.
‘엄 마에 가는 길에 하얀 찔레꽃 / 찔레꽃 하얀 잎은 맛도 좋지 / 배고픈날 하나씩 따먹었다오 / 엄마 엄마 부르며 따먹었다오 // 밤 깊어 까만데 엄마 혼자서 / 하얀 발목 아프게 내게 오시네 / 밤마다 꾸는 꿈은 하얀 엄마 꿈 / 산등성이 너머로 내려오시네 // 가을밤 외로운 밤 벌레 우는밤 / 초가집 뒷산길 어두워질 때 / 엄마 품이 그리워 눈물나오면 / 마루 끝에 나와앉아 별만 셉니다’(‘찔레꽃’;이연실 작사, 박태준 작곡)
그것은 듣는 사람의 원초감각을 되살려내는 소리였다. 아니 그 소리는 이승과 저승을 이어주는 소리였다.
이 연실은 사람 앞에 나서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아니, 함부로 다가서게 하지도 않았다. 그녀의 성정(性情)은 수줍음을 타면서도 직선적이었다. ‘새색시 시집가네’ ‘조용한 여자’ ‘타박네’ ‘소낙비’ ‘목로주점’ 등이 그녀가 부른 노래다.
‘꽃만두’ 박성원의 자살
박 성원은 자살을 했다. 죽은 후 내 꿈에 와서 이렇게 말했다. “선배님, 놀라셨죠. 장난삼아 해본 건데 그렇게 됐어요.” 그는 ‘스푸키즈’의 리더였던 김영민의 꿈에 와서도 똑같은 말을 했다 한다. 그의 유골은 미아리 언덕빼기 어느 절에 봉안되었다.
박성원의 죽음. 그 일단의 책임은 나에게 있다. 그는 거의 매일 르 시랑스에 왔다. 자칭 ‘꽃만두’, 우량아를 넘는 체중이었다. 르 시랑스에선 거의 매일 라이브 코너가 있었고 그가 짬짬이 나와서 한마디 거들면 모두들 박장대소했다.
어 느날 박성원이 자기만의 코너를 갖고 싶다 했다. 안 된다고 할 이유가 없었다. ‘매주 목요일 밤은 꽃만두 박성원 아워’라는 예고 포스터를 입구에 붙였다. 첫날은 손님을 더 받을 수 없을 만큼 만원이었다. 그것은 곧 원맨 개그쇼의 기원이 됐다. 그러나 다음 목요일 제 시간이 됐는데도 박성원이 DJ실에서 밖으로 나오질 않았다. 문을 열고 들여다보니 아주 바닥에 드러누워 있었다.
“선배님, 무서워요. 못하겠어요.”
사연인즉, 실내에 약 20명 정도 손님이 있는데 그들은 모두 단골이라는 것. 이미 3O번도 넘게 자기 개그를 들어 레퍼토리를 거의 외고 있는 이들인데, 어떻게 똑같은 것을 또 반복하느냐는 것이었다. 무리도 아니었다.
하 지만 쇼는 계속해야 한다. 그를 설득했다. 오늘은 시비를 걸어봐. 왜 안 웃는지. 왜 코웃음치는지. 눈에 띄는 대로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부딪쳐봐. 손님도 자기에게 화살이 날아올까봐 긴장할 테고. 소위 재즈연주에서 말하는 애드리브 수법을 권했다. 매일 하는 거지만 여기저기 탈선하면서 진행하면 객석과 무대가 더 달아오를 것이라고 부추기면서….
꽃 만두 박성원이 기지개를 켜면서 DJ실 밖으로 나와 육각형 탁자에 앉았다. 손님이 그를 보는 게 아니라 그가 손님을 보고 있었다. 손님 수는 적었지만 성공이었다. 소문은 곧 퍼져나가 TBC 라디오에서는 그를 스카우트해 ‘꽃만두 박성원 아워’라는 중고생 대상의 스튜디오 라이브 토크쇼를 신설했다. 그야말로 파죽지세였다. 특히 여학생들의 반응은 대단했다. 프로 속에서 그와 눈이 마주치면 “어머” 했고, 다가가면 비명을 질렀고, 말을 붙이면 거의 기절했다. 난리, 난리. 그런 객석이 예전엔 없었다. 무대보다 객석이 늘 압권이었다.
그 런 그가 어느날 자기 방 낮은 문고리에 넥타이를 걸고 앉은 자세로 장난처럼 떠났다. 그야말로 심심풀이로 한 것인데 그리 된 건 아니었을까. 갑자기 얻은 주체할 수 없는 인기는 때로 사람을 우울하게 만든다. 그 두 번째 목요일. 나는 그를 부추기지 말아야 했다. 그를 그냥 그대로 제 발로 일어서게 했어야 했다.
‘보라 동해에 떠오르는 태양…’
르 시랑스 얘기를 하자면 끝이 없다. 손님은 신을 벗고 들어왔는데 손님이 ‘이실직고’하면 대야에 물을 담아 씻게 했다. 자주 대야물을 쓴 것은 김민기와 양병집. 둘은 명동을 걸을 때도, CBS 라디오에 출연할 때도 맨발이었다. 당시 이동원은 고은 선생과 가까웠던 모양이다. 그는 ‘빈센트’를 자주 불렀고 고은 선생은 르 시랑스를 불당 같다고 했다. 군에서 휴가 나온 까까머리 병사들도 있었고 일본항공의 스튜어디스들도 단골이었다.
