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득의 정석=논리+감성의 ‘핑퐁 게임’
정보 담당자·암 선고 전문 의사가 조언하는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얘기 웃으며 하는 방법
당신은 보험사 영업사원이다. 회사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당장 보험 상품을 단 하나라도 더 팔아야 하는 입장이다. 절박한 심정으로 찾아간 곳에서 맞닥뜨린 사람이 하필이면 당신을 첫사랑으로 여기는 옛 남자 친구다. 과연 무슨 말을, 어떻게 할 것인가?
이렇게 절박한 경우가 아니더라도, 직장 생활을 하다 보면 어려운 얘기를 꺼내야 하는 순간이 닥친다. 점심시간인데 결론도 나지 않는 회의를 질질 끄는 상급자에게 빨리 자리를 정리하자고 말하고 싶다. 상사의 자존심을 건드리지 않고 어떻게 말할 것인가.
직장 생활은 이런 순간의 연속이다. 누군가는 할 말을 가슴에 묻어두고도 핀잔을 듣는다. 반면 하고 싶은 얘기는 다하면서도 칭찬을 듣는 이도 있다. 단지 재능 탓일까. 아니면 직업적인 훈련의 결과일까.
우리 사회에는 유독 꺼내기 어려운 말을 해야 하는 직업군이 있다. 이 분야의 전문가들, 즉 ‘대화의 달인’이라면 힌트를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정보기관의 공작 담당관들이 좋은 예다. 그들은 필요하다면 상대방을 사지(死地)로 몰아넣어야 한다. 그럴 때 뭐라고 얘기해야 할까.
#전직 정보요원의 제안
성균관대 국가전략대학원 염돈재(65) 교수에게 물었다. 그는 40년 가까이 국가정보원에서 해외 업무를 담당해 왔다. 2004년 1차장을 끝으로 현업에서 물러나, 지금은 산업보안을 가르치고 있다.
온화하지만 신중한 인상의 염 교수는 한사코 구체적인 답을 꺼렸다. 대신 뜬금없이 지난해 개봉했던 할리우드 영화 한 편을 소개했다. 로버트 드니로 감독, 맷 데이먼 주연의 영화 ‘굿 셰퍼드(good shepherd)’다. 미 정보기관인 중앙정보부(CIA)의 탄생에서부터 쿠바 침공까지를 그린 본격 첩보물이다.
이 영화에서 명문대 학생이었던 맷 데이먼은 미 연방수사국(FBI) 관계자로부터 친독일 성향의 지도교수를 감시해 달라는 요청을 받는다. 이때 수사국 관계자가 망설이는 주인공에게 했던 말이 가장 좋은 예라는 것이다. 그의 말은 “민주 시민으로서의 의무를 다해주셔야죠”였다. 말하자면 위험한 임무에 대해 공익에 입각한 명분을 만들어 주라는 지적이었다.
<직장에서 1> 직장인의 경우 염 교수가 말한 ‘공익’이라는 부분을 회사의 이익으로 변형해 활용할 수 있다. 자신의 의도가 얼마나 순수한 것인지를 설명하지 말고 회사에 얼마나 도움이 되는가를 구체적으로 제시하라는 것이다. 모든 행동이 결과로 평가되는 직장생활에서 좋은 의도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곤란한 부탁을 할 때는 “이 회사의 부장이라면 마땅히 해야 할 의무입니다”라는 식으로, 상대를 비난하고 싶을 때에는 “김 대리의 저런 행동은 회사의 이미지에 치명적일 텐데요” 정도가 좋겠다.
기획안을 내놓을 때도 마찬가지다. “제가 이런 일을 해보고 싶은데요”가 아니라 “우리 회사에서 이런 일을 할 시점이 된 것 같습니다”가 더 확실하다.염 교수에게 더욱 극단적인 상황을 제시해 보았다. 가령 어떤 종교인을 적지에 파견해야 하는 위험천만한 상황이라면 어떻게 설득할 것인가. “저라면 종교적 신념을 위해 어디까지 선교하러 갈 수 있는지를 먼저 물을 것 같아요. 위험한 곳도 마다하지 않을 것이란 답이 나오면, 그때는 얘기가 술술 풀리겠죠.”
그 다음부터는 상대방이 목적지로 떠나는 것이 종교인으로서 얼마나 큰 영광인지를 설득하는 데 주력한다. 말하자면 자신의 제안이 상대방에게도 도움이 된다는 점을 납득시키는 전략이다. 염 교수는 “오랜 경험을 통해 볼 때 공익적인 명분을 제공하거나 ‘윈-윈’이라는 점을 이해시키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말했다.
<직장에서 2> 이 부분은 휴일 당직 근무나 야근, 외근 스케줄을 바꾸고자 하는 직장인들이 가장 많이 활용할 수 있는 조언이다. 상대가 곤란해 할 만한 도움을 청할 때에 적당하다. 보통 직장인들은 이럴 때 예전에 자신이 베풀었던 도움과 친절에 관한 얘기를 먼저 꺼낸다. 그러면 상대는 본능적으로 그 상황을 회피할 방법을 찾게 된다.
“이 차장, 내가 저번 달에 휴일근무 대신해줬잖아”라고 말을 시작하지 말고 “이번 주말에 사장님 내외분이 회사에 오신다는데 눈도장 찍을 좋은 기회가 될 거야”라고 하면 된다. 상대방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파악하고 이익이 된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 핵심이다. 이익은 사람을 움직이는 가장 큰 동기가 된다.
