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10대는 건담과 함께 성장했다”
“나의 10대는 건담과 함께 성장했다” | |
[매거진 esc] 커버스토리 30년 만의 ‘건담’ 국내 상륙…마니아 30대 남자의 건담 성장스토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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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살아남을 수 있는가?” 1979년 4월7일, 일본에서 첫 텔레비전 방영을 시작한 애니메이션 <기동전사 건담>(이하 ‘퍼스트 건담’)은 매회 이 섬뜩한 내레이션과 함께 마무리되었다. ‘정의를 위해 싸워라’라거나 ‘지구를 지켜라’가 아니다. 외계에서 침공한 악의 무리에 맞서 싸웠던 기존의 로봇 애니메이션 속 소년 파일럿은, 어느덧 참혹한 전장에서 인간을 죽여야 하는 비극의 소년병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리고 이토록 육중한 물음을 던지며 시작된 <퍼스트 건담>은 이윽고 시대의
아이콘으로 부상했다. 지난해 이 기념비적인 애니메이션이 방영 30돌을 맞았다. 그 세월 동안 건담의 세계는 하나의 장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스스로의 우주를 확장시켜 왔지만, 한국에서는 단 한 번도 오리지널 시리즈가 방영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만만찮은 역사를 자랑하는 우리나라의 건담 팬덤들. 대체 그들은 어떻게 건담을 만났고 함께 성장했을까? 최초로 오리지널 건담 극장판들이 공식 상영되는 2010년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우주세기 건담 회고전’을 계기로, 국내의 30년 건담 팬들을 만나 묵은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1970년대 말, 남자 초등학생들에게 최고의 인기 아이템은 텔레비전에서 방영되는 로봇 만화영화였다. 골목 여기저기서 아이들은 <짱가>의 주제가를 불렀고, ‘마징가’ 완구를 가지고 육박전을 벌였다. 한국 최초의 로봇 애니메이션 <로보트 태권브이>가 나온 것도 이 무렵. 하지만 1980년대로 넘어오면서, 어린이들은 텔레비전에서 더 이상 로봇을 만날 수 없었다. 언론통폐합 이후 ‘어린이들의 건전한 정서 함양에 이롭지 못하다’는 이유로 방영을 규제한 탓. “갑자기 로봇 만화영화를 볼 수 없게 되니까 갈증이 너무 컸죠. 그런데 문구점에 가면 ‘기동전사 칸담’이라는 프라모델 제품이 나와 있단 말이에요. 제품 설명서에 보면 스토리가 나와 있으니까 이런 만화영화가 있다는 건 짐작이 가는데 볼 수 있는 방법은 없었던 거죠.” 애니메이션 평론가이자 현재 애니메이션 프로듀서로 일하고 있는 송락현(38)씨의 추억담이다. “마침 80년대 중반부터 만화영화의 스틸과 함께 줄거리를 요약한 해적판 ‘건담 대백과’ 시리즈들이 출간되기 시작하면서 불이 붙었어요.” 당시 아카데미사에서 출시했던 ‘칸담’ 프라모델과 권당 1000원짜리 대백과 시리즈. 애니메이션을 실시간으로 접할 수 없었던 80년대 초 국내 건담 팬들이 공통적으로 이야기하는 ‘건담’의 원체험이다. 말하자면 프라모델로 건담을 만난 것이 먼저요, 대백과 시리즈는 그 완구의 주석서에 가까웠던 셈. 이렇게 움직이는 영상도 아닌 모형과 사진, 글줄만 가지고 접한 건담 시리즈의 어떤 모습에 그들은 열광하게 된 걸까? 송씨의 말이다. “아시다시피 기존의 로봇 애니메이션들은 이야기의 설정이 단순했잖아요. 적이 쳐들어오면 물리치는 것으로 한 회의 에피소드가 끝나죠. 하지만 <건담>은 하나의 이야기가 43회 내내 길게 이어졌어요. 그러다 보니 캐릭터들도 좀더 복잡해질 수밖에 없고, 주인공뿐만 아니라 적, 심지어 단역에 가까운 인물들까지 나름의 사정이 존재하는 이야기도 매력적이었죠.”