‘어 니언스’가 오는 날이면 그림자처럼 따라붙는 아가씨가 있었다. 까만 머리, 까만 눈. 조용하고 자그마했다. ‘편지’에 나오는 “말없이 건네주고 달아난 차가운 손”의 바로 그 여자였다. 어느 날이었다. 입구 구석에서 임창제가 “어떻게 하면 좋아요” 하며 작은 체구의 내게 쓰러질 듯 기대었다. 울고 있었다. “딴따라가 싫대요.” 그날 밤 TBC 라디오 프로그램에서도 그는 울먹이며 노래를 잇지 못했다.
그 들의 두 번째 앨범 녹음 때는 나도 스튜디오에 같이 있었다. 가수들이 최종 녹음할 때는 스튜디오에 아무도 들어가지 않는 것이 상례인데 마장동 이청 기사에게 사전에 양해를 구했다. 안건마씨의 편곡으로 그때로서는 드물게 피아노를 사용한 반주곡에 그들의 노래를 입히는 과정이었다. 아직 ‘짜깁기(음악의 어떤 부분을 수정해 끼워 넣는 작업)’가 안 될 때라 중간에서 틀리면 처음부터 다시 불러야 했다. 손을 뻗으면 닿을 만큼 가까이에 내가 섰다. 두 사람은 그날 나를 보며 노래했다. 구절구절 나의 반응을 확인하며.
르 시랑스에서 거의 매일 듣던 곡이라 별로 어렵지 않은 작업이었다. 이 음반에서 여러 곡이 크게 히트했다. ‘사랑의 진실’ ‘작은새’ ‘편지’ ‘잊으리라’ ‘외길’ ‘초저녁별’. 요즘도 간혹 ‘편지’를 듣게 되는데 예전과는 감흥이 다르다. 달아났던 그녀가 결국은 돌아왔기 때문이다.
1972 년 1월 중순, 예총회장 이해랑 선생의 분부라며 길옥윤 선배가 내게 하나의 과제를 주었다. 돌아오는 3·1절 시민회관 축전에 통기타 가수들을 등장시키라는 것이었다. 일간스포츠 정홍택 기자가 기획을 맡고 라이온스 호텔에 방을 잡아 준비 사무실로 썼다. 김민기, 임문일, 송창식, 윤형주, 투코리안스, 방의경 등 핵심부대가 모여들었다. 저녁때가 됐다. 모두들 자장면 먹으러 가자며 자리를 뜨는데 김민기는 속이 안 좋다며 남아 있겠다고 했다. “그럼 우리 갔다 오는 동안에 다같이 부를 곡 가사라도 생각해봐” 하고 나갔다. 돌아오니 김민기가 머뭇머뭇 종잇장 하나를 내게 건넸다. 가사는 그 자리에서 송창식에게 넘겨졌고 삼 일 만에 곡이 완성됐다. 민족선열을 기리는 자리에서, ‘천재냐 광기냐’의 시대를 맞은 이 땅의 젊은이들이 부를 노래였다.
‘보라 동해에 떠오르는 태양 / 누구의 머리 위에 이글거리나 / 피맺힌 투쟁의 흐름 속에 / 고귀한 순결함을 얻은 우리 위에…’(‘내 나라 내 겨레’ 中)
박대통령이 만든 ‘젊음의 행진’
1972 년 늦가을, KBS TV에서 전화가 왔다. 다가오는 새해 특집으로 ‘젊음의 행진’을 예정하고 있으니 준비하라는 것이었다. 르 시랑스의 젊은이들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라고 했다. 주어질 시간은 두 시간. 날짜는 1973년 1월2일 저녁 7시, 담당 PD는 진필홍. AD는 김현숙이었고 의견과 아이디어를 낸 사람은 샹송 해설가로, KBS 심의실에 있던 이진섭 선생이었다. 당시의 KBS로서는 획기적인 일이었다.
두 시간 특집이라면 30명 정도의 출연자가 있어야 했다. 그러나 걱정할 것은 없었다. 늘 가까이서 어울리던 분신들. 트윈폴리오, 조영남, 코코브라더스, 어니언스, 투코리안스, 스푸키즈, 김세환, 이장희, 서유석, 혼혈 여가수 수지, 풋내기 가수 윤석화, 최영희, 박성원, 고영수, 전유성, 정광태에 김민기, 양희은, 양병집, 이연실에 정미조까지 가세했으니 두려울 게 없었다. 그런데 예정일이 다가올수록 방송시간은 줄었다. 두 시간이 한 시간 반으로, 그러다 또 한 시간으로, 결국 최종적으로 배당된 시간은 삼십 분이었다. 누구를 빼고 누구를 넣고를 고민하지 않고 모두 나가기로 했다.
몇 번인가 준비차 신참 AD 김현숙씨가 르 시랑스에 왔고 윤형주, 김민기, 임문일, 나 네 사람이 전략을 짰다. MC는 윤형주와 윤석화로 하고, 모든 출연자는 솔로를 하게 했다. 세트를 오픈해서 서기도 하고 의자에도 앉고 바닥에 털버덕 앉도록도 했다. 일제히 고고를 추다가 스톱 모션에 걸리면 한 사람씩 짧은 외마디를 내지르는 스페셜 컷도 준비했다.
