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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ank B. Gibney

ysl* 사람들 / 2007. 4. 16. 22:19

프랭크 B. 기브니(Frank B. Gibney 1924.9.21- 2006.4) 타임지 일본 특파원, 엔사이클로피디어 브리태니커 편집위원회 부위원장, 환태평양연구소 소장, 일본브리태니커회사 사장과 한국브리태니커회사 초대 사장을 역임했으며, 환태평양국가문제 전문가로 알려져 있다. 말년에는 포노마 대학의 정치학 교수를 역임하였다. 예일대학을 졸업하고 이차 대전 중 일본어 번역 관련일을 정부기관에서 하였다. (영화 굿 셰퍼드가 생각난다^^). 저서로〈얼어붙은 혁명 The Frozen Revolution〉(1959)·〈허술한 강대국 일본 Japan, The Fragile Superpower〉(1975)·〈태평양 시대 The Pacific Century〉(1992)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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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사 30주년 기념 특집 1-기념사

책과 함께 한 30년, 뉴미디어와 함께 할 미래 

한국브리태니커회사 창립 30주년을 맞은 이 자리에서 회사의 지난 30년을 회고하는 것은, 마치 때때로 들여다보던 손때 묻은 가족 사진첩을 넘기는 것과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지금 이런 얘기를 하는 까닭은, 회사가 창립된 이래 지금까지 이 회사를 위해 일했던 여러분들과 함께 할 수 있었던 것이 큰 행운이라고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고인이 된 한창기 씨와 제가 '한국브리태니커회사'라는 이름으로 회사를 설립한 것은 1968년이었습니다. 이때 회사를 일명 '브리태니커 200주년 기념회사'로 부르기로 했으며, 당시 브리태니커의 회장이던 고 윌리엄 벤튼 씨도 이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했습니다. 브리태니커의 공식적인 창립년도는 '신사들의 모임 Society of Gentlemen'(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을 만들기 위해 출자했던 사람들을 이렇게 불렀습니다)이 영국 스코틀랜드의 에든버러에서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Encyclopædia Britannica/EB〉의 기념비적인 첫 권을 발간했던 1768년이었는데, 시카고와 런던의 브리태니커 임원들은 동아시아 지역에 새 회사를 창립해 앵글로-아메리카 회사의 영역을 넓힘으로써 창립 200주년을 기념하는 것도 매우 뜻 깊은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외국에서 회사를 시작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일본에서 브리태니커회사를 성공적으로 창립한 선례가 있었던 것이 크게 도움이 되었습니다. 당시 일본브리태니커회사는 영어판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을 성공적으로 판매하고 있었고, 일본어판의 발간을 위해 편집계획을 세우고 있었습니다. 원래 영국 스코틀랜드 에든버러에서 시작된 브리태니커는 20세기초에 미국 회사가 이를 인수해 뉴욕으로 갔다가, 다시 시카고로 본사를 옮기기 시작해서, 당시는 편집진과 경영진 모두 시카고로 이전을 거의 마친 상태였습니다.


외국회사 설립에 대한 성공적인 선례가 있었지만, 시카고 본사의 임원들 가운데에는 미국 이외의 지역에 새로 브리태니커의 지사를 설립하는 문제에 대해 우려를 표시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따라서 본사 경영진은 한국브리태니커회사는 자체적으로 운영해야 한다, 즉 한국에서 운영자금을 조달할 수 있어야 한다는 방침을 정했습니다. 그때 한국에 설립될 회사를 지원하기 위해 미국 은행에서 융자금을 얻도록 결재했던 시카고 본사의 한 임원이 그 때문에 거의 해고될 뻔한 적도 있었습니다.


한국에서 회사를 시작하는 일 역시 본사 임원을 설득하는 일 못지 않게 힘든 일이었습니다. 당시 한국의 박정희 대통령은 외국회사가 한국에 들어오는 것을 그리 달가워하지 않았습니다. 회사를 시작하기까지 온갖 관료주의적인 장애물과 같은 험한 길을 헤쳐나가야 했는데, 이때 한국의 변호사와 회계사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한국브리태니커회사는 다른 지역의 브리태니커회사가 갖지 못한 독특한 이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한국은 배움에 높은 가치를 두는 나라였기 때문에 다른 어느 나라보다도 브리태니커의 책과 자료들을 가치 있는 교육자료로 인정한다는 점이 그것이었습니다.