한국서 한번도 TV 방영 안했어도 ‘입소문’으로 먼 미래, 지구의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하자 인류는 우주로 삶의 터전을 옮기려 하고, 인공 행성 ‘스페이스 콜로니’의 개발에 성공한다. 이 스페이스 콜로니로 인류가 이주하면서 바야흐로 ‘우주세기’가 개막되었다는 것이 <퍼스트 건담>의 기본적인 설정. 하지만 지배계급들이 여전히 지구에 남아 있으면서 콜로니를 착취의 대상으로 삼으려 하자, 견디다 못한 콜로니의 강경파들은 ‘지온공국’이라는 우주 독립국을 세우고, 지구권의 연방군과 독립전쟁을 벌인다. ‘1년 전쟁’이라 불리는 이 독립전쟁의 연대기가 <퍼스트 건담> 스토리 전체를 구성하고 있으며, 연방군 소속으 로 ‘모빌 슈트’라 불리는 로봇 ‘건담’을 조종하는 소년 ‘아무로 레이’와, 지온공국 소속의 파일럿이자 아무로의 라이벌인 ‘샤아 아즈나블’의 은원관계가 갈등의 주된 축. 기존의 로봇물과 달리 어느 쪽이 옳다고 쉽게 단정할 수 없는 모호한 구도와, 심지어 적이지만 주인공보다 더 매력적으로 묘사된 샤아의 모습이 대백과를 통해 <퍼스트 건담>을 알게 된 국내 팬들에게도 새로운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리얼 로봇 애니메이션의 효시’로 평가받는 이 <퍼스트 건담>의 세계관은, 이전의 로봇 만화영화에 시큰둥하던 소년들의 눈을 사로잡는 데도 성공했다. 블로그 ‘자쿠러의 건담 뒷마당’(zakurer.egloos.com)의 운영자이자 <기동전사 건담 일년전쟁사>를 비롯한 건담 관련 서적들을 국내에 소개한 번역가 장민성(38)씨는 초등학생 시절부터 밀리터리 마니아였다. “‘라이프’에서 출간한 <세계 제2차대전사> 서른 권을 초등학교 때 다 읽었죠. 무기라든가 전쟁사에 관심이 많아서 프라모델도 주로 탱크, 전투기 같은 것들을 만들었구요. 그러다 보니 외계인이 등장하는 비현실적인 로봇물은 별로 좋아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퍼스트 건담> 대백과를 보고는 놀랐죠. 2차 세계대전의 역사를 로봇물로 각색한 것 같았거든요.” 로봇 모델들도 마치 군사장비와 같은 디자인과 각각의 고유번호를 가지고 있는 것 또한 이색적이었다고 했다. 하지만 국내에 건담 팬들이 급증하게 된 계기는 <퍼스트 건담>이 아니라, 1985년에 현지에서 방영된 속편 〈기동전사 Z건담〉(이하 ‘제타건담’)이었다. 당시 아카데미사에서 출시한 <제타건담>의 해적판 프라모델 ‘건담 마크 2’가 손가락 관절까지 움직이는 놀라운 기술력으로 국내 소년 팬들에게 일대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킨데다, 전 3권으로 발간된 <제타건담 대백과>가 가히 폭발적인 호응을 얻었던 까닭이다. 지온공국의 패망으로 마무리된 1년 전쟁으로부터 6년, 연방군 내에 쿠데타가 일어나 ‘티탄즈’라는 군사집단이 실권을 차지하면서 이에 대항하는 반지구연방군 ‘에우고’와 갈등을 빚는다는 것이 <제타건담>의 이야기. 전편에서 철천지원수였던 아무로와 샤아가 에우고의 일원으로 힘을 합치고, ‘카미유 비단’이라는 새로운 소년 주인공이 가세했다. 어제의 적이 오늘의 동지가 되면서 갈등구조는 더욱 첨예해졌으며, 인물들의 성장과 함께 심리묘사도 복잡해졌다. “그때는 <제타건담 대백과> 다음 권 나오기를 기다리는 게 가장 설레는 일이었죠.” 역시 이름난 건담 블로그 ‘디제의 애니와 영화 이야기’(tomino.egloos.com)를 운영하고 있는 이용선(37)씨의 회고다. 무엇보다 그를 매료시킨 건 <제타건담>의 처절한 비극성. 극중 많은 인물들이 전장에서 죽거나 미쳐버리는 결말은, 방영 당시 일본에서도 상당한 후폭풍을 낳았다. 항상 옳은 쪽이 승리하는 게 아니라 지구연방군의 수뇌부처럼 승리의 과실을 따 먹는 이들은 따로 있다는 것을 폭로하는 내용도 어린 시절에는 큰 충격이었죠. 많은 사람들이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을 10대 시절의 관문이라 이야기하는데 저에게는 <퍼스트 건담>과 <제타건담>이 그 역할을 한 것 같아요.”