생 방송 당일, 프로그램이 진행되는 동안 내가 할 것은 별로 없었다. 그들은 모두 라이브로 다져진 백전노장이었다. 노래는 반절만 불렀다. 누가 노래하면 나머지는 기타 반주나 박수로 그를 받들었다. 그날 마지막 부분에 내가 한 일이 하나 있었다. 객석 뒤쪽 빈 공간에 있는 A형 사다리에 올라가 가사 적은 종이를 들고 있는 것. 거기에는 김민기가 쓴 ‘내 나라 내 겨레’의 가사가 적혀 있었다.
다 음날 아침 르 시랑스로 전화가 왔다. KBS의 이기하 국장이었다. 조금 떨리는 듯한 음성이었다. 청와대에서 전날 밤 대통령 가족이 프로를 봤고, 방송 후 최창봉 사장에게 전화로 치하의 말이 전해졌다는 것이다. 지금 회의중인데 ‘젊음의 행진’이 정규 프로그램이 되니 서둘러 준비하라는 것이었다. 청바지에 더벅머리, 통기타를 껴안은 젊은이들이 매주 KBS로 밀려들어가기 시작한 것은 그로부터 3주가 지난 1월 하순이었다. ‘캠퍼스 크루세이더스’는 스폰서를 찾지 못했지만 대신 KBS가 전국의 안방에 통기타 1세대들을 세워준 것이었다.
교도소의 저 푸른 하늘

1973 년 3월, KBS는 ‘우리들의 새노래’를 신설했다. PD는 이흥주, 사회는 김상희, 심사는 박용구 박화목 이희목 이백천이었다. 아마추어 작사·작곡의 노래를 프로 가수가 불러 우수곡에 주단위로 상을 주고 연말에 장원을 뽑는, 그러니까 하루아침에 무명 작사·작곡가가 전국에 알려지게 되는 소중한 프로그램이었다.
두 번째 주 예선 통과한 곡 중 ‘견우 직녀’라는 것이 있었다. 이희목씨가 가사를 보고 내가 곡을 봤는데 문제가 생겼다. 작사가, 작곡가가 모두 스튜디오에 나와야 하는데 ‘견우 직녀’는 그럴 수가 없었다. 작사가는 대전교도소, 작곡가는 부산교도소에서 복역중인 장기수였다. 면회는 허가해주겠다는 대전 교도소장의 승낙이 있어 나와 AD 곽명세군은 KBS 대전방송 이달형 국장(고교 동창)의 안내를 받아 교도소를 방문했다. 소장실에서 만난 작사가 김영환씨는 무기수였다.
“그녀가 어디 갔느냐고 물으면 / 저 푸른 하늘을 가리켜주오”
잔 잔한 말씨에 평온한 느낌. 죄를 지을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법무부 내 직원이나 수감자들이 보는 잡지에 글을 올리니 부산의 한 수감자가 곡을 붙이겠다고 해 승낙을 했다는 것이었다. 소장은 그가 아주 마음 착한 모범수이고, 이런 곳에 올 사람이 아니라고 했다. 대담은 짧았다. 먼길 왔으니 점심이나 같이하자고 이달형 국장이 앞장서서 시내 어떤 식당에서 식사를 했다. 그 자리에서 소장에게 물었다.
“교도소 견학이 가능할까요?”
김 영환씨가 가리킨 교도소 안의 ‘저 푸른’ 하늘을 보고 싶었다. 그러나 그 곳에 “저 푸른 하늘”은 없었다. 나는 무색 무음의 진공관 안에 갇힌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가시기 전에 차라도 한잔 하자”는 소장을 따라 다시 소장실에 들어섰다. 정색을 하고 소장에게 난데없는 한마디를 꺼냈다.
“보름이고 한 달이고 나도 여기 들어와서 살 수 없을까요?”
소장은 법무장관을 통해 대통령 결재까지 얻어야 가능하다고 했다. 심심풀이로 들고나는 곳이 절대 아니라고 했다. 대전을 다녀오고 3주쯤 지난 4월 초순 ‘견우 직녀’는 방송됐고 주장원상을 탔다.
말 이 씨가 된다는 속담이 현실이 되었다. 광고음악 녹음을 위해 통기타 가수들과 외출한 사이 중부경찰서에서 형사들이 르 시랑스로 몰려와 손님으로 온 학생 60여 명을 연행했다. 실내를 샅샅이 뒤졌고 화장실도 조사했다. 주방일과 기도(문지기)를 보던 전직 중부서 형사 이선생도 연행됐다.
누 군가가 르 시랑스를 대마상습업소로 고발한 것이었다. 주머니 조사를 받은 학생들은 모두 풀려났지만 이선생만은 구속됐다. 이선생이 자신이 주인이라고 나섰기 때문이었다. 화장실에서 어떤 증거물이 나온 모양이었다. 그 화장실은 건물 공용이었다.
‘차오스’와 ‘카오스’
그 날은 집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이선생이 걱정이었다. 다음날 아침 혹시 장기외박할 수도 있음을 식구들에게 말하고 집을 나섰다. 신문에는 어제 사건의 기사가 벌써 실려 있었다. 10시쯤 형사실로 들어가 내가 업주니 이선생은 풀어달라고 했다. 형사 두 사람이 나를 별실로 데려갔다.