#암 전문의사의 충고
그렇다면 도저히 명분을 내세울 수 없는 상황이라면 어떨까. 상대에게 도움이 된다는 점을 납득시키기도 어렵다면. 환자에게 암 발병 사실을 알려야 하는 의사를 생각해보자. 상대방의 입장을 고려하면 도저히 입이 떨어지지 않는 경우다.
국립암센터 원장을 지낸 박재갑(60) 서울대 외과학 교수는 지금도 늘 암환자를 마주한다. 외래 진료시에는 하루에도 70~80명을 만날 정도다. 대부분이 1, 2차 진료 과정을 거쳐 마지막 단계에서 자신을 찾아온다. 그런 만큼 환자에게 말을 꺼내기가 어렵다.
하지만 상황을 제대로 얘기해줘야 한다는 것이 박 교수의 지론이다. 왜 그럴까. 환자 스스로가 암 여부에 대해 의심을 품은 채 찾아오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는 숨기거나 거짓말을 하는 것이 오히려 상황을 악화시킬 수 있다. 물론 예외는 있다. 나이가 아주 어리거나 많은 경우, 또는 가족이 암 통보에 반대하는 경우다. 대신 그는 가능하면 상황을 희망적으로 얘기한다. 반면 요즘 젊은 의사들은 지나치게 통계에 치우쳐 환자에게 겁을 주는 경향이 있다.
박 교수는 “희망을 가져야 힘든 치료 과정을 더 잘 견디고 살아남을 수 있다”고 말했다. 게다가 의사들로서는 생과 사에 대해 함부로 속단할 수도 없다. 그것은 의사의 영역을 벗어난다. “암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고 소극적으로 얘기하는 방법도 있지요. 환자가 받을 충격 때문에 가족들이 통보를 반대할 경우에는 ‘거기가 좀 막혀서 수술을 해야겠네요’라고 하기도 하죠. 생존율을 위해서라도 과장하지 않는 범위에서 최대한 좋은 쪽으로 이야기합니다.”
<직장에서 3> 희망적인 얘기는 사람의 마음을 누그러뜨린다. 희망적인 얘기로 상대의 감정에 영향을 줄 수 있고, 감정을 움직이면 상대는 당신의 설득이나 말을 훨씬 잘 받아들이게 된다. 상사 대신 들어간 간부회의에 대한 보고를 할 때 “회장님께서 이번 프로젝트가 마음에 안 드신답니다”가 아니라 “회장님께서 다음 프로젝트에 거는 기대가 크시답니다”가 효과적이다. 전체 상황 중 가장 희망적인 부분을 먼저 이야기하기만 하면 된다.
#베테랑 형사의 수완
논리가 안 통할 때 인간적으로 접근하는 위력은 기대 이상이다. 지난달 우예슬·이혜진 양 납치살인사건 용의자 정모씨의 자백을 받아낸 경찰청 범죄정보지원계 권일용(42) 경위가 그랬다. 정씨는 첫 대면부터 막무가내로 살해 사실을 부인했다. 그러자 권 경위는 인내심을 갖고 얘기를 들어주는 쪽을 택했다. 이런 식의 교감을 통해 상대방이 자신의 편이 돼 줄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앞뒤가 안 맞는 결정적인 대목에 대해 공박했다. 그것으로 정씨는 무너지고 말았다. 권 경위는 “용의자들을 대할 때, 비언어적 요소나 문화적인 접근이 더 중요할 때가 있습니다. 처음 만나는 순간, 3초 이내에 사람들은 서로에 대해 많은 것을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적인 면을 고려해 대처법을 찾아야 합니다”라고 권한다.
<직장에서 4> 말도 안 되는 트집을 잡고 쏘아붙이기만 하는 상사를 대할 때 논리적 반박은 아무 소용이 없다. 옳지 않은 일도 ‘무조건 시키는 대로 하라’는 상사와의 다툼과 논쟁은 내가 의도하지 않아도 언제든 일어날 수 있다. 그럴 때에는 상대의 입장이 되어서 찬찬히 생각해본다. 하급자로서 혹시 윗사람보다 잘나 보였던 것은 아닌지, 상사에게 개인적인 어려운 일이 있는 것은 아닌지 등. “저는 죽어도 그 일은 못하겠습니다”가 아니라 “잠깐 나가서 차 한잔 하시죠. 오늘은 제가 살게요”가 문제를 해결할 것이다.
그렇다면 맨 처음 언급한 상황에서 웃으면서 얘기를 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첫사랑에게는 실직 당한 자신의 남편에 대한 사연부터 솔직하게 털어놓아야 한다. 그래야 상대방이 경계심을 풀고 심리적 무장을 풀게 된다. 반면 배고파 하는 상사에게는 점심 시간이 다 됐음을 상기시킬 필요가 있다. 어떤 경우든 어려운 얘기를 꺼내야 할 때는 한 번 생각해볼 일이다. 그보다 훨씬 더 까다로운 이야기도, 웃으면서 건네는 부류들이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이여영 기자
[자료출처]
중앙일보 코리아 데일리 2008.5.
http://www.koreadaily.com/Asp/article.asp?sv=la&src=metr&cont=metr30&aid=20080429082015200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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