회사를 창립하는 데 무엇보다 큰 도움이 된 것은 새로 생기는 한국브리태니커회사에 참여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본사 임원의 한 사람으로서 제가 한국브리태니커회사의 초대 사장을 맡았습니다만, 곧 이 책임을 한창기 씨에게 넘겨줄 수가 있었습니다. 이는 시카고에서 경영진을 파견하던 그간의 관행에 한 획을 긋는 계기였으며, 시기적절하게 이루어진 변화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한창기 씨가 없었다면 오늘날의 한국브리태니커회사는 없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는 여러 가지 뛰어난 특징을 골고루 갖춘 인물이었습니다. 이해가 빠르고 상상력이 풍부한 경영자였으며, 판매와 경영의 귀재였고, 거기에 더해서 편집인의 통찰력까지 겸비한, 드문 인물이었습니다. 저는 지금도 그의 타계가 우리 모두에게 커다란 손실이 아닐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 안타까운 마음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의 지도력 아래에서 한국브리태니커회사는 명실상부한 한국의 회사로 성장했습니다. 후에 한창기 씨의 뒤를 이어 사장을 맡았던, 회계분야에 탁월한 기량이 있었던 이연상 씨와 뛰어난 젊은 인재들의 도움으로, 한창기 사장은 회사 창립 초기부터 계속해서 판매 기록을 경신했고, 회사 설립 후 몇 해 지나지 않아 '200주년 기념회사'는 브리태니커회사 내에서 최고경영상을 수상하게 되었습니다. 일본에 오는 길이면 거의 빼놓지 않고 한국에 들르던 저는 한국브리태니커회사의 업적을 대단히 자랑스럽게 생각하곤 했습니다.


영어판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을 시작으로, 한국브리태니커회사는 점차 그 활동 영역을 넓혀나갔습니다. 당시 미국의 상원의원이던 윌리엄 벤튼 씨의 기부금을 기초로, 한국에서는 거의 최초로 외국인이 영어를 가르치고 연구하는 재단법인 언어교육 부설 언어교육학원(Language Teaching Research Center/LTRC)을 설립했으며, 영어공부 교재를 개발하고 판매하기 시작했습니다. LTRC는 지금도 활발하게 활동하는 영어 교육기관이며, LTRC의 초대 원장은 재능 있는 언어학자로서 지금은 고인이 된 데일 엥거 씨였습니다. 그는 한국에서 일하는 동안, 언어학 분야 학자 몇 분과 학교 선생님들로 한 그룹을 조직해, 실용영어 공부를 위한 교재인 〈술술영어 Encounter English〉를 개발했습니다. 초급·중급·고급으로 구성된 〈술술영어〉는 그 탁월한 가치를 인정받아 세계 각국의 브리태니커회사에서 그 나라 언어로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후일 시카고 본사에서는 이 교재를 비디오와 CD로도 제작해 교재의 가치를 한층 더 높이는 계기를 마련하기도 했습니다.


한창기 사장은 브리태니커를 판매하는 데에만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창립 초기부터 판매조직과 함께 편집진을 구성했던 한국브리태니커회사에서는 한국 출판사상 가장 뛰어난 한국인문지리지라고 평가받은 〈한국의 발견〉을 비롯해 독자적인 출판물을 여럿 펴냈습니다.