“제발 돌아가세요. 여기 오면 안됩니다. 선배(이선생)가 사칭으로 죄가 더 커져요”
그 들은 나를 취조할 생각이 없었다. 내가 돌아갈 생각을 안 하자 두 사람은 점심 시간이라며 아무 말 없이 나가고 말았다. 두 시가 되고 세 시가 되어도 그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당직자에게 물으니 두 사람은 이미 퇴근했고 오늘은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선생은 지금 어디 있으며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가.
다음 월요일에 다시 중부서에 찾아가 나를 수감하고 이선생을 풀어달라고 했더니 그렇게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 러면 나도 구속하세요” 했더니 나를 유치장에 넣었다. 그리고 그들은 나에 대한 조서를 간단히 작성했다. 이름, 생년월일, 본적, 주소, 학력, 경력, 르 시랑스의 경영내용 등이었다. 틀린 내용이 없고 잘못한 것도 없어서 지장을 찍었다. 이틀 후 검찰청에 갔다. 담당검사는 나보다 10세는 아래로 보였다. 이런저런 얘기로 부드러운 대화가 이어졌다.
“요즘 젊은이들, 특히 음악감상실 드나드는 젊은이들 모두 히피죠. 부모 말 안 듣고 제멋대로 탈선하고 성관계 문란하고 마약
상습하고. 이렇게 사회질서가 깨지는 것을 ‘차오스’라고 하지요?”
물어보니 대답 안 할 수가 없었다.
“차오스는 아니고 영어로는 ‘케이어스’, 독일어로는 ‘카오스’지요.”
그는 그럴 리가 없다며 영어사전을 가져와 발음을 살폈다.
“이럴 리가 없는데…, 독일어는 다를 거야.”
피의자가 ‘영감님’의 심기를 건드렸으니 무슨 일이 잘될까. 그는 다시 나를 부르지 않았다. 다음날 나는 서대문 경찰서를 들러 밤에 서대문교도소에 수감됐다.
내가 수감된 감방에는 사상범 한 사람과 경제사범 여섯 명이 있었다. 나의 자리는 뒷간 바로 옆이었다. 면회 나가는 길에 이선생과 마주쳤다.
“왜 들어오셨어요?”
“죄송합니다. 갈곳이 없었어요.”
구 자흥씨와 동생들이 면회하러 왔다. 이선생은 풀려났고, 나는 공판을 거쳐야 한다 했다. 하루가 지나고 또 하루가 지나고, 일주일, 이주일. 밖을 내다볼 수 없도록 높은 곳에 있는 작은 창 밖에서 참새들의 짹짹 소리가 들려오기도 했다.
“서대문교도소 별거 아니야”
하 루는 감방에 잡지가 들어왔다. 김영환의 ‘견우 직녀’ 가사가 실렸던 그 잡지였다. 무심코 뒤지다가 편집후기를 읽는데 거기에 곽명세씨와 나의 이름이 있었다. 내용은 두 사람이 지난 3월 13일 대전교도소를 방문해 김영환씨를 면회하고 돌아가 방송을 했다는 것이었다.
언 제 공판이 열리고 풀려날지 알 수가 없었다. 들어올 때는 내 발로 걸어들어왔지만 나가는 것은 마음대로 안 되는 것이었다. 나의 음력 생일은 석가가 고행길로 나선 2월8일이다. 지금 고행을 하는 나는 혹시 석가탄신일에 풀려나는 것이 아닐까, 이런 생각을 내 멋대로 하면서 공판일을 기다렸다. 공판일은 늦지도 이르지도 않게 다가왔다. 공판에서 나를 담당한 변호사는 오유방씨, 재판장은 가수 정미조의 오빠 정만조 판사였다. 판결은 무죄였다. 단 매스컴을 통해 사회를 어지럽힌 것에 대해 도의적 책임을 느껴야 한다는 것이었다. 정말 석탄일 전날 나는 교도소를 나왔고 소금을 맞으며 집에 들어가 생두부를 먹었다. 그 해의 석가탄신일은 5월8일이었다. 한달 남짓의 고행이었다.
Age of Aquarius, 천재냐 광기냐…. 내가 겪은 사바세계로부터의 격리는 인재였을까 섭리였을까. 나를 담당했던 검사는 몇 년 후 면직되었다. 보도에 의하면 그는 열 살 갓넘은 소년이 고물상에서 몇백 원짜리 고물을 훔친 사건을 입건, 송치, 수감했대서 검사직을 박탈당했다고 했다. 신문보도로 알게된 얘기다.
‘젊 음의 행진’과 ‘우리들의 새노래’는 여전히 방송되고 있었지만 나는 방송에 나가지 않았다. 신문은 내가 무죄로 석방된 것을 보도하지 않았다. 르 시랑스 사건을 꼬집어 보도한 신문사에 들러 해당 부서 부장에게 따졌다. ‘그 기자는 현장에 와서 취재를 했는가, 왜 옆집 여성전용 다방(손님들이 담배 피우고 분위기가 퇴폐적이라는 소문이 자자했다) 얘기까지 르 시랑스에 밀어붙였는가, 그 기자를 만나게 해달라.’ 그러나 만나게 해줄 리가 없었다. 내용인 즉 만취한 기자가 취재도 안하고 쓴 기사였고 그것이 소위 ‘매스컴을 통해 사회를 어지럽힌’ 판결문 속의 지적사항이었다.
