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값과 책값
ysl* 컨텐츠/그한마디 / 2009. 5. 5. 00:28
술값과 책값
노성두
책들을 안 읽는다고 난리다. 우리나라 평균치를 내보니까 한 가정에서 한 달 책값 지출이 책 한 권 살까말까 수준이라는 것이다. 아파트 살면서 재활용쓰레기 버리는 날에 학습지와 시험풀이 문제집 등이 산더미처럼 쌓이는 걸 보면 사람들이 책을 아주 싫어하는 건 아닌 듯한데, 서점과 출판사에서는 끝이 안 보이는 장기불황 때문에 죽겠다는 비명이 터져 나온다니 우리 배달민족의 독서 습관은 알다가도 모를 노릇이다.
책은 원래 두루마리 형태로 둘둘 말려 있다가 요즘처럼 낱장을 펼쳐보는 코덱스 형식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책을 책장에 꽂아두고 필요할 때 쑥 뽑아서 읽을 수 있는 편리한 세상이 된 것이다. 또 책값을 이야기할 때 단골로 등장하는 비교 대상은 술값이다. 소주 한 잔 걸치고 지갑에서 돈 만원은 호기 있게 지르지만, 책방에서 책을 고를 때는 책값이 "9800원이냐, 12800원이냐?" 를 가지고 벌벌 떤다는 것이다.
술값 낼 때 마음과 책값 치를 때 심정이 이렇게 다르다니 차라리 술집과 책방을 겸업하는 퓨전 업소를 차리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사실 따지고 보면 책방에서 책을 돈 내고 살 수 있는 것도 엄청난 호사라고 할 수 있다. 인문주의의 아버지로 일컫는 이탈리아 시인 페트라르카는 알프스 비탈에 숨은 수도원 지하를 뒤지면서 고대 문헌 쪼가리들을 발굴하느라 발품을 팔았다고 한다. 곰팡내 물씬 풍기는 서고에 들어가서 올리브 등잔 심지를 돋우고 앉아서 낡아서 바삭거리는 필사본들을 칠면조 깃털 펜에 검댕이 잉크 묻혀 가면서 한 글자 한 글자 옮기며 청춘을 보냈고, 어렵사리 찾아낸 판본들을 이리저리 비교하면서 사라진 고대의 원본을 복원하느라 머릿기름을 짰다고 한다. 뜯 겨나가고 좀 벌레와 생쥐의 이빨에 절단 난 쪼가리 글들을 늘어놓고는 퍼즐 맞추기 하는 것처럼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비교하고 맞추어보고 추리하고 꿰매면서 얼추 모양새를 갖추어놓은 것을 발표하면 인문학자들이 이마를 맞대고 앉아서 밤새 토론하며 세상의 숨은 진리를 발견한 것처럼 학문 연구에 열을 올렸다는 것이다.
오늘날 책방에 즐비하게 꽂혀 있는 플라톤이나 키케로나 세네카 같은 고전문헌들을 펴보면 사랑스러운 글자들이 오글오글 모여 있는데, 이게 결코 공짜로 이루어졌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고단한 몸을 이끌고 비데도 없던 시절에 빤스도 제 때 못 갈아입은 채 험준한 알프스의 암벽을 안방처럼 오르내리던 오백 년 전 인문학자들의 거친 숨소리와 끈적끈적한 땀방울이 묻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 사정을 생각하면 좋은 시대에 태어나서 지하철 타고 대형서점에 가서 눈에 띄는 대로 사랑스러운 알짜배기 고전을 구입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행운인가!
우리나라는 산업화 근대화가 무척 박진감 있게 진행된 나라라고 한다. 요즘은 어디나 25시 편의점이 즐비하지만. 우리 어릴 적에는 새콤한 눈깔사탕 한 알도 무척 귀해서 왕개미 똥구멍을 핥아먹으며 시큼털털한 입맛을 다시곤 했던 기억이 난다.