한국브리태니커회사가 탄탄한 편집진을 가지게 되자, 이는 곧 영어판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 실린 한국 관련 항목을 늘리는 데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되었습니다. 편집위원회 임원의 한 사람으로서 저는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 한국 관련 항목이 적다는 것에 우려하고 있었으며, 한국의 여러 학자들과 나눈 대화를 통해 제 우려가 타당성이 있음을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한창기 사장도 역시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 한국 항목이 충분하지 않다고 강하게 느끼고 있었습니다. 당시 고려대학교 총장으로 재직하고 있던 김준엽 박사가 이끄는 비공식적인 학술위원회도 우리에게 같은 내용의 조언을 주었고, 시카고에 있는 브리태니커 편집진은 우리의 견해에 대단히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습니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로, 1974년 당시 'EB3'이라고 불렸던 브리태니커 15판이 간행되었을 때는 한국 관련 항목이 크게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창립 이래 한국브리태니커회사는 영어판, 그리고 특히 일본어판 〈브리태니커 국제 백과사전 Britannica International Encyclopædia/BIE〉에 한국에 관한 항목을 늘리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으며,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한국브리태니커회사가 창립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1971년에 이미 영어판 〈1971 브리태니커 연감 Britannica Book of the Year/BBOY〉에 박정희 대통령의 장문의 글이 머릿기사로 수록되었는데, 이는 전년도인 1970년에 전 미국 부통령 휴버트 험프리 씨가 브리태니커의 이사 자격으로 한국을 방문한 결과였습니다. 오래 전부터 친한(親韓) 인사이던 험프리 씨는 대통령 선거에서 낙선한 1968년에 브리태니커 이사가 되었던 터였습니다. 여러 가지 면에서 험프리 씨의 한국 방문은 성공적이었습니다. 그는 한국 국민들이 자신을 잘 아는 데다가 가는 곳마다 반갑게 맞는 데에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험프리 씨의 방문은 한국브리태니커회사가 한국-미국 간 우호관계를 더욱 공고히 하는 데 큰 역할을 했음을 증명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 후 상당한 기간이 지난 뒤 저는 노태우 대통령을 만나 인터뷰할 기회를 가졌고, 그 기사를 권두특집으로 〈1992 브리태니커 연감〉에 수록할 수 있었습니다.


한국브리태니커회사의 우수한 편집진은 월간지 〈뿌리깊은나무〉를 창간했습니다. 한창기 사장이 편집을 총지휘했던 이 잡지는 곧 한국문화 해석에 뛰어난 시각을 갖고 있는 잡지임이 증명되었습니다. 이 잡지는 한국 전통음악과 민속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이를 현대에 되살리려는 한창기 사장의 꾸준한 노력의 결실이었습니다. 한국브리태니커회사는 전액 외국자본으로 세운 회사이면서도, 수준 높은 문화상품과 잡지를 통해서 자기 목소리를 가질 수 있었고, 자국의 문화를 발굴하고 지키는 수호자라는 독특한 이념을 가진 회사로 성장해 갔습니다. 〈뿌리깊은나무〉는, 일면 비판적이기도 하면서 당시 정치상황을 볼 때에는 자유주의적인 성향을 가진 잡지였는데, 1980년 당시 권위주의적이던 군부정권에게 미움을 받아 정부명령에 의해 폐간되는 비운을 겪게 되었습니다. 슬픈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한창기 사장은 이에 굴하지 않고, 자매편이라고 할 수 있는 〈샘이깊은물〉이라는 잡지를 창간했습니다. 이 잡지는 1997년 그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계속 간행되고 있습니다.


1980년대에 접어들어서도 한국브리태니커회사는 영어판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술술영어〉 등의 어학 프로그램, 문화상품, 각종 단행본 등을 판매하면서 성장을 계속했습니다. 브리태니커 판매대리인들은 여러 차례에 걸쳐 국제브리태니커상을 받았고, 한국브리태니커회사는 국내외적으로 방문판매 분야에 선두주자가 되었습니다. 다른 나라의 브리태니커회사들도 한국에서 많은 것을 배워갔습니다.


한국의 문화계 인사들은 100회에 걸쳐 '브리태니커 판소리 감상회'를 개최하고 〈브리태니커 판소리 전집〉을 펴내는 등 한국의 전통 문화를 되살리는 데 탁월한 업적을 이룬 한창기 사장에게 뜨거운 박수를 보냈습니다. 이와 함께 한국어로 된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편찬의 필요성이 점차 커져 갔습니다.