이진섭 선배가 나를 위로했다.
“서대문교도소 별거 아냐. 언론계에 갔다온 사람 많아.”
그해 10월30일 대한민국 방송상 시상식에서 ‘우리들의 새노래’는 TV 부문 대통령상을 수상했다. 그 다음날인 10월31일 ‘견우 직녀’는 ‘우리들의 새노래’에서 연말 장원상을 받았다.
연말에 KBS에서 연락이 왔다. 대통령의 차녀 박근영양의 곡이 선정되었는데 나와서 심사평을 하라는 것이었다. 윤석중 선생, 박용구 선생, 그리고 정광모씨와 나란히 앉았다. 나는 다시 방송으로 돌아온 것이었다.
OB맥주, 줄줄이 사탕, 브라보 콘
1973년 하반기. 한때는 이민을 갈까도 생각했다. 하루하루의 현실감이 그전 같지 않았다. 왠지 기력이 소진된 느낌이었다. 프리랜서의 길은 평탄한 것이 아니었다. 나를 찾는 사람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무 엇을 해야 할까 궁리하고 있을 때 CF 제작사 ‘비프로’의 김영훈 사장이 광고음악을 해볼 생각이 있으면 같이 일해보자는 제의를 해왔다. 비프로는 중부서 옆에 있었다. 김영훈 사장은 TBC의 우수한 카메라맨이었다. 삼성 이병철 회장이 그 실력을 인정해 도덕재무장 관계 영화를 그에게만 맡겼고, 월남전 특파원에 청와대 출입기자도 역임한 사람이었다. 부단한 연구와 노력으로 평판이 좋은 분이었다. 그가 막 CF 제작회사를 차린 것이었다. 소문은 이미 나 있어서 비프로의 일감은 많았다. 태평양화학, OB맥주, 해태제과, 롯데제과, 삼성 TV, 금성 TV, 대한 TV, 동아제약, 종근당, 삼양설탕, 제일제당…. 손대지 않은 회사가 없을 정도였다.
필 름에 CM송을 붙일 때도 있고, 배경음악과 제품 로고송만 준비할 때도 있었다. 나는 김영훈 사장의 작업을 처음부터 끝(납품단계)까지 지켜보면서 카메라 렌즈가 얼마나 냉혹하고 비정한 것인지 알게 됐다. 1초 24프레임마다 찍히는 것이 다 달랐다. 같은 커트를 무수히 찍어 그중 제일 좋은 것을 골라 편집하는 일, 그것은 피를 말리는 작업이었다. 나도 1초 24프레임에 준하는 세밀성으로 녹음에 임했다. 시각과 청각의 조화. 언제 시각을 강조하고 언제 청각을 고조시킬 것인가. 언제 결정적 순간을 만들어낼 것인가. 소비자의 감성은 예리했다. 정성 들인 만큼의 반응이 나왔다. 김사장과의 공동작업에서 나는 많은 것을 깨우쳤다. 한참 광고에 몰입하고 있을 때는 대중가요가 아주 느슨하게 들리기도 했다.
다음은 초기에 만든 CM송들이다.
‘OB 흰 거품에 OB 그 한잔에 너의 마음 나의 마음 하나가 된다. 마셔요 OB OB, OB 맥주’(‘OB맥주’ 카피 이백천, 곡 김도향·김영민)
반응이 대단했다. 너무 대단해서 이 CM을 계기로 주류의 CM은 방송불가라는 당국의 결정이 나왔다.
‘아주머니 아직도 하루 세 번 밥을 지으시나요. 한번이면 되는데. 오늘 당장 구하세요 한상전자 쟈. 언제나 따뜻한 밥 한상전자 쟈아아’(‘한상전자 쟈’, 카피 이백천, 곡 김도향).
이 제품은 순식간에 너무 많이 팔렸다. 그러나 회사는 다음해에 파산했다. 번 돈을 주체할 수 없어 다른 업종에 손을 댔다 실패한 것이다.
‘아빠 오실 때 줄줄이 엄마 오실 때 줄줄이. 우리집은 오리온. 줄줄이 사탕. 난 먹고 싶은 거야’(‘줄줄이 사탕’ 카피 이백천, 곡 김도향).
초 등학교 3학년 남자 아이가 불렀다. 차려자세로 소리를 곧장 지르게 했다. 제품은 늘 동이 났다. 야구장에선 안타가 나고 연속 득점이 나면 이 노래가 불려졌다.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가 되려면 이 제품을 사들고 들어가야 할 정도였다.
‘열두 시에 만나요 브라보 콘 둘이서 만납시다 브라보 콘 살짝쿵 데이트 해태 브라보 콘 브라보 브라보 콘’(‘브라보 콘’, 카피 송영만, 곡 강근식, 노래 강근식(첫해), 윤석화(다음해)).
이 CM송이 나올 무렵 해태는 경영 위기였다. 이 제품이 그 해 2억원의 매상을 올리면 대성공이라고 했는데 20억원을 기록했다. 해태를 살린 CM송이었다. 이듬해 윤석화가 ‘살짝이’를 ‘살짜쿵’으로 다시 불러 또 히트했다. 윤석화는 이를 계기로 두 달 사이에 50개의 CM송을 부르고 급기야 MBC의 주말 쇼프로 MC까지 맡게 됐다.