또 여름 밤 가물가물한 호롱불 밝히고 왕 할머니가 입담 좋게 옛날이야기를 풀어놓으면, 저거 지난 번 들었을 적에는 줄거리가 달랐던 것 같은데 그 새 새로운 버전이 출시되었나 보군, 하면서 잠결에 고개를 주억거리곤 했다.
나이가 유세라고 노인네들 말씀은 무조건 경청하면서 기억에 새겨두었다가 또 다른 자리에 가서는 줄거리에 살을 붙여서 퍼뜨리곤 했는데, 긴가 민가 하는 구전 이야기들을 불과 한 세대가 지난 지금 인터넷 지식검색으로 실시간 정보의 신뢰성 여부를 확인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서양에서도 사정은 비슷했을 것이다. 신부님이나 목사님이 설교를 늘어놓으면, 작년 부활절 설교 때도 저 얘기 하고, 재작년 부활절 때도 똑같은 얘기 하시더니 올해도 역시나로군. 그런데 자꾸 설교 말씀에 알게 모르게 군말이 붙는 것 같단 말씀이야. 어디까지가 성경 말씀이고 어디부터가 지어낸 구라인지 알쏭달쏭하니, 이러다가 우리 모두 ‘같기도’ 신자가 되는 게 아닌지 몰라... 이렇게 중얼거렸을 것이다.
하긴 장터에 출몰하는 각설이 구설이나 너덜너덜한 목판화 소식지를 통해서 세상물정을 접하던 근대 초기의 인간들이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이나 오비디우스의 <변신이야기>를 말끔한 책으로 처음 만났을 때의 문화적 충격은 개미 파먹던 호롱불 세대에서 인터넷 지식검색 세대로의 도약과 비교해서 조금도 모자라지 않았을 것이다.
책은 투자대비 효용성이 무척 크다. 효용성은 MP3가 더 크거든요? 하고 반박한다면 할 말이 없지만, 술 한 잔 보다 책 한 권이 훨씬 낫다는 사실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듣고 보니 지당한 말씀인데, 좋은 책을 어떻게 골라야 할지 몰라서......라고 망설이는 분들을 위해서 좋은 책 고르는 법을 하나 추천하고 싶다.
좋은 책 고르는 법
1. 초등학생이, 중학생이, 고등학생이, 대학생이, 이십대가 꼭 읽어야 할 책의 목록은 무시한다.
2. 삼십에 되기 전에, 사십이 되기 전에, 오십이 되기 전에, 죽기 전에 꼭 읽어야 할 책의 목록도 무시한다.
3. 서울대학교 교수들이 추천한, 부산대학교 교수들이 추천한, 종로학원 강사들이 추천한, 책사랑 모임이 추천한 책의 목록도 무시한다.
4, 한국출판인회의가 추천한, 뉴욕타임스 추천한, 교육방송이 추천한, BBC가 추천한 책의 목록도 무시한다.
5. 그렇다면 책을 고르는 가장 좋은 방법은 무엇일까?
무조건 책방에 가서 책을 펼치고 몇 쪽 읽어본 다음에 나의 독서수준과 입맛에 맞는 책을 고른다.
책은 칠레 포도주나 미국산 쇠고기와 달라서 음미하고 꼭꼭 씹어서 맛을 본 다음에 살 수 있다. 책은 또 총기류나 도검류와 달라서 관할 경찰서에 가서 소지허가증을 신청하고 일주일씩 기다려서 받을 필요도 없다. 책은 포르쉐나 람브로기니처럼 지출 부담이 크지도 않을뿐더러, 귀찮은 애인처럼 걸핏하면 토라지거나 시시콜콜 잔소리를 늘어놓지도 않는다. 책은 또 박식무비한 지식으로 우리에게 도움을 준다. 군대 안 가는 법부터 자살하는 법까지 모르는 게 없으니까. 이럴진대 어떻게 사랑스러운 책 사기를 주저할 수 있단 말인가!