일본에선 다층적인 해석 가능한 건담 담론 무성 현지에서도 기념비적인 애니메이션으로 자리매김되어 오늘날까지 그 세계를 무한히 확장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나라 팬들에게도 대백과 시리즈로 시작된 ‘건담’ 체험은 단지 80년대의 추억으로만 남아 있지 않다. 90년대 이후 움직이는 영상으로 건담을 접하고, 성인이 된 후에도 반복해서 돌려보며 어린 시절에는 이해하지 못했던 부분들을 새로이 깨닫게 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는 게 건담이라는 애니메이션의 매력. “이를테면, <퍼스트 건담>의 샤아는 직설적이고, 자신의 야망을 실현시키려는 데 거침이 없는 인물이었어요. 그게 매력이었는데, <제타건담>에서는 샤아의 성격이 소심하게 변해요. 어린 시절에는 그게 불만이었다가 어른이 되고 난 후에 다시 보니 이해가 되더군요. <제타건담>에서 샤아는 반지구연방군의 조력자들과 협상해야 하고, 주인공인 카미유도 지휘해야 했으니까요. 말하자면 중간관리자의 입장이 된 거죠.” 이씨의 말이다. 애초 치밀하게 설정된 캐릭터들인데다, 작품 또한 인물들의 성장과 함께 성인 드라마로 자연스럽게 성장한 까닭에 가능한 일. 아울러 장씨는 건담 시리즈를 ‘인간의 부조리한 모습들을 직시하지만, 그럼에도 인간에 대한 희망을 잃지 않은 작품’이라 평가한다. “혈기 넘치던 시절에는 그런 부조리들을 참지 못하고 혁명을 꿈꾸기도 하죠. 그게 샤아의 입장이라면, 아무로는 그래도 인간이 먼저라는 쪽이에요. 힘들더라도 조금씩 세상을 바꿔 나가자는 거죠.”
이씨는 건담 시리즈가 이처럼 다층적인 해석이 가능한 텍스트임에도, 국내 일반에는 단지 ‘프라모델이 유명한 애니메이션’으로만 받아들여지는 현실이 안타깝다고 말한다. “일본 현지에서는 잡지나 단행본 등 건담과 관련된 담론을 생산하는 노력들이 꾸준히 이루어지고 있어요. 심지어 90년대 이후에 나온 건담 시리즈들이 오락적인 것에 초점을 맞추어 변질되었다는 비판을 받지만 그럼에도 당대의 공기를 담으려 했거든요. 이를테면 가장 최근에 나온 건담 시리즈인 <기동전사 건담 00(더블 오)>도 이라크 전쟁과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모티브로 삼고 있으니까요.” 건담을 소비하는 문화에서는 그 텍스트뿐만 아니라 ‘건프라’라고 불리는 건담 프라모델도 팬들과 함께 성장해왔다. 프라모델을 통해 건담을 처음 접한 국내 팬들에게 그 기억은 더욱 각별하다. “건프라는 초기부터 일본 현지에서도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어요. 사실 일본에서 프라모델이 최고의 붐을 일으켰던 때는 60~70년대였거든요. 탱크, 비행기, 자동차는 물론이고 심지어 선풍기 같은 가전까지 ‘스케일 모형’이라는 이름으로 출시되었으니까요. 하지만 70년대에 오일쇼크와 밀리터리 문화의 하향세를 거치면서 시장이 축소되고 있었는데 건프라가 등장하면서 다시 프라모델 인기가 높아지기 시작했죠.” 장민성씨의 말이다. 마치 실제 군사무기를 연상시키는 패널라인이 플라스틱 표면에 들어가고, 일련번호 스티커들도 붙으면서 기존의 밀리터리 팬들과 로봇 애니메이션 팬들 모두를 매혹시켰다는 것. 