CM송은 단순성, 명쾌성, 친근성이 중요하다. 당시는 아직 TV가 흑백이었기 때문에 음향이 화면보다 강하게 느껴졌다. 어린이들이 동요는 안 부르고 CM송만 따라 부른다 해서 사회문제가 되기도 했다.
대마초 파동 그 이후
‘비 프로’에서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는 사정이 생겼다. CM송 제작에 여러 식구가 몰려들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처음부터 같이 시작한 김도향에 이어 스푸키스의 김영민, 김찬, 그들의 친구 석태홍, 그리고 윤형주와 ‘우리들의 새노래’에서 픽업한 강원도 아가씨 김복순. 비프로 김영훈 사장에게 양해를 구하고 ‘한국 스튜디오’를 개설했다. 새로 또 멤버가 늘어나 이현섭(이진섭 선생의 아우, ‘옛 시인의 노래’의 작곡자), 듀오 ‘4월과 5월’의 백순진, 작편곡가 이경석, 그룹 ‘동방의 빛’ 멤버인 이영재, 정수라, 윤석화, 기타리스트 겸 편곡자 문성원 선생 등도 거의 상주하다시피 했다.
한 국스튜디오에서는 노래 워크숍도 열었다. 안식구 외에 ‘4월과 5월’의 김영진, 이지민군과 남궁옥분 등 새로운 인물들도 자주 들렀다. 판소리 명창 박동진 선생을 모시고 워크숍을 연 일도 있었다. 선생은 40세가 지난 후 판소리를 시작했는데 분뇨 거른 물을 마시며 폭포수 밑에서 수련한 얘기 등을 해주었다. 훗날 박선생에게 “판소리에서 좋은 소리란 어떤 것입니까” 하고 물은 일이 있었다.
“그 건 쇤소리여. 요즘은 ‘허스키’라고 하던가. 소리를 좀더 뽑아내려는데 기진 상태여. 그런데도 마지막 힘을 다해서 좀더 내려고 할 때 나는 소리, 그르륵 가래 끓는 소리. 그게 진국의 소리여. 숨 걷기 직전에 나오는 그런 소리 말여.”
1974 년에서 1978년까지 5년간은 주로 CM송 작업을 했다. 통기타 식구들은 뿔뿔이 흩어져 제 갈 길을 갔다. 방송과 레코딩, 축제, 그리고 공연. 1974년은 포크 가수들에게 최고의 해였다. 주요 신문이 청바지 문화를 언급했고 라디오 심야프로는 이들의 주무대이자 사교장이었다. 동아방송 심야프로는 이장희에서 윤형주로 바통이 넘겨졌고, 동양방송에서는 서유석이 형 노릇을 하면서 후배들을 이끌었다.
이 제 음악감상실 시대는 서서히 저물고 있었다. 객석의 입김을 알고 하는 노래와 스튜디오에서 노래를 시작하는 것과는 천양지차가 있다. 이때쯤 녹음 스튜디오에서는 소위 ‘짜깁기’라는 것이 당연시되었고 음색이나 여운을 마음대로 조작할 수 있어 노래 실력이 달려도 어지간하면 음반을 낼 수 있다는 인식이 퍼지기도 했다. 그러니까 스튜디오 가수들은 자신의 타고난 소리를 들을 수 없고 기계가 변조해놓은 음성을 자신의 소리로 느껴야 했다.
녹 음기술이 가창력을 추월해 가수들은 멋과 테크닉에 빠져들기도 했다. 비디오형 가수가 쏟아져 나오기 시작한 것은 대마초 파동 이후부터다. 한때는 음악산업 현장에 가사만 좋아도 히트할 수 있다는 얘기가 떠돌기도 했다. 얼마나 가창력이 퇴화했으면 그런 말이 나돌았을까.
‘참새를 태운 잠수함’을 몰고
1977 년에 구자흥씨의 아우 구자형(방송 작가, 음반기획자)군이 나를 찾아왔다. 1975년부터 대학로 성베다교회에서 워크숍 겸 라이브 스테이지를 계속해왔는데 장소를 옮겨 명동성당 카톨릭여학생관에서 ‘참새를 태운 잠수함’이라는 이름으로 젊은이들의 모임을 매주 갖는다는 것이었다. 모임을 이끄는 MC를 맡아달라고 했다.
‘참 새를 태운 잠수함’의 주요 멤버는 강인원, 남궁옥분, 전인권, 명혜원, 이종만, 유성찬, 유한그루, 곽성삼, 한동헌(서울대 경제학과, 서울대 통기타 동아리인 메아리의 대표이자 후일 ‘노래를찾는사람들’의 리더), 박용범(현 조선대 교수) 등이었다. 이홍열도 그때 멤버였고 고교생 개그맨 지망생들도 이 무대에 섰다. 대개 촛불을 켜놓고 진행했고 한때는 함석헌 선생을 초빙해 ‘노자강의’를 듣기도 했다. 내가 참여해서는 박동진 선생을 모시기도 했다.