[참고자료]
노성두 님의 조인스 블로그
http://blog.joins.com/media/index.asp?uid=nohshin2
노성두
책들을 안 읽는다고 난리다. 우리나라 평균치를 내보니까 한 가정에서 한 달 책값 지출이 책 한 권 살까말까 수준이라는 것이다. 아파트 살면서 재활용쓰레기 버리는 날에 학습지와 시험풀이 문제집 등이 산더미처럼 쌓이는 걸 보면 사람들이 책을 아주 싫어하는 건 아닌 듯한데, 서점과 출판사에서는 끝이 안 보이는 장기불황 때문에 죽겠다는 비명이 터져 나온다니 우리 배달민족의 독서 습관은 알다가도 모를 노릇이다.
책은 원래 두루마리 형태로 둘둘 말려 있다가 요즘처럼 낱장을 펼쳐보는 코덱스 형식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책을 책장에 꽂아두고 필요할 때 쑥 뽑아서 읽을 수 있는 편리한 세상이 된 것이다. 또 책값을 이야기할 때 단골로 등장하는 비교 대상은 술값이다. 소주 한 잔 걸치고 지갑에서 돈 만원은 호기 있게 지르지만, 책방에서 책을 고를 때는 책값이 "9800원이냐, 12800원이냐?" 를 가지고 벌벌 떤다는 것이다.
술값 낼 때 마음과 책값 치를 때 심정이 이렇게 다르다니 차라리 술집과 책방을 겸업하는 퓨전 업소를 차리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사실 따지고 보면 책방에서 책을 돈 내고 살 수 있는 것도 엄청난 호사라고 할 수 있다. 인문주의의 아버지로 일컫는 이탈리아 시인 페트라르카는 알프스 비탈에 숨은 수도원 지하를 뒤지면서 고대 문헌 쪼가리들을 발굴하느라 발품을 팔았다고 한다. 곰팡내 물씬 풍기는 서고에 들어가서 올리브 등잔 심지를 돋우고 앉아서 낡아서 바삭거리는 필사본들을 칠면조 깃털 펜에 검댕이 잉크 묻혀 가면서 한 글자 한 글자 옮기며 청춘을 보냈고, 어렵사리 찾아낸 판본들을 이리저리 비교하면서 사라진 고대의 원본을 복원하느라 머릿기름을 짰다고 한다. 뜯 겨나가고 좀 벌레와 생쥐의 이빨에 절단 난 쪼가리 글들을 늘어놓고는 퍼즐 맞추기 하는 것처럼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비교하고 맞추어보고 추리하고 꿰매면서 얼추 모양새를 갖추어놓은 것을 발표하면 인문학자들이 이마를 맞대고 앉아서 밤새 토론하며 세상의 숨은 진리를 발견한 것처럼 학문 연구에 열을 올렸다는 것이다.
오늘날 책방에 즐비하게 꽂혀 있는 플라톤이나 키케로나 세네카 같은 고전문헌들을 펴보면 사랑스러운 글자들이 오글오글 모여 있는데, 이게 결코 공짜로 이루어졌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고단한 몸을 이끌고 비데도 없던 시절에 빤스도 제 때 못 갈아입은 채 험준한 알프스의 암벽을 안방처럼 오르내리던 오백 년 전 인문학자들의 거친 숨소리와 끈적끈적한 땀방울이 묻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 사정을 생각하면 좋은 시대에 태어나서 지하철 타고 대형서점에 가서 눈에 띄는 대로 사랑스러운 알짜배기 고전을 구입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행운인가!
우리나라는 산업화 근대화가 무척 박진감 있게 진행된 나라라고 한다. 요즘은 어디나 25시 편의점이 즐비하지만. 우리 어릴 적에는 새콤한 눈깔사탕 한 알도 무척 귀해서 왕개미 똥구멍을 핥아먹으며 시큼털털한 입맛을 다시곤 했던 기억이 난다.