개발 당시에는 '코리아나 Koreana'라고 불렸던 한국어판 〈브리태니커 세계 대백과사전 Britannica World Encyclopædia/BWE〉이 발간되기까지는 오랜 역사가 필요했습니다. 한국브리태니커회사가 설립된 지 1년 뒤 일본브리태니커회사에서 일본어판 〈브리태니커 국제 백과사전〉을 시작할 때, 저는 지금은 국회의원이 된 손세일 씨에게 부탁해 도쿄[東京]에서 일본어판 편집진과 함께 일하면서 한국어판 백과사전을 위한 계획을 세우도록 부탁했습니다. 당시 〈동아일보〉의 회장이었던 고 김상만 씨도 이 계획에 적극적인 관심을 보였고, 우리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동아일보〉와 공동으로 한국어판 백과사전을 편찬하는 일에 대해 얘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브리태니커 본사 임원들을 설득하는 일은 몹시 어려웠고, 그들이 이 계획에 대해 동의하기까지는 상당한 시일이 걸렸습니다. 그런 중에 1985년 한창기 사장이 잡지와 그의 숙원이던 문화사업에 더욱 전념하기 위해 한국브리태니커회사를 사임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한창기 씨의 뒤를 이어 사장이 된 이연상 씨는 회사 설립 당시부터 일했던 분이었으며, 한국어판 백과사전 편찬 계획에 적극 찬성하고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이연상 사장은 1987년 시카고 본사의 국제상품개발부(International Products Development)의 도움을 받아 한국어판 백과사전 편찬에 관한 구체적인 계획을 마련했고, 그 이듬해에 본사 승인을 얻었습니다. 젊고 유능한 편집자들의 헌신적인 노력과, 김준엽 총장을 비롯한 한국 최고의 지성을 대표하는 이들로 구성된 각 분야 자문위원들의 도움을 받아 드디어 한국어판 〈브리태니커 세계 대백과사전〉을 성공적으로 완간할 수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편집작업이 그렇듯, 한국어판 백과사전을 만드는 데도 예상했던 것보다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특히 완간을 앞두고 개발비용이 예산을 초과해 곤란을 겪고 있던 때에 받은 〈동아일보〉 고 김상만 회장의 지원에 대해 지금도 깊은 고마움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의 결단으로 〈동아일보〉와 공동출판이 결정되었으며, 백과사전 편찬 작업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습니다. 첫 권이 출간된 것은 1992년이었고, 1994년에는 마지막 권인 27권을 완성했습니다. 〈브리태니커 세계 대백과사전〉은 진정한 의미에서 한국에서는 처음인 '국제적인 백과사전'이었고, 브리태니커로서도 가장 중요한 상품의 하나가 되었습니다. 이 백과사전은 한국과 세계 여러 나라 학자들이 함께 노력해 이룩한 결실이었으며, 출판계에서도 획기적인 업적이라고 널리 인정을 받았습니다. 지난 몇 년간 예상보다도 많은 독자가 이 백과사전을 구입한 것에서, 그 명성과 효용성을 독자들도 인정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1993년 거의 4반세기를 회사를 위해 일해왔던 이연상 사장이 사임했습니다. 그 전후 몇 년 동안 전세계의 브리태니커회사가 거의 동시에 지도력의 약화라는 고통을 심각하게 겪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1995년 브리태니커가 새 주인을 맞아 신선한 자극을 받으면서, 새 세기를 향해 갈 방향을 설정할 수 있었던 것은 정말 다행한 일이었습니다.


새 브리태니커 회사는 인터넷 온라인 서비스와 시디롬(CD-ROM)을 통해, 가장 권위 있는 '지식의 보고'를 독자에게 즉시 제공하는 세계 최고의 회사로 발돋움하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영어판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의 증보판 발간과 함께 몇 년 전부터 개발해온 〈브리태니커 온라인 Britannica Online〉 서비스와 CD-ROM판의 1998년판을 선보였으며, 그 밖에도 일본과 중국에서는 개정판을 위한 작업과 CD-ROM 개발이, 인도·러시아·폴란드·헝가리·라틴아메리카 국가에서는 그 지역 언어로 된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출간을 위한 편찬 작업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연상 사장 이후 한때 한국브리태니커회사에는 본사에서 파견된 경영자가 와 있었지만, 지금은 한국인에게 경영이 다시 맡겨졌으며, 전자출판과 인쇄매체 두 분야를 병행 발전시키는 쪽으로 회사의 방향을 설정하고 판매와 편집 면에서 함께 힘찬 전진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오랜 세월 동안 한국브리태니커회사의 한 가족으로 지내온 사람으로서 이 책 편집진의 노고를 치하하며, 앞으로 다가올 30년도 지난 30년만큼이나 성공적이고 또한 좋은 일이 많이 있는 기간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프랭크 B. 기브니 (김사라 옮김) - 인용 출처 브리태니커

* 관련자료

뉴욕타임즈 부고 http://www.nytimes.com/2006/04/14/us/14gibney.html?ex=1302667200&en=2a1c5325e5e5ccf5&ei=5088&partner=rssnyt&emc=r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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