전 인권은 당시 아직 득음(得音)이 안 돼 주로 듣기만 하는 멤버였다. 강인원은 현재 음대 교수이고 남궁옥분은 지금도 공연에 바쁜 몸이다. 모두들 소박한 심성의 젊은이들이었다. 카톨릭여학생회관이라 수녀님들도 적지 않았고 분위기가 늘 숙연해 청개구리집이나 르 시랑스와는 달리 심성을 수양하는 곳 같은 느낌도 있었다. 한동헌이 이끄는 ‘노찾사’가 나중에 사회의 그늘진 곳, 마음이 아픈 사람들과 뜻을 같이하고 쟁의 현장에까지 나간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노찾사의 계보에서 일반에 알려진 가
수로는 ‘솔아솔아’를 부른 안치환이 있고 그 다음이 윤도현이다.
1977년 제1회 MBC 대학가요제가 열렸다. 서울대 농대 그룹 ‘샌드 페블스’가 대상을 타고 서울공대 트리오가 ‘젊은 연인’들로 동상을 탔다. 한국 스튜디오에서 연습한 팀이었다.
1978 년 한국스튜디오를 폐쇄했다. 김도향과 윤형주가 따로 나가 기획사를 차렸고 서로 경쟁할 처지가 아니어서 광고음악에서 아주 손을 떼었다. 나는 다시 비프로 김영훈 사장에게 도움을 청했고 그분은 나를 받아줬다. 내가 별로 도움을 주지도 못하면서 신세를 진 사람이 김영훈 사장이다.
“저렇게 노래를 잘할 수 있나!”
시 간을 의식하며 나의 얘기를 적는 것보다 현장을 따라 공간감각을 더듬는 것이 더 나을 것 같다. 한강, 여의도광장, 파랑새극장, 시청 앞 광장,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일산 아파트 단지 안 벤치와 나무. 남이섬 울창한 숲과 넓은 잔디, 아침에 물가에서 바라본 물안개….
먼 저 ‘국풍81’ 때의 여의도광장. 대학생들의 노래 콘테스트가 열렸다. 따가운 햇살 아래서의 공연과 심사였다. 크고 거창한 무대. 그 앞의 넓은 공간. 전체 무대가 한눈에 보일 정도의 자리에 반원 형태로 배치된 약 10석의 심사위원석. 뒤쪽으로 조금 떨어져 맨바닥에 앉은 관객들과 시민. 공연이 다 끝났으니 서둘러 심사를 해야 했다. 이봉조 악단장이 저만치서 벌떡 일어나 반대쪽 끝에 앉은 나에게 소리를 질렀다.
“백천아, 누가 제일 낫노?”
이봉조씨는 나보다 서너 살 위다. 사람 많은 곳에서 유독 “백천아”를 연발했다. 고등학교 동창생말고는 아무도 나를 그렇게 부르지 않았다. 심사원 모두가 나를 향했다. 물어왔으니 나의 생각을 대답해야 한다.
“서울대 그룹도 좋고 혼자 기타 치면서 노래한 친구도 좋은데…. 솔로 한 친구가 더 좋은 거 같아. 혼자서 그만큼 했으니까.”
“그럼 그렇게 해야지. 그렇게 하자.”
경상도 사나이 이봉조의 결정이 전원의 결정이 됐다. 이용이 대상을 받았다.
이용을 MBC ‘가요콘서트’에서 15년 만에 다시 만나게 되었다. 그 날은 그가 주인공이다. 그는 여러 곡을 불러야 했다. 그런데 연습중 유난히 눈을 깜빡거렸다. 멈추게 하고 싶었다.
“이용씨! 노래하면서 자신이 낸 소리의 빛깔도 안 봐요? 눈은 왜 그렇게 깜빡거려요?”
바로 며칠 전 그의 삼촌 이종덕(전 세종문화회관장, 전 예술의전당 관장)씨가 내게 부탁한 것이 있었다.
“조카 좀 잘 봐줘. 미국서 돌아왔는데 힘든가봐.”
가수가 깜빡거리면 듣는 사람이 정신없어요. 깜빡거리지 마세요. 그리고 자기가 낸 소리가 어떻게 듣는 사람의 마음에서 걸러지고 다시 눈을 통해 밖으로 나오는지 살핀 다음 소리를 내봐요. 그렇게 하면 눈 깜빡거림이 없어질 겁니다.”
그는 그날 깜빡이지 않았다. 관객들은 열광했다. 프로그램 게시판에 소감들이 올라왔다. 모두 칭찬 일색이었다.
“감동적이었습니다. 내가 이용씨의 가슴속에 들어가 내내 같이 노래한 것 같은 흥분을 느꼈습니다.”
나도 그렇게 느꼈다. 저렇게 노래를 잘하는 친구가 있나.
전인권이 찾은 ‘무난한 소리’
‘들 국화’의 전인권은 한동안 나를 전속 사회자로 삼았다. 대학로 파랑새극장, 신촌 그레이스백화점 공연장, 압구정동 현대백화점 지하극장. 그는 나에게 MC로서 누릴 수 있는 무한자유를 주었다. 하고 싶은 대로 하라는 것이었다. 얘기하고 싶을 때는 아무 때라도 끼여들고, 노래를 중간에 중지시켜도 좋고, 연주중 무대를 돌아다녀도 좋았다.