그리고 30년에 걸쳐 지속된 건담 시리즈의 인기는 완구 제조업체인 ‘반다이’로 하여금 기존의 제품을 점점 더 업그레이드하여, 건프라 조립이 성인 팬들의 어엿한 취미로 자리매김하게 만들었다. 이씨도 “10년 전만 해도 40~50대가 되면 고상하게 철도 모형 같은 거나 만들어볼까라고 생각했었어요.(웃음) 그런데 90년대 말부터 반다이사에서 내놓은 마스터 그레이드(MG)라는 이름의 고품질 건프라들을 보니 나이 먹고도 계속 건담을 만들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라고 고백한다. 하나의 금형에서 여러 색깔의 플라스틱 키트를 뽑아내는 다색 사출과, 완성품의 다양한 포즈를 가능하게 하는 폴리캡 관절, 외형상 조립품이라는 느낌을 주지 않게 만드는 접합선 은폐 기술 등이 반다이사의 건프라가 다른 업체의 프라모델들과 비교 우위의 완성도를 보여주는 비결. 하지만 이 로봇 프라모델이 독보적인 인기를 구가할 수 있었던 것에는 무엇보다 이야기의 힘이 절대적이었노라고 모두가 입을 모은다. “우리나라에서 콘텐츠를 기획하는 분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기도 해요. 무엇을 만들까를 고민하기보다는 무엇을 팔아먹을까를 먼저 고민하는 풍토가 있으니까요. 하지만 <퍼스트 건담>은 처음부터 프라모델을 팔기 위해 시작한 애니메이션이 아니었다는 거죠.”
오다이바 건담 실물엔 한국 순례객도 몰려 건담의 원산지 일본에서 건담의 인기는 절대적이다. 지난해 일본 도쿄 오다이바에서는 실물 크기의 건담이 공개돼 1개월만에 415만명이 몰려들었다. 이때 한국에서도 이 기회를 놓칠세라 건담순례객 행렬에 동참하는 이들도 이어졌다. 지난해 8월 초 가족여행으로 도쿄를 찾은 문화방송 프로듀서 김유곤(37)씨는 애초 일정에도 없이 혼자 건담을 보러 가 아내의 눈총을 받아야 했다. 10대 시절 건담이라는 새로운 세계를 만난 후 작품과 함께 성장해 온 이들 국내 팬들은 이 오랜 친구가 단순히 자족적인 취미로만 머무르기를 바라지 않는다. <건담 에이스>를 비롯, 일본 현지의 관련 잡지 대다수를 창간호부터 수집해 온 이씨는 온라인을 통해 건담 시리즈의 유산과 세계관에 대한 다채로운 논의가 이어지길 기대하고 있다. 지금껏 음성적으로만 공유되어 왔던 건담 관련 정보들을 단행본이라는 공식적인 채널로 국내에 번역·소개하고 있는 장민성씨 또한 마찬가지. 그리고 건담 시리즈를 통해 애니메이터의 꿈을 키웠던 송락현씨는 나아가 국산 로봇 애니메이션을 만들겠다는 꿈을 품고 있다. “우리나라만의 로봇 메카닉 애니메이션을 가질 때가 되었다고 생각해요. 지금 내년 개봉을 목표로 <한반도의 공룡 2> 극장판 작업에 몰두하고 있는데, 이 프로젝트가 끝나는 대로 어린 시절부터 꿈꿔왔던 기획을 구체화시켜 보려고 해요. 건담 시리즈에서 받았던 영감을 제 창작의 일환으로 가져오는 것, 그게 궁극적인 꿈이죠.”
글 조민준 객원기자 zilch92@gmail.com·사진 박미향 기자 mh@hani.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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