또 여름 밤 가물가물한 호롱불 밝히고 왕 할머니가 입담 좋게 옛날이야기를 풀어놓으면, 저거 지난 번 들었을 적에는 줄거리가 달랐던 것 같은데 그 새 새로운 버전이 출시되었나 보군, 하면서 잠결에 고개를 주억거리곤 했다.
나이가 유세라고 노인네들 말씀은 무조건 경청하면서 기억에 새겨두었다가 또 다른 자리에 가서는 줄거리에 살을 붙여서 퍼뜨리곤 했는데, 긴가 민가 하는 구전 이야기들을 불과 한 세대가 지난 지금 인터넷 지식검색으로 실시간 정보의 신뢰성 여부를 확인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서양에서도 사정은 비슷했을 것이다. 신부님이나 목사님이 설교를 늘어놓으면, 작년 부활절 설교 때도 저 얘기 하고, 재작년 부활절 때도 똑같은 얘기 하시더니 올해도 역시나로군. 그런데 자꾸 설교 말씀에 알게 모르게 군말이 붙는 것 같단 말씀이야. 어디까지가 성경 말씀이고 어디부터가 지어낸 구라인지 알쏭달쏭하니, 이러다가 우리 모두 ‘같기도’ 신자가 되는 게 아닌지 몰라... 이렇게 중얼거렸을 것이다.
하긴 장터에 출몰하는 각설이 구설이나 너덜너덜한 목판화 소식지를 통해서 세상물정을 접하던 근대 초기의 인간들이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이나 오비디우스의 <변신이야기>를 말끔한 책으로 처음 만났을 때의 문화적 충격은 개미 파먹던 호롱불 세대에서 인터넷 지식검색 세대로의 도약과 비교해서 조금도 모자라지 않았을 것이다.
책은 투자대비 효용성이 무척 크다. 효용성은 MP3가 더 크거든요? 하고 반박한다면 할 말이 없지만, 술 한 잔 보다 책 한 권이 훨씬 낫다는 사실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듣고 보니 지당한 말씀인데, 좋은 책을 어떻게 골라야 할지 몰라서......라고 망설이는 분들을 위해서 좋은 책 고르는 법을 하나 추천하고 싶다.
좋은 책 고르는 법
1. 초등학생이, 중학생이, 고등학생이, 대학생이, 이십대가 꼭 읽어야 할 책의 목록은 무시한다.
2. 삼십에 되기 전에, 사십이 되기 전에, 오십이 되기 전에, 죽기 전에 꼭 읽어야 할 책의 목록도 무시한다.
3. 서울대학교 교수들이 추천한, 부산대학교 교수들이 추천한, 종로학원 강사들이 추천한, 책사랑 모임이 추천한 책의 목록도 무시한다.
4, 한국출판인회의가 추천한, 뉴욕타임스 추천한, 교육방송이 추천한, BBC가 추천한 책의 목록도 무시한다.
5. 그렇다면 책을 고르는 가장 좋은 방법은 무엇일까?
무조건 책방에 가서 책을 펼치고 몇 쪽 읽어본 다음에 나의 독서수준과 입맛에 맞는 책을 고른다.
책은 칠레 포도주나 미국산 쇠고기와 달라서 음미하고 꼭꼭 씹어서 맛을 본 다음에 살 수 있다. 책은 또 총기류나 도검류와 달라서 관할 경찰서에 가서 소지허가증을 신청하고 일주일씩 기다려서 받을 필요도 없다. 책은 포르쉐나 람브로기니처럼 지출 부담이 크지도 않을뿐더러, 귀찮은 애인처럼 걸핏하면 토라지거나 시시콜콜 잔소리를 늘어놓지도 않는다. 책은 또 박식무비한 지식으로 우리에게 도움을 준다. 군대 안 가는 법부터 자살하는 법까지 모르는 게 없으니까. 이럴진대 어떻게 사랑스러운 책 사기를 주저할 수 있단 말인가!
[참고자료]
노성두 님의 조인스 블로그
http://blog.joins.com/media/index.asp?uid=nohshin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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