압 구정동 현대백화점 지하극장에서 ‘대학신입생 환영 봄축제’를 40일 동안 열고 있을 때의 일이다. 그날 나의 심사는 삐딱했다. 나는 전인권을 추켜올리는 데 지쳐 있었다. 추키지 않아도 충분히 훌륭한 그를 그날도 오프닝 멘트에서부터 틀에 박힌 말로 추켜세우고 싶지 않았다. 무대에 올라 첫 멘트를 했다.
“오 늘 따라 좋은 소리란 무엇일까 생각하게 됩니다. 너무 찬란하고 강하고 영웅적인 소리는 스타가 내는 소리이지 마음에 스며드는 소리는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자기가 잘났다고 생각하면서 소리를 내면 그 앞에 앉은 사람은 무엇입니까.”
바로 옆에서 나를 보고 있던 전인권의 볼에 경련 같은 것이 스쳤다.
“좋은 소리는 어쩌면 무난한 소리가 아닐까요. 흠 잡을 데 없는 편안한 소리. 듣는 사람을 결코 위압하지 않는 소리. 자기 소리보다 남의 소리를 더 소중하게 받들면서 내는 무난한 소리.”
전 인권의 콘서트에는 마니아들이 상당수 있었다. 그날 내가 ‘딴소리’를 한 것은 전인권의 또 다른 소리를 들어보자는 것이었다. 그는 놀라운 사람이었다. 늘 그룹의 앞장을 서던 그가 그날은 그룹의 소리를 떠받치는 역할로 변신했다. 사운드가 확 달라졌다. 새로운 투명감이 소리 속에 끼여들면서 우리 모두의 귀가 전인권의 소리를 감싸기 시작했다. 커튼 옆에서 무대를 보고 있는데 천장의 라이트와 바닥의 라이트로 비춰지는 미립자 먼지들이 소리에 취한 탓일까, 마치 요정들이 춤추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이럴 수가…!
그 날의 기타(김광석), 베이스(민재현), 드럼, 그리고 전인권 네 사람이 어울려 내는 소리는 천상의 음악이었다. 소리에는 밝음도 아니고 어둠도 아닌 또 하나의 유체(流體) 같은, 차원이 다른 공간이 있었다. ‘무난한 소리’에 대한 전인권적 해석이 새 감동을 엮어낸 것이었다.
소리 속에서 혼을 보고 싶다
이 때가 1991년. 이날의 이상체험이 하나의 전기가 되어 나는 1964년부터 계속해온 포크 세대와의 랑데부 여정에 일단락을 찍었다. 초기 1세대가 40대를 넘어 50대로 접어들고 있고, 서태지를 앞세운 신세대의 소리에서는 통기타의 통나무가 들려주던 소박한 입김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들은 소리보다 동작, 분장, 재치 쪽에 경사돼 있었다. 나는 소리에서 어떤 원초성을 찾으려는데 그들은 소리를 사용해서 그들의 스트레스를 풀 수 있는 새로운 ‘자극’을 찾는 것 같았다. 나는 옷도 벗고, 몸도 벗고, 소리 속에서 어떤 혼을 보고 싶었는데 그들은 자꾸 더 껴입고, 더 바르고, 그리고 더 높이 뛰어오르고 싶어했다.
언 젠가 이진섭 선생이 스탠 게츠(쿨 재즈의 창시자, 테너색소폰 연주가)의 서울 안내역을 3일간 내게 맡긴 적이 있었다. 그는 당대 20년 동안 테너색소폰의 세계 최고 연주자였다. 길옥윤 선배도 그의 음악을 연구했고, 그의 음악을 높이 평가했다. 그에게 어떻게 그렇게 오랫동안 정상의 자리를 유지할 수 있었는가를 물었다. 그는 “알파, 베타, 오메가”의 세 단어를 말했다. 그 세 단계를 거치면 무념, 무상, 무아의 경지로 들어가게 되고 애쓰지 않아도 음악이 스스로 생겨난다는 것이었다. 뉴욕의 자기 집에는 명상을 위한 기계가 있고 순회공연 때는 늘 분장실에서 30분간 그 과정을 거친다고 했다.
언젠가 인간문화재 김소희 선생의 따님 박윤초씨가 내게 해준 말이다. “소리마다 혼이 박혀 있어야 해. 작은 소리든 큰 소리든.” 생전에 어머니가 자주 한 말씀이라고 했다.
또 언젠가 일본 문예춘추(文藝春秋)지에서 읽어낸 풍월이다. 청각을 관장하는 뇌의 측두엽(側頭葉)은 듣는 것 외에 다섯 개의 또 다른 기능을 관장하는데 그것은 ‘영감’ ‘신비감’ ‘직관’ ‘텔레파시’ ‘초능력’이라는 것이다. 청중의 귀에 노래를 한다는 것은 예삿일이 아니다.
존경하는 스승 성경린 선생님과 TBC TV 시절 선배 최상현 형은 내게 이런 말을 해주었다.
“한국 사람의 심성은 슬기롭고 청아(淸雅)해. 샘물처럼.”
통나무의 순박한 숨결에 자기 소리를 실어 노래했던, 아니 지금도 노래하고 있는 포크싱어들이 지금 한참 지쳐 있을 50~70대와 젊은 세대에게 다시 성숙과 맑음, 새 영감에서 비롯되는 노래를 들려주길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2006.9.25 신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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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